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강해/주일설교

(눅 14:25-35) 제자가 된다는 것

이서영 목사 2016. 2. 28. 17:02

(눅 14:25-35) 제자가 된다는 것

  

14: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14: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는 두 가지 세상을 살고 두 가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두 가지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현재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앉힌 하늘에 속한 두 가지 세상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구원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는 구원과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구원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현재의 천국과 미래의 천국의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두 가지 세상과 두 가지 구원을 받고 사는 사람이므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을 초월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사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자격증은 자동으로 취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격증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고소득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수익을 올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은 자동으로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누리려면 힘써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힘쓰는 정도에 따라 무리가 될 수도 있고 제자도 될 수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는 똑같은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사는 목적과 방법이 다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는 목적과 방법이 바꾸어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꾸어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26절과 27절과 33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수많은 무리를 보시고 세 가지를 하지 아니하면 각각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리에서 제자로 바꾸어지려면 세 가지가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오늘 본문 35절에 나오는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그것이 그대로 믿어져야 무리에서 제자로 넘어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듣고 무리에서 제자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쓸 데 없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34절과 35절에서는 소금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기에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땅과 거름에도 쓸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맛을 내는 소금처럼 맛을 내는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듣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그렇다면 무리에서 제자로 바꾸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무리에서 제자로 넘어가려면 자기 사람을 미워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특별히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것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의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아멘.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로 이 말씀에 잘 순종한다고 해서 실컷 미워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워하다”는 말의 원형은 “미세오”(misevw)입니다. 단순히 미워하다(hate)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하다”(disregard)라는 뜻도 있습니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0장 37절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멘. 미워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더 사랑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소홀히 하고 가정을 소홀히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내 팽개치고 교회에 와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먼저 예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라는 문제는 어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삶의 현장에 살고 있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살면 제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위가 바로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순교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사람을 걱정하고 가족을 걱정하는데 누가 예수님을 위해 죽겠습니까? 복음과 교회를 위해 누가 희생하고 누가 헌신하고 누가 충성 봉사하겠습니까?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고 살아야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워할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제자가 되십시다.

 

이제 무리에서 제자로 바꾸어지는 두 번째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넘어가려면 사명을 가져야 하는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십자가가 있다고 합니다. 평생 속을 썩이는 사람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내내 고통을 주는 질병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오늘 본문이 의미하고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이 주는 의미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멘. “지다”의 원형은 “바스타조”(bastavzw)입니다. “떠맡다, 부담하다”(bear)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몫을 분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자신의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은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의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문맥을 통해 보여주는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따르지”의 원형은 “오피소”(o[pivsw)입니다. “뒤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제자로 바꾸어지는 곳입니다. 사는 목적이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사명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무리는 자기 일에 바쁜 사람이고 제자는 하나님의 일에 바쁜 사람입니다. 이들의 결과가 어떤지는 천국에 가보면 압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압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 잔치의 기쁨이 마음에 있습니까? 한 명, 한 명의 영혼을 추수하는 기쁨이 있습니까? 잃은 영혼을 찾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역시 모든 일을 제치고 전도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어디에 있든지 그 현장에서 잃은 영혼을 찾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찾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기쁘게 살려고 해도 큰 기쁨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잔치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샘솟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사는 재미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의 관심에 집중하면 할수록 채워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무해서 사람을 더 많이 만나야 하고 재산도 더 많이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19절을 보면 잔치에 초청했는데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가야하기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재산을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장가들었으니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재산과 사람을 얻게 되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크게 기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24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아멘. 하늘나라 잔치의 큰 기쁨이 없기에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1억 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꼬박꼬박 적금을 들었지만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아내는 일은 하지 못했기에 크게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잃은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짐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고 슬픔이 됩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영원히 샘솟는 기쁨을 준다고 했습니다. 소겨리와 장가가 주지 못하는 기쁨을 줍니다. 오늘 본문 이후를 보면 곧이어 잃은 양을 찾은 비유가 나옵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 두루 찾아다니다가 찾았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15장 6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아멘.

 

그 다음에 나오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9절입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아멘. 이처럼 잃은 것을 찾게 되면 즐거운 잔치가 열립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잃은 아들을 찾은 비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2절에서 24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멘.

 

우리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기쁨이 없는 이유를 아셨습니까? 잃은 영혼을 찾은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잃은 영혼을 찾으면 그 기쁨은 날아갈듯이 기쁘게 됩니다. 이 잔치의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사명으로 맡겨주신 우리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잃은 영혼을 찾는 제자가 되십시다.

 

이제 무리에서 제자로 바꾸어지는 세 번째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넘어가려면 자기의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재산을 매우 좋아합니다. 굉장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제자는 버릴 것과 가질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멘. “버리다”의 원형은 “아포탓소”(ajpotavssw)입니다. “포기하다”(give up)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헤어지다, 작별하다”(take leave)라는 뜻도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할 것과 작별해야 할 것을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재산과는 작별하고 예수님과는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을 버리라고 해서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구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전세든 월세든 자택이든 재산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재산은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재산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재산을 버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또한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재산을 가지되 누구를 위해 가져야하는가 입니다. 재산을 보다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그러한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아멘. 여자들이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지금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십니까? 주머니에 재산이 쌓이지 않는다고 속상하십니까? 그렇다면 평소 예수님을 위해 섬긴 것이 얼마나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 섬겨서 하늘에 쌓아둔 것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아멘.

 

왜 어렵고 힘든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재산을 하늘에 쌓아야 하는데 땅에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소유로 섬기는 제자가 되십시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무리에서 제자로 넘어가려면 세 가지 측면에서 바뀌어져야 합니다. 사람과 사명과 재산의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자기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예수님을 위해 우리가 가진 소유로 섬기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러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65 담임목사 이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