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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잠 19:1-3)

이서영 목사 2018. 12. 7. 04:24

성령의 은사 (잠 19:1-3)


1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2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이 시간에도 “성령의 은사”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도움입니다. 도우시는 은혜가 은사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열심과 관계가 큽니다. 몸과 마음 드려 열심히 섬기면 우리가 알 수 있게 은사가 나타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는 잘 감당하면 능력이 되고 복이 되지만 잘못 감당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때 잘 감당하면 귀한 도움과 도구가 되지만 잘못 감당하면 받지 않음만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남해의 관매도 앞바다에서 제주로 가는 대형 여객선이 좌초되는 바람에 현재 4명이 사망하고 291명이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등 큰 사고가 났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배태랑 전문가들도 이렇게 실수하는데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그 피해가 크겠습니까?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몰라 시험 들어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습니까? 잘못된 영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대적하고 혼란시키는 암초가 생겨나고, 혹은 인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귀신이 들어 폐인이 되거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물리적 힘을 가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에게 대해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무엇을 유의해야 할까요?


1. 무엇보다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1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 “성실하게 행하는 자”란 ‘그의 완전함에 걷는 자’라는 의미로 의를 추구하고 정직히 행하는 지혜로운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입술이 패역”한 자는 거짓말과 허풍으로 교만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한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성령의 은사에 비유해보면 우리가 능력이 얼마나 크냐? 어 은사를 얼마나 받았느냐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하냐가 더 귀하다는 말입니다. 은사 받고서 교만하다면 은사 받지 못하고 겸손한 것이 100배도 더 낫습니다. 이것은 은사 받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은사를 갈망하되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실재 은사가 많이 나타나면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고 하나님과 더 직통하고 하나님께서 더 귀하고 크게 쓰는 줄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 체험을 추종합니다.

 

그러나 그건 대단한 오해입니다. 체험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피체험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시는 여러 표적들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제자들 앞에서 무수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목적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요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일차적인 체험의 목적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이 도마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곳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했습니다.


이 도마의 믿음을 고쳐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십니다. 등장부터서 기적이었습니다. 도마를 위해서였습니다. 기적적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축복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으로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완악할수록 체험이 희귀하고 크고 강력합니다. 어떤 악인은 지옥까지 경험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길 가다가 부활의 예수 만나 며칠 동안 소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죄인을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체험을 주신 것을 감사할 일이지 자랑하거나 교만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체험을 주셨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교만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2. 성경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2절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여기 “지식”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가치의 기준을 뜻하고, “소원”은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뜻합니다. 그리고  “발이 급하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인도 없이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신중함과 정당한 기준에 맞게 행동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은사에 비유한다면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든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말씀의 기준을 떠나서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씀을 떠나면 그것은 100% 귀신의 역사로 떨어지고 맙니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신비 따라 가다가 어둠과 절망의 늪에 빠져 몸부림치던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천성 가는 길과 나란히 있어서 안심도 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고 험악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떠나 체험에 의존하니 갈팔질팡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말씀이냐? 체험이냐? 두 갈레 길에 선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말씀에 서야합니다. 성경과 다를 때는 하나님이 뜻인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마치 발람이 돈 욕심이 나서 계속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고 미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5:37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서 사탄의 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말씀에 섰느냐가 중요합니다. 체험보다 말씀의 기준에 설 때 신령한 세계가 열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기적을 행한다 해도 말씀에서 떠난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3. 결과를 보고 자기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자기 길을 굽게 한다.”란 하나님이 뜻에서 벗어나서 고집대로 행함으로 파멸의 길로 치닫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파멸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태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이처럼 악신이 역사하거나 잘못된 열매를 맺는다면 내 믿음이 잘못된 것이지 성령 탓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고 양심이 추하고 교만해지면 악신이 임합니다. 항상 성령의 역사만 있는 것 아닙니다. 사울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악령으로 마칠 수도 있고,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 원리도 모르고 나에게 역사하는 것은 다 성령일 것이라 고집하고 정당한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성령 혹은 악령이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12:33에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열매로 늘 자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늘 실수하게 되고 남을 실족시키거나 상처내고 손해 입히고 성도의 바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추한 열매를 맺힐 때는 내가 영적으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한 체험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체험을 너무 고집하지 마세요.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한 체험이든 잘못된 체험이든 이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고쳐가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좋은 체험을 했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믿음에 서고, 잘못된 체험을 했을 때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신비체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주관에 빠지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 생각되면 언제든지 돌이켜 말씀으로 돌아올수 있는 신앙의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바른 복음에 서고 바른 마음, 즉 겸손과 사랑과 진리와 순종과 화평의 마음을 가지면 악령은 떠나고 순수한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열심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둔한 우리들을 은사로 입혀주셔서 성령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사가 목적이 아니요 우리의 도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더욱 말씀에 서고 자기 열매를 보고 늘 자기를 새롭게 하면서 더욱 온전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케 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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