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강해/기타설교

(요 12:46)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서영 목사 2020. 2. 16. 19:08

 

(요 12:46)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성경강해 20200216 참좋은제자들교회 이서영 목사]

 

참좋은제자들교회에서 2020년 2월 16일 주일에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성경강해한 것입니다.

원고: 은혜의 동산 http://blog.daum.net/logosbibleinstitute/4587

영상: 은혜의 동산 https://youtu.be/yrCnMz0Gs80

 

 

 

[강해설교 원고]

 

(요 12:46)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첫째, 예수님은 무엇으로 오셨습니까?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자 빛이 있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빛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빛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이러한 것을 요한복음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장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추어주시는 참 빛이십니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를 보면 세상을 밝히려는 시도를 많이 해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등불이나 전기불과 같은 과학의 빛으로. 햇빛과 같은 자연의 빛으로. 종교와 같은 도덕의 빛으로. 철학과 같은 사상과 지성의 빛으로. 경제와 문화의 빛 등으로 해결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을 만족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경제적인 어둠의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어둠은 더욱 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모르는 어둠과 지옥의 어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문명과 문화가 발달한 시대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 최신 휴대폰, 최신형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 각 분야에서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최첨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매우 어두운 시대입니다.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 보면 어두운데도 어두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권력과 어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세상을 만난 듯이 살판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화요 실패한 것입니다. 축복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정죄 받은 것입니다. 3장 19-20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이러한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면서 비성경적인 어둠에 속한 것을 추구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러한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빛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3장 21절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는 것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기에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된 것입니다.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9장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11장 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하시므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이러한 역사는 창조하실 때 어둠이 있는 땅을 밝아지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지속되는 동안 빛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시다가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한 빛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 이후에 일어나는 빛에 대한 역사를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1장 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어린 양이 등불이 되시기에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2장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햇빛보다 더 밝은 곳에서 영원무궁하도록 마치 왕처럼 살게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 우리 모두 영원무궁하도록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예수님은 왜 빛으로 오셨습니까?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를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을(창 1:2)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이 형태가 없고 황무지와 같이 텅텅 비고 황폐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는데 좋은 상황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뭐가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이렇게 엉망진창인 곳에서 역사해 주셔서 모든 것을 좋게 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당시가 그렇고. 인류의 역사가 진행해오면서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좋은 환경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비옥한 자기 고향이 아니라 낯설고 머나먼 가나안이었습니다. 자녀도 한 명도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믿음의 조상이 될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박해 치하에서 순교 당하는 등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지만 결국은 뒤집어서 오히려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개척한지 수백 년 만에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축복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릿고개를 겪어야 하는 세계 최빈국의 그룹에 속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나라였지만 미국 다음 가는 기독교 선교국가 되었고 살기 좋은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이처럼 도무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되게 해주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이전의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어둠이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이전의 상태는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냐?”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건을 다 갖춘 좋은 상태에서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기가 찰 노릇의 상황에서 역사하신 게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 당시에도 그렇고, 아브라함 때도 그렇고, 초기 기독교 때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세상 마지막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암흑 천지인 악조건 속에서 역사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위로를 받게 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 앞이 캄캄한 상황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유형의 어둠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축복이겠습니까? 재앙이겠습니까? 재앙입니다. 애굽에 내린 캄캄한 흑암의 재앙이 그러합니다. 출애굽기 10장 21-2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이러한 것을 보면 캄캄한 어둠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빛이 있는 곳은 축복의 땅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빛이 있게 해주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게 해주셔서 살기 좋도록 해주셨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빛 가운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빛의 역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 동안에도 어둠에 속하거나 거하지 않게 해주시고 영원히 어두운 지옥에서 어둠 가운데 살아가지 않도록 해주시려고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눈물과 아픔과 저주와 사망과 악한 영이 지배하는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려고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에는 미움이란 어둠도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9절과 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러한 미움이란 어둠의 문제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용서의 마음을 갖도록 해주셔서 해결해주시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대해주십니까? 마태복음 6장 14-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렇게 예수님은 온갖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므로 캄캄하게 어두워진 오늘날 우리의 소망이요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두워진 우리의 모든 영역에 빛으로 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셋째, 우리 상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를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무릇…자로”의 히브리어 원어의 원형은 “πᾶς(파스)”인데 실명사 없이 사용되면 “어떤 자든지 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부정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아무도 ~ 아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46절에 실명사 없이 부정어 “μή(메: 아니)”와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하반절의 뜻은 “나를 믿는 어떤 사람이든지 다 아무도 어둠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다 아무도 지옥과 같은 어둠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이든 빛이 들어가기 이전의 상황은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어둠의 상태가 됩니다. 빛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어두울 뿐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가서 환하게 비추면 그 부분은 어둠이 사라지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의 속성은 빛이 들어오기만 하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캄캄해도 전깃불을 켜면 밝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캄캄한 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빛이 비추면 이렇게 되는 데 우리 신자의 주위 상황은 어떠합니까? 어둠 천지가 아닙니까? 사방팔방이 꽉 막혀도 하늘을 보면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봐도 햇빛이나 별빛이 없으면 캄캄합니다. 심지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듯이 보이게 되면 더욱 캄캄해 보입니다.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자 빛이 있게 된 것과(창 1:3) 같은 빛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캄캄하게 어두워진 우리나라와 민족 가운데,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삶 가운데서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사는 게 좋습니까? 저는 싫습니다. 빛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어두운가를. 모든 면에서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까? 눈앞이 캄캄하지 않습니까? 인간관계의 어둠, 질병의 어둠, 경제적 고통의 어둠, 종북주사파와 공산주의의 어둠, 동성애와 같은 비성경적인 사상의 어둠, 정치와 국가체제의 어둠, 세속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타락한 문화의 어둠 등. 더 심각한 것은 영적인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어둠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영원한 지옥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께서 임하여주셔서 우리나라와 한반도 한민족 가운데,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과 삶과 자녀들과 후손 가운데, 그리고 사회의 모든 영역 가운데 빛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전깃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져버리듯이 빛이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므로 뒤덮고 있는 어둠들이 사라져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빛이신 주 예수님께서 속히 우리의 모든 영역 가운데 임하셔서 환하게 비추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셔서 어둠의 권력과 사상이 사라지게 해주시고, 어둠의 영을 쫓아내주시고, 지옥의 어둠과 우리의 앞길을 막고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온갖 어둠을 물리쳐주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어둠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어둠을 걷어내 주시옵소서!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게 해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여! 어둠에서 빛으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어둠에 뒤덮여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 교회와 가정과 삶과 북한을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반도 한민족과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한국기독교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구원해주시옵소서! 속히 우리나라와 민족과 한국기독교가 빛의 나라와 민족과 한국기독교가 되어서 세계를 비추는 나라와 민족과 한국기독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