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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예수님, 다시 오시긴 오십니까? (계 22:20)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예수님, 다시 오시긴 오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속히 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아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 있습니다. “그런 분이 있기나 해요?” 어떤 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 없이도 잘 살고 있는데요.” 어떤 분은 또 말합니다. “예수가 오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은 그런대로 살고 있기에 “아닙니다. 좀 더 계시다가 천천히 오세요.” 사는 게 너무 힘든 분은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 속히 오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긴 믿는데 그다지 확신이 없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다시 오시고 계십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긴 오십니까?” 우리의 이 물음에 주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온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언제나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예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십니다. 약속대로 초림하셨고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셨고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셨고 현재에도 오시고 앞으로도 찾아오시고 그러시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 최종적으로 재림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와 영원토록 항상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긴 오십니까?” 네,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초대 교회 당시에도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어떤 시기에 만났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 후 복음을 각 나라 족속에게 전파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거꾸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추적해서 잡아내는 사냥꾼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이 땅에 두 번 다시 내려오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히 찾아오셔서 개별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이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격적으로 만나주십니다. 현재적 강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오겠다.”는 문법의 시제를 보면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계속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 시대마다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임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오시고 세상의 모든 역사가 끝나는 최종적인 종말이 올 때도 다시 찾아오십니다.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보아도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로마시대인데 도미티안 황제(주후 81-96년)가 통치하던 때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95년경에 기록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를 살펴보는데 이 기록된 시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시기를 30년경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은 지구상에는 안 계시는 것이 이치상 맞습니다. 승천하셨기에 하늘나라에 계시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승천 후 65년이 지난 다음에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까?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계속 찾아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하였다면 그것은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요한계시록에 그러한 것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신다면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 산에 불구경하듯이 계시는 분이시라면 이름부터 잘못 지어진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며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와 동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최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여보내시기 위하여 다시 찾아오시는 최종적인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인 강림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삶을 나누길 원하지 않으셨다면 굳이 이렇게 초청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요 1:12)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생애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상에만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은 우리와 함께 안 계신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예수님을 믿으시고 영접하셔서 예수님과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오시고 계십니다. 유다서를 보면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에녹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최초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예언한 최초의 예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문법상 시제를 보면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원문의 ‘엘덴’(h\lqen)은 엘코마이(e[rcomai)의 과거형입니다.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녹 당시에 예수님이 계셨습니까? 안 계셨습니까? 그런데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과거는 예언적 과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마치 과거의 사건처럼 기록한 것입니다. 보다 분명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에녹 선지자의 예언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초림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계속 현재적으로 강림하시고 계십니다. 앞으로 세상 마지막 날에는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긴 정말 다시 오십니까?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진실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라는 말은 “확실히 그렇다”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이’(nai)가 그 단어입니다. 엄숙한 선언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확실히, 예, 그렇다’고 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오시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께.”와 “올께.” 어떤 느낌이 듭니까? 간다는 것과 온다는 것의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먼 산의 불을 보듯이 저 하늘 멀리서 보고 있다가 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영원히 거할 새 처소를 마련하시다가 준비가 끝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요 14:3)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함께 신비로운 영으로 시대마다 계속 임하시다가 마지막 날에 영화롭고도 온전하신 모습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가겠다.”는 의미보다는 “오겠다.”는 의미가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I am coming.”이라고 그 의미를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가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하늘에서 오시긴 하지만 여기 이 땅의 관점에서 오겠다는 뜻입니다.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가 다시 너희와 함께 하기 위해 오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올께.”라는 의미입니다. 마음가짐과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속히”라는 단어입니다. 원어로 ‘타퀴’(tacu)인데 “신속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가 머뭇거리지 않겠다. 너를 만나는 시간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 없다. 네가 너무나 좋기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만나고 싶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어서 빨리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심정으로 “내가 속히 오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빨리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네가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빨리 함께 지내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 말씀의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 가슴 깊이 전해져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굴 기다리고 영접해야 하겠습니까? “주 예수”이십니다. 다른 예수는 안 됩니다. 인간 예수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바꾸어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누구냐?” 그 내가 너에게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 험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그를 주님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오신다는 그 분이냐?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우리 메시아(그리스도) 기준에는 한참 미달이다. 출신 성분, 제자들 수준, 학식 수준, 어울리는 사람들 수준, 나라와 민족 해방에 대한 관심, 사회를 뒤바꿀 생각 등을 볼 때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가 아니다. 그런데 네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운운 하면서 신성모독을 하다니.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다가 그만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지 않으면 예수님도 저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도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보다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고백을 하면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지키는데 다소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성경이 말씀해주고 있는 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에 알맞고 지키기에 편안하게 여기는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면 복음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대의 이단들은 입맛에 알맞은 자신들만의 자칭 예수를 잘 영접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와도 좋다. 이단 삼단도 좋다. 인간성만 좋으면 된다. 잘 가르쳐주기만 하면 된다. 잘 풀이해주면 된다. 인간편에 서서 우리 귀에 알맞게 해석해주면 좋다. 그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분이야말로 우리 구세주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미혹하기 위해 잘해 준다고 올바른 사람입니까? 그를 잘 영접하고 잘 모셔야 합니까? 아닙니다. 인간성이 좋고 매력이 있다고 해서 인간편에서 풀이를 잘 해준다고 해서 구세주는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기준이 아니라 성경기준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내가”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보냄을 받은 자다”라고 하더라도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 다른 여러 좋은 것을 모두 신으로 삼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유일하신 우리의 진정한 “주 예수님께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고백을 계속적으로 삶 가운데 간구해야 합니다. “오시옵소서”(Come)는 명령형입니다. “오는 것이 좋사오니”가 아닙니다. “꼭 오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명령법(Imperative)은 명령만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명령형은 간구도 나타내는 의지(volition)의 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용례는 간구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현재 명령형은 계속 진행 중이거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임하시는 우리의 주 예수님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오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여기에 대한 반응이 어떠해야 합니까? 야고보서 4장 8절이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에 대해 말씀해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예수님의 임하심이 구원의 주된 유익입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축복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이제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여기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 예수님을 우리도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01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69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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