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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기타설교

(눅 2:8-11)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by 이서영 목사 2016. 12. 26.

(눅 2:8-11)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어떤 사람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는가?(8절)

 

목자들이 주님의 사자가 어떤 사람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는가? 비천한 자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목축을 불결하게 여긴 애굽 사람들의 정서 때문이었다(창 46:34). 요즈음도 전원주택을 마련할 때 주위에 축사가 있으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의 사자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장로와 같은 고상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던 비천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막강한 권력을 잡고 호화로운 왕궁에 있던 자에게도, 떵떵거리면서 살던 부자에게도, 웅장한 성전에 있는 자에게도 전해주지 않고 목자들에게 전해준 것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낮은 자리에 임하셔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도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위와 물질을 가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멸시천대를 받고 외면당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손잡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가장 낮은 마지막 그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찾아가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밖에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어떤 사람에게 전해주는가? 자기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전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에도 잠들지도 않고 실내도 아니라 바깥에서 지켰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기 일에 충성된 자에게 나타난다. 천직에 충성할 때 전해준다.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천직을 수행할 때이다. 어부인 두 형제와 세관의 마태가 그러하다. 심지어 사울도 그러하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기 살기로 핍박하러 가는 안 좋은 일로 갔지만 자기 일에 충성스럽게 수행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았다. 큰 일을 맡겨 주면 충성하겠다. 아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큰 일에도 등한히 한다(눅 16:10). 그러므로 적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자들이 우리가 없기에 약탈자나 맹수로부터 보호해야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까 바깥에서 지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러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충성을 하였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얼마나 충성했나? 원어상의 의미는 신약성경에 한 번 나오는데 “들에서 살다”는 뜻이다. 바깥이라는 의미보다는 집과 우리가 없이 들판에서 방목하면서 양과 함께 들에서 사는 경우를 의미한다. 혼자 편안히 잠들지 않고 양 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키더니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살펴본 충성의 의미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충성하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 수 있다. 목자들은 꾸벅꾸벅 졸지도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원어 상으로는 두 개의 단어이다. “지키”는 “지켜보다, 파수하다”는 뜻이고 “더니”는 “경계, 감시, 보호”를 뜻한다. 둘 다 어원은 같다.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거듭해서 또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감시하고 경계하고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일에 충성함으로써 자기 양 떼를 철저하게 보호한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이 그 무엇이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는가?(8절)

 

밤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어두울 때 전해주었다. 밤에 나타나야 빛을 두루 비추기가 좋아서인가? 어두우면 빛이 더 빛난다는 의미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동방박사들도 밤에 나타났다. 낮에 별이 잘 보일까? 밤에 더 잘 보인다. 아기 예수님을 찾은 시각이 언제인가?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탄생은 시간적으로 언제인가? 저녁이므로 밤에 나타난 것이다. 밤에 탄생하셨으므로 밤에 사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밤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밤이라서 밤에 전해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밤을 밝히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밤은 어둡고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역설적으로 어두워야 빛이 필요하다?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에게도. 예수님 자신도 인류의 어두움을 밝히실 큰 빛, 참 빛으로 오셨다(마 4:16, 행 22:6, 요 1:9).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빛이므로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어둡던 가정과 심령과 나라에 예수님의 크신 참 빛이 들어오면 밝아지는 것이다. 어두움의 세력과 어두움의 일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누가 전해 주었는가?(9절)

 

주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의 사자가 전해주었다. 그러면 주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은 때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때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문맥으로 알 수 있다. 사자와 말씀과 아들 등과 관련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가리키고, 이외의 호칭은 대부분 예수님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 즉 “주의 사자”와 “주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자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의미한다.

 

두루 비추매 원어 상으로는 비춘다는 말은 없다. 원어 상의 의미인 “두루 다니다, 돌아다니다”를 의역한 것이다. 뜻에 따라 번역한 것인데 번역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영광이 두루 돌아다닌다는 표현은 그만큼 영광이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주의 사자가 나타나자 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어두운 밤에 무언가가 나타나자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현상에 따른 감정의 반응에 의해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할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다. 마태복음 17장 5-8절 말씀을 보면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아멘. 하나님의 영광이 두루두루 임하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지극히 크시고도 높으신 하나님을 뵙게 되면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두려움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제대로 깊이 알게 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일들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주의 사자가 무슨 소식을 전해주었는가?(10절)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주의 사자가 모든 백성에게 있게 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모두가 크게 기뻐할 정도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소식이기에 그렇게도 큰 기쁨을 주는가? 이것에 대해 11절에 이어서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좋은 소식인 이유는 무엇인가?(11절)

 

너희를 위하여 번역할 때 생략된 종속접속사 “o{ti(호티)”는 “왜냐하면 ~ 때문이다. ~ 때문에”(because, for)라는 뜻이다. 좋은 소식(good news)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인 것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누구를 위하여 전해졌는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림의 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 되므로 무엇보다 좋은 소식인 것이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리고 좋은 소식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구주, 곧 그리스도 주께서 나셨다는 것이다. 이때의 주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시며 주인이신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것이 좋은 소식인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탄생하셨나? 죄가 없으신 하나님을 위하여 나시고 천사를 위하여 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구주로 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해 나셨다. 우리와 같은 병든 자를 구하기 위해 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우리에 의해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것이 아니다. 원죄든 자범죄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죄에 시달리고 죄로 말미암아 영벌을 받아야 할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어 영원히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 어찌 크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비록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죄의 영향력이 있어 부분적인 기쁨만 누리게 되지만 죄와 사망과 저주와 악에서 벗어나는 그날부터는 온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므로 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겠는가! 이러한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죄도 해결 받고, 삶의 짐도 해결 받고, 사역의 짐도 해결 받으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구주 탄생의 기쁨을 진정으로 크게 누리시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실제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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