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일 목사] 나의 어머님 박정열 가덕기도원 원장님
나의 어머님 박정열 원장님께 받은 사랑 33년
김현일 목사 / 부산교도소 종교위원이자 세계로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는 필자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정사역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세상에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아가씨 6명을 고용하여 술집을 경영했습니다. 어느 날은 작은 어머니와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는데, 한 집에서 작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쌀밥을 해먹고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는 죽을 끓여 먹었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단 한 반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습니다. 저의 마음은 부모에 대한 증오와 배신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결국 불량배들(범죄조직)과 함께 어울리며 사회의 패륜아로 자랐고, 경춘선열차에 뛰어내리고, 농약을 먹고, 연탄을 피어 놓고 자는 등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생의 막장까지 가게 된 저는 3년 6개월이란 형을 받아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교도관의 전도를 받고 제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교도소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고, 그 후부터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공부하였습니다. 어려운 시간 끝에 합격하여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대통령 취임식 특사로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출소 후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려 했지만 여러 가지 환경에 의해 신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울산현대중공업 중기부에 입사하여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호흡장애가 일어났고 폐결핵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아 폐를 들어내는 수술을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폐결핵 약 '아이나 애탐부톨' 6개월 치를 들고 가덕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용서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시면 꼭 교도소 목사를 하겠습니다.' 죽을 각오로 가덕기도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덕기도원 원장님을 어머니로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듣게 되었고,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처음 보았을 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교도소 목사가 되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어머님께 받은 사랑은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하여 개소주를 만들어 주셨고, 늑막염에 좋은 선인장을 구해 약을 늘 만들어 주셨으며, 능구렁이 뱀 4마리를 본인이 직접 잡아 솥에 넣어 푹 끓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로 인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1986년에는 어머니께서 미국에 가시면서 제가 선교하는데 쓸 후원비를 얻어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선교비를 100만 원이나 얻어오셨고, 저는 그 돈을 쓰기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돈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는 더 큰 것을 주려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6개월 후 500만 원을 주시면서 목사가 월세방에 살면 덕이 안 된다고 하시며 전새방을 얻어 주셨습니다. 또한 조카분이 장례비로 준 3천만 원을 집 사는데 보태라고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사랑을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렇듯 저의 길을 닦아 주셨습니다. 든든한 후원자이신 어머니의 도움으로 저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제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빈손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청교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사시면서 늘 천국을 소망하며, 언제라도 주님 부르시면 천국에 가실 준비를 하고 사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일신의 영달에는 조금의 욕심도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깨끗하게 사실 수 있을까'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단돈 만 원도 쓰시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베푸는 것은 재벌처럼 넉넉하고 후하셨습니다. 아끼실 때는 철저히 아끼셨지만 필요하다고 느끼실 때는 배포가 한량없이 크셨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목사님들에게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그럴 때면 목사님들은 감사한 마음에 어머니를 교회로 초청해 대접해 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늙은 사람이 잔치나 행사에 다니는 것이 추해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그런 곳에 다니지 않겠노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셨습니다. 어머니는 이 땅의 보상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음성과 모습이 온화하시고 인자하셔서 많은 분들이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차이가 나더라도 어떠한 일이든지 허물없이 털어놓고 싶은 그런 인격자이시고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간혹 배들이 화물이나 사람을 싣고 와서 하선할 때는 불호령이 떨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에 대한 어머니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사고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어머님의 뜨거운 사랑, 관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떠나기 전, 곁에 살고 싶어 가덕기도원에 가기 위해 배를 타는 진해 용원에 정착하였습니다. 제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서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꼭 모시고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 누구한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면서 우리 몰래 부산 엄궁에 있는 사랑요양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곧 병원에 찾아가 저희가 모실 수 있도록 울면서 사정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2년을 사시다가 2010년 8월 21일 87세 나이로 소천하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2년 동안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 중 어머니를 만난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님의 사랑으로 저는 신학공부와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며, 교도소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기도와 배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와 우리 가정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께 받은 사랑을 갇힌 자를 위해 나누며 살겠습니다. 저는 부산노회에서 부산교도소로 파송한 전도목사입니다. 인천소년교도소 3년, 부산교도소 27년, 약 30년 동안 교도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는 인정을 받지만 교도소 전도목사는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사역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천직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니와의 약속입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가리지 않도록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어머니,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나의 어머니, 가덕기도원 원장님을 사랑합니다.
(월간고신 생명나무 2013년 11월호, "내 인생의 멘토", pp. 3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