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요 11:17-26)
[부활주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요 11:17-26)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가 병들어 곧 죽게 된 것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는 오빠를 볼 때마다 더 기다려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시면 얼마든지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신다던 예수님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일부러 늦게 갔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죽을 병이 아니라 이 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나사로가 죽을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오히려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만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이제 나사로에게 가자.”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시자 마르다는 곧바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만나자마자 오빠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활할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제가 잘 압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올바른 믿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 속에서 일어나야 할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 당장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은 꼭 세상 마지막 때에만 부활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다시 살아나고 변화를 받아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죽어도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죽어버린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살아날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서도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구약시대를 보면 그 시대에도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하루는 수넴 지방에 갔습니다.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간절히 권하여 음식을 대접하기에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방까지 마련해주고 침대와 책상과 의자와 촛대 등도 준비해주었습니다. 후하게 대접받은 엘리사는 그 집에 아들이 없는 것을 알고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당신이 아들을 안을 것이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지나자 엘리사가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잘 자라다가 어느 날 들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환에게 얼른 엄마에게 데려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낮 동안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슬퍼하다가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죽은 아이가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이의 몸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는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떴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 아들을 데려가시오.” 여인은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갔습니다(왕하 4:8-37).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의학과 과학의 상식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의학과 과학과 철학과 상식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초월해버립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죽은 자는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관을 멘 사람들이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기도 하고 말도 하였습니다(눅 7:11-15).
죽은 사람은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시 살아납니다. 죽어도 살아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다시 살아난다고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가끔씩 죽은 사람을 살려내십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누구를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습니까? 욥바의 다비다라는 할머니입니다. 번역하면 도르가라 하는 분인데,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그분이 죽어서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였습니다.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생전에 자기들에게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돌이켜 시체를 향해 말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난 것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행 9:36-42).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나흘이나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나사로였지만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리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사람이 걸어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12:11).
그런데 그 나사로는 지금 이 땅에 없습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믿음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결국은 죽었습니다. 만약 아직도 죽지 않았다면 지금 온 세계를 다니면서 다시 살아났다고 간증 집회를 하러다닐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습니다. 죽은 사람이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도 있지만 더 귀하고 좋은 일은 우리의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26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까? 돈 많고, 권력 많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허수아비 아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허수’입니다. 허수의 아비니까 허수인 것입니다. 사람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허수아비와 같습니다. 농사가 끝나면 쓸쓸히 밭을 딩굴러 다니다가 그냥 썩고 맙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안에 있는 사람은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죽어버린다고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은 최고로 거룩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부활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됩니다.
계란을 보면 무정란이 있고 유정란이 있습니다. 무정란은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정란은 품으면 병아리가 나옵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유정란과 같습니다. 성도 안에는 생명이 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이 있으므로 죽은 것 같아 보여도 생명이 있어 다시 부활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아세요? ‘부귀영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귀영화가 영원합니까? 일시적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힘으로 명령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수조원의 돈으로 사지도 못하고, 막강한 권력을 동원해도 안 되고, 착하게 살아도 안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고 보면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간단합니다. 그저 간단하게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살았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해 명령하셔서 죽은 자를 벌떡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믿는 사람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이제까지 살펴본 일은 모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바보 같고 미련스럽기까지 당하시기만 하셨습니까? 한번 제대로 큰소리치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를 영원히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시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죽어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더 좋은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꼭 믿어 영원한 생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믿고 있다면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믿음을 주시고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도록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15 담임목사 이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