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재 목사] 최다득점, MVP 거머쥔 축구스타
한국이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할 당시 최다득점을 기록한 오석재 선수는 차범근과 김재한, 허정무 등과 함께 한국 축구의 희망이었다. 주전 공격수로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MVP까지 거머쥔 그의 축구인생은 화려한 시작을 알렸고, 사람들은 열광해 마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화려한 축구 스타가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 돌아왔다.
"축구화를 고등학교 때 신게 됐으니까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추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청소년 국가대표가 됐고, 4년 후 국가대표 선수가 됐죠. 게다가 방콕 아시안게임의 최다득점과 더불어 MVP까지 ······ 출세 가도가 보장됐던 시절이었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수술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허리디스크 선고를 받은 것, 수술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운동은 할 수 없다는 병원 특의 소견은 이제 막 축구선수로 이름을 알리며 새로운 인생 그림을 그리던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운동도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며 방황하던 오석재 선수에게 대학교 은사님은 허리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교수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다기 보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어요. 교수님과 함께 기도원으로 들어가 16일 동안 간절하게 기도 드렸는데 하나님의 고치심을 체험하게 된 것이죠."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출석만 하던 오 선수에게 수술만이 방법이라던 허리디스크가 깨끗하게 치료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몸소 체험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겠다는 서원을 했다.
다시 축구화 끈을 바짝 조여 매고, 뛰게 된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부귀와 명예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뛰는 선수로 변화했다. 이후 오석재 선수는 1983년 할렐루야 축구단에 입단해 축구를 통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골을 넣을 때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전했으며 시간을 쪼개 전국 교회를 돌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물론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도 계속 뛰었다.
1986년 할렐루야팀이 프로팀으로 남는 것을 포기하고, 아마팀으로 전환할 때 모든 프로구단이 오석재 선수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선교에 사로잡힌 그는 아마팀인 할렐루야에 그대로 남고, 이런 그를 보며 세상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팀에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혜택을 걷어차고, 왜 굳이 그런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구세주이심을 실감했어요. 그래서 삶의 목표가 달라졌고, 부귀나 명예에 더 이상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축구선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고액의 연봉과 수많은 팬들의 환호만이 전부가 될 수 없겠지만 이 또한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가족과 지인들은 그를 설득했지만 오석재 선수의 단호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석재 선수는 1989년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격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후 그는 고신총회 선교부의 평신도 선교사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파송됐고, 축구 선교를 시작하게 됐다. 3년 간의 인도네시아 생활을 마친 후 선교에 대한 목마름이 계속되어 1998년 '미지의 물결 선교팀'(Uncharted Waters)과 연결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캠프 사역은 아이들에게 인기를 모았어요. 1년에 3,000~3,500명 정도가 켐프에 참여했고, 이 중 10~15%는 교회에 출석하는 결신을 보였습니다."
선교팀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한 오 목사는 미국 복음대학교에서 M.div 과정을 졸업했고, 뉴질랜드 해밀턴 주사랑교회에서 목회를, 첫 선교지 인도네시아 재방문 등 조금도 쉬지 않고, 그가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부산의 한 교회에서 지내고 있다.
"저에게 선교비를 지원해주는 후원교회도, 단체도 없습니다. 고신총회 선교사로의 자격도 잃었고요.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어요." 축구스타로 살았던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후원자 모집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하지만 오 목사는 빠르지 않고, 조금 더디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선교사로 사역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사역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며 "앞으로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등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축구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오석재 목사는 화려한 축구스타 때의 모습보다 더 반짝였다.
요약 편집한 출처: 월간고신 생명나무 7월호 "향기로운 삶을 찾아서" 구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