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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개관/성경개관PPT

요한계시록 개관

by 이서영 목사 2023. 11. 29.

요한계시록 개관

 

사랑합니다. 로고스성경연구소 소장 이서영 목사입니다. 이 글은 제가 쓰고 있는 「한눈에 보는 요한계시록」을 참고해서 요한계시록을 경배의 관점에서 PPT로 요약하고 보완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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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개관 (4대3).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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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경배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경배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셔서 불경배자들은 심판하시고 경배자들은 구원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경배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구원을 받게 된 경배자들은 더욱 더 전심으로 경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면 경배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경배의 관점에서 정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먼저 서언에서 중점적으로 말씀드린 후에 요한계시록의 구절과 주제와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책 가운데 마지막에 나오는 책답게 성경을 총 정리하고 결론을 맺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라는 것입니다(14:7).
인류가 시작해서 세상 끝에 이르기까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111:10, 잠 1:7, 9:10).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는 하나님께 경배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사탄을 경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류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끝까지 하나님께 경배드리지 않고 사탄을 경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불경배자들은 최종적으로 사탄과 함께  모두 불못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계시입니다.
인류가 시작하면서 보여주는 흐름은 하나님께 경배드리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고 사탄을 경배하면 불못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책 가운데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4:10, 5:29, 6:2, 13, 24, 8:6, 10:12, 20, 13:4, 14:23, 17:19, 31:12, 13 등)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는 것을(4:35, 39, 5:7, 6:14, 8:19, 11:28 등)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지켜야 하는 대표적인 계명은 십계명입니다(신 5:1~33, 7~21).
인류가 지켜야 할 최고의 법인 제1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나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요약해보면 하나님은 경배하고 사탄은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사탄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였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누구를 경배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시험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사탄의 미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려면 음식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마 4:4).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에 대해 수많은 곳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명기 5장 29절입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구조가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면 영원히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특히 더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총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복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시작과 끝에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3, 2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는데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22:12).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여주신 것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한(1:19) 요한계시록을 그대로 지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한계시록을 보면 인류의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지 아니하는 불경배자들은 사탄을 경배하게 되고 그 결과 멸망을 당해서 불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경배자들은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최후의 백보좌 심판으로(20:11-15) 상과 멸망(11:18)으로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경배의 중요성을 더욱 더 깊이 절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크고도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경배자들이 구원 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경배드리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4:8-9), 이십 사 장로들(4:10-11),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5:8-10), 많은 천사(5:11-12), 모든 피조물(5:13),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7:9-10), 모든 천사(7:11-12), 하늘에 큰 음성들(11:15), 이십 사 장로(11:16-18),
하늘에 큰 음성(12:10-12),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15:2-4),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과 같은 것(19:1-2),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19:4-5),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19:6-8).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이므로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 드리면서 경배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4:10).
이러하므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7:10)라고 찬양드리면서 경배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어떻게 됩니까?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은 어느 시대나 종말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말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시대인 로마시대에 박해와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오늘날은 상상할 수 없는 톱으로 켜는 등의 끔찍한 순교를 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히 11:37).
그러나 마침내 경배자들이 승리하여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로 보면 세상 끝인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한 적도 있었고 세계대전이 일어난 적도 있었고 큰 화산폭발과 지진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지구 종말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했던 노아 시대는 어떠했습니까?
지구 종말을 맞이할 뻔한 그러한 시대였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있기에 최후의 심판과 구원까지 시대마다 심판과 구원도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시대나 인물이나 사건을 가지고 최후에 등장하게 되는 적그리스도와 666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릅니다.
최후의 종말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종말이 있어왔습니다. 그 시대마다 적그리스도와 666이 등장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마지막 시대에도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종말을 신약성경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2장 18절에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면서 오리라고 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최후의 종말은 언제 인지 모르나 시대의 종말은 언제나 있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는 최후의 종말이 언제 인지는 정확하게 잘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인류 최후의 날이 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속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종말의 징조를 알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깨어 준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하므로 복음서 가운데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3-35).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이렇게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제든지 달란트를 결산해서 보고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속히 오셔서 결산해주신다는 예수님의 언약을 우리는 준엄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 나를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속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의 징조에 지나치게 빠져들기보다는 현재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삶 가운데 산 제사의 삶을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제사로 언약하신 존재이므로(시 50:5) 그러한 언약된 경배자답게 산 제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땅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경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느냐” 아니면 “사탄을 경배하느냐”의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참되게 경배드릴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은 경배를 명령하고(14:7) 있습니다.
