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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천국은 누구에게 가까이 다가옵니까?(1) (마 4:17)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천국은 누구에게 가까이 다가옵니까?(1) (마 4:17)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때론 참 재미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게 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있어도 힘들고 없어도 힘듭니다. 사람이 그렇고 물질이 그렇습니다. 없으면 없어서 답답하고 있으면 있어서 답답합니다. 이래저래 속이 상하고 힘듭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과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과녁을 정확하게 맞춰야 점수가 올라가는데 빗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녁을 빗맞춘 채로 살기에 행복점수가 올라가지 못해 마음에 간절히 원하고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과녁을 잘 맞추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 과녁을 제대로 잘 맞추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간혹 어쩌다 한 두 번 맞추기는 합니다. 그럴 때 행복점수가 올라가 잠시 동안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대부분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과녁은 무엇을 말합니까? 과녁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말합니다. 천국을 제대로 맞출 때 천국으로부터 행복이 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빗나가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고 사는 게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녁을 왜 잘 맞추지 못합니까? 회개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회개할 때 잘 쏠 수 있고 잘 맞출 수 있습니다. 선수들도 계속 수정하면서 훈련합니다. 그래서 정확히 맞추어나갑니다. 우리도 천국 과녁판을 잘 맞출 수 있도록 회개를 잘해서 수정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자세를 흐트러뜨립니다. 이리저리 우리 마음도 흔들리게도 만듭니다. 그래서 과녁을 제대로 못 보게 만들고 겨우 본다고 해도 겨