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자료/신앙간증

[최용덕 간사]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서영 목사 2018. 12. 7. 01:36

마음이 가난한 미소가 아름다운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최용덕 간사

 

 

"안녕하세요, 최용덕 간사님이시죠? '나의 등뒤에서' '가서 제자 삼으라' 등 간사님이 지으신 곡들을 어렸을 때부터 불러왔습니다. 뵙고 인터뷰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그러세요? 제가 뭐 도움이 되겠습니까? 허허. 대전 어부동까지 오셔야 하는데 .... "

 

대전 동광장에서 63번 버스를 타고 대청호를 낀 산 고개를 한 시간 달려서야 어부동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 뒤로 뿌연 흙먼지가 걷히자 '연꽃체험학습마을'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마을에서 폐교를 허물고 공동학습장을 만들었는데 갈릴리마을 공동체를 운영했던 최용덕 간사에게 대신 맡아 달라고 한 것이다.  

 

"제가 주말엔 캠핑장 사무장을 맡고 있습니다. 허허. 사실 제가 그동안 했던 선교는 기독교인을 상대로 한 선교였습니다. 그런데 주말에 캠핑장에 오는 사람들은 다 불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를 점차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처음엔 사장님이라고 부르더니 어느 날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 있죠. 하하."

 

선교사역을 하는데 캠핑장 맡는 일이 방해도 될 듯한데 도리어 텐트에 전도지를 하나씩 넣어놓거나 캠프 공연 마지막 곡은 찬양을 부르는 등 열심이었다. 하하 하고 연신 웃으며 천사의 미소를 보이는 그는 한 눈에 진실 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저는 원래 건축학도였습니다. 설교를 듣던 중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건축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건축학과에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학과 공부를 했던 그였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2학기 쯤 CCC에서 이동명 간사의 설교를 듣고 그의 모든 생각이 뒤집혔다. 하나님의 성전이 건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 성전이요, 우리 각자의 몸이 성전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후 저는 기독교 가치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올바른 기독교 가치관을 전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 순간에 꿈이 바뀐 그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읽었고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A4용지에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적어도 자신의 단점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보다 잘 삐졌고, 눈물이 많았으며 조금은 소심한 성격이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그 때 성령의 탄식이 들렸다. "내가 너에게 준 것이 한 낱 이런 것뿐이니?"

 

이전에 적었던 나쁜 점에 엑스를 하고 다시 적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아까는 단점이던 것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하며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며 인내가 많은 등등. 이렇게 다 적어 놓고 보니 기독교 문화 선교사역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제가 하려고 했던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교회에서 늘 해오던 일이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 예수와 해와 달

 

그는 대학 졸업 후 3월부터 바로 찬양집회를 시작했다. 대구 CCC회관에서 정기 월요 찬양집회를 열었다. 대구지역 선교단을 모아서 연합으로 복음성가 대축제를 했고 그 때 모인 리더들이 주축이 되어 12월에 정식으로 찬미 찬양선교단을 만들게 됐다. 당시는 컴퓨터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사역에 필요한 곡들을 오선 악보에 그렸다.

 

"처음에는 아주 글씨가 꼬불꼬불해서 제가 봐도 웃겼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남들은 한 시간, 두 시간하면 지치는데, 저는 13시간을 작업을 해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글이 더 또렷하게 나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글씨를 옮겨 적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있는 끈질긴 인내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노력한 것이 나중에 자로 잰 듯한 오선지에 컴퓨터로 그린 듯한 음표, 반듯한 글씨의 '찬미 예수' 악보집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 '찬미 예수 200'을 내고 이후 '찬미 예수 400'이 나왔을 때는 한국 전체에 다 퍼졌고, '찬미 예수 1000'이 나왔을 때는 전 세계 한국인이 간 교회에는 다 전파되어 사역지에 쓰였다.

 

"좋은 가사가 있어서 제가 아무리 곡을 붙이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곡을 쓴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받아 적었습니다."

 

85년 대학생 시절 CCC로 전도하던 그 때가 그에게는 가장 성령 충만한 때였다.

 

저의 아버지는 선생님이셨습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갔더니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기독교인들! 겉으로는 거룩한 척 성경을 읽지만 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며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그럼에도 아버지가 자신을 보면서 기독교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를 원했다. 껍데기만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고 전하는 성령이기를 바랐다. 그날 밤 그는 포항 자신의 골방에서 울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을 지었고 노래는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이 애창하는 곡이 됐다.

 

"대구에서 찬양 사역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6년 동안 바깥에서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98년, 목이 회복되어 사역을 하다가 2002년 초등학교 딸아이의 병으로 다시 사역을 접게 됐다. 그가 목이 아팠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문서사역이었고 이 후 사역을 접었을 때도 문서사역 만은 꾸준이 할 수 있었다. 87년 시작된 해와 달 문서사역은 지금도 계속되어 오랜 세월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잔잔한 깨우침을 주고 있다. 

 

그가 여러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역을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 덕분이었다. 허허 하고 웃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하나도 땅에 묻지 않고 하나님께 전부 드리는 것.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목적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출처: 월간고신 생명나무 2013년 3월호 "찬양에 비친 삶", 김수경 기자

 

 

 

 

 

출처 : 참좋은제자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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