그러한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 전체를 잘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사탄을 경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라고 하고 있는 십계명부터 지키면 됩니다.
이러한 것과 아울러 성경 전체에서 경배와 관련된 말씀을 살피고 지키면 됩니다.
예를 들면 영과 진리의 예배(요 4:24), 영적 예배(롬 12:1), 믿음의 제사(히 11:4), 찬송의 제사(히 13:15), 선행과 나눔의 제사(히 13:16), 신령한 제사(벧전 2:5) 등이 있습니다.
눈이 가득함(계 4:6, 8),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마 6:4, 6, 18), 아버지의 나라와 의(마 6:33),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
행위대로 갚으시고 심판하심(계 2:23, 20:12, 13, 전 12:14, 겔 7:8, 9, 27, 9:10, 11:21, 16:43, 22:31, 24:14, 36:19, 벧전 1:17, 왕상 8:39, 대하 15:7, 욥 34:11, 잠 24:12, 렘 17:10, 32:19) 등과 같은 말씀도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아울러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사 11:2) 채워지도록 간구하면 응답을 받게 됩니다(눅 11:13, 마 7:11).
그리하면 하나님께 왜 경배드려야 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상과 귀신을 헛되게 경배하는 장면도 보게 될 것입니다.
우상 숭배(왕상 14:9 등), 송아지 예배(출 32:8), 귀신에게 제사(고전 10:20)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탐심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는 것도(골 3:5) 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도(눅 12:15)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헛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야 할 것은 언제나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경배자로서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모든 것을 심판해주시고 보상해주시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배드리게 되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요한계시록에서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1:4, 8, 4:8, 11:17, 16:5), 주 하나님(1:8, 4:8, 11, 11:17, 15:3, 16:7, 18:8, 21:22, 22:5), 알파와 오메가(1:8),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 3, 9, 10, 5:1, 7, 13, 6:16, 7:10, 15, 19:4, 20:11, 21:5, 22:1, 3), 전능하신 이(4:8, 11:17, 15:3, 16:7, 14, 19:6, 15, 21:22),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4:9, 10, 7:2, 10:6, 15:7),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6:10), 창조하신 이(10:10, 14:7), 만국의 왕(15:3),
거룩하신 이(16:5),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16:9), 하늘의 하나님(16:11),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18:8), 주 우리 하나님(19:6),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22:16).
우리는 이와 같이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이의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보좌는 왕좌를 의미하므로 왕이신 분께서 왕좌에 앉으셔서 왕권을 가지시고 세상과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들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모든 동서고금의 왕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한 시대를 겨우 통치할 뿐이고 영혼의 구원은 손도 대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말씀을 되새겨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있는 왕좌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고 중심이 되신다는 것이고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 다른 성경책과는 다르게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가장 많은 35구절이나 됩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의미와 그러하신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십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초월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멀리 따로 떨어져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적으로 오시는 의미도 있지만 확대해보면 미래적으로 오시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현재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장차 들어가게 될 미래의 천국이 도래할 때는 우리와 온전히 영원히 함께 계시는 것으로(21:3)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계시고 어느 시대나 통치하십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적인 의미에서도 주가 되시고 영원 속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의미에서도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러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가거나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능자로서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 언제든 시간에 공백이 없이 영원히 통치해주시고 영원히 항상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영원히 아름답고 영원히 행복한 세계를 건설하시기 위하여 영원하시고 영원을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장차 오셔서 심판해 주신다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심판은 좋은 것입니다. 공정하게 의롭게 심판해 주셔서(16:5, 7, 19:2, 11) 지옥에 갈 자를 지옥으로 분리해 버리시고 천국에 갈 자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심판해주시는 것은 악한 영들과 악한 자들에게는 심히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수적인 일이고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하신 주가 되시므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능력을 행하여 주십니다.
이러하시므로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창 18:14).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셔서 성도들의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을 비롯해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고(1:1) 그러하신 주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1:8).
1장 1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고 하였고 1장 8절에서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라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므로 그만큼 성도들이 어떠한 시대와 환경과 처지에서도 소망 가운데 그러하신 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가운데 인내하면서 삶과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므로 언제나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계셔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현세적으로나 내세적으로나 항상 함께 하여 주시고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보좌에 앉으신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려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혜택을 받게 되었고 앞으로 받게 되는 우리 또한 마땅히 그러한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경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불경배자들은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시고 경배자들은 상을 주신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1118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참고해야 할 구절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인 11장 18절 바로 앞에 나오는  11장 15-17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그리고 참고해야 할 구절은 경배와 관련된 구절인데 147 153-5입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의 시작과 끝을 보면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3, 22:7).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는데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22:12).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여주신 것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한(1:19) 요한계시록을 그대로 지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라는 것을(14:7)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로 시작해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1:7, 16:15) 재림을 약속하시는 것으로(22:7, 12, 20)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한계시록에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1:1)과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들(22:6)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의 계시를 보여주고 있는데 심판과 구원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일곱 심판과 구원인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최후 심판과 구원인 백마, 백보좌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심판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해주시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완성해주시고 온전히 경배드리게 해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21:27)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경배자들은 구원을 받게 되고 기록되지 못한(13:8, 17:8, 20:15) 하나님께 경배드리지 않고 사탄을 경배하는 불경배자들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경배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구원을 받게 된 경배자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무궁하도록 경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경배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경배 여부에 따른 심판과 구원에 대한 계시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 제시해 본다면 경배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 되는 경배에 대한 계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여줌에 있어 완성의 의미가 있는 완전수인 일곱이란 숫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역설적으로 보면 일곱 승리를 의미하고 일곱 심판은 완전한 심판과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성도들에게는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 주나 하나님께 불경배하는 사탄과 사탄의 추종자들에게는 완전한 패배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완성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그리하여 구원을 완성하고 경배드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일곱 심판과 구원과 최후 심판과 구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것을 일곱 심판과 구원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4~18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도 일곱 심판과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19~21에 나오는 백마와 백보좌는 최후 심판과 구원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1장은 서문에 해당하고 마지막 22장은 결문에 해당하는데 두 장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을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심과(1:1과 22:6)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음과(1:3과 22:7) 다시 오심과(1:7과 22:7, 12, 20) 처음과 마지막(1:17과 22:13)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을 보면 경배 여부에 따른 심판과 구원으로 말미암아 경배드리는 것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니”라고 하면서 본다고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니”는 요한계시록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25구절로 압도적으로 가장 많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았다는 것인데 심판과 구원의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결론적으로는 경배드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경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이 가장 많은 20구절이며 이외에는 9구절 이하입니다. 그만큼 경배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심판하여 승리하게 해주고 구원을 완성해주고 경배드리게 해주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악한 것을 심판하여 구원해주시는 심판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경배드리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함께 마지막으로 최후 심판을 해주시고 구원을 완성해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을 영원히 누리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러하신 일을 행하신 주님께 영원히 경배드리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을 분량의 측면에서 보면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용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요한복음과 동일하게 14구절로 가장 많이 나옵니다.
심판과 연관되어 나오는 “진노”라는 용어도 12구절로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인 심판, 일곱 나팔 심판, 일곱 대접 심판을 비롯하여 큰 음녀와 큰 성에 대한 심판, 최후 심판과 같은 심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크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한순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대해 보이고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그러한 사탄과 거짓 선지자와 왕들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참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에 의해 모두 패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이렇게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연약해 보이는 성도들이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위로해주고 소망을 주고 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서 승리하는 삶과 사명이 되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노와 심판을 통해 큰 성이나 큰 음녀와 같은 것에 의해 어린 양과 성도들이 연약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다시 살아나서 왕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과 구원에 대한 계시는 자연스럽게 경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최종 목적은 영원한 경배의 삶인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심판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판과 이기는 것을 통해 그러한 구원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 성도들의 승리와 세상의 패배와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성도들이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소망을 가지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심판을 통한 승리와 구원에 이르게 해주시고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과 승리는 찬양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장로들, 큰 무리들 등이  의무감에서 강제적으로 시켜서가 아니라 지극히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경배드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배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으므로 찬양이 매우 많은 것을 앞서 서언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밖에 없고 마땅히 그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면 경배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셔서 불경배자들은 심판하시고 경배자들은 구원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세상 끝날까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경배자들은 경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탄을 경배하다가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배자들은 주님의 은혜로 사탄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됨으로써 심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구원을 받고 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하므로 경배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구원을 받게 된 경배자들이 크게 감격해서 더욱 더 힘써 경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결말을 지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라고(14:7)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탄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라고 가르치고 있는 십계명부터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종말은 어느 시대나 종말이 있어 왔고 그러다가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끔찍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는 최후의 종말이 언제 인지는 정확하게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종말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하나 종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데 집중하면 됩니다.
현재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아시고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참된 경배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삶 가운데 제사로 언약된 경배자답게 산 제사의 삶을 말씀에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지켜서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종말과 같은 것에 대한 것을 한 가지라도 더 알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경배를 한 가지라도 더 드리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속히 오셔서 결산해주신다는 예수님의 언약을 준엄하게 받아들여서 깨어서 늘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제든지 달란트를 결산해서 보고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사탄과 사탄에 속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대해 보이고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참되시고 의로우신 심판으로 모두 패망하게 되기 때문에 한순간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심판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과 구원에 대한 계시는 자연스럽게 찬양과 경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것을 심판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지금부터 영원무궁하도록 경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7:10).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2024 로고스성경연구소 https://logosbibleinstitute.tistory.com/5597 소장 이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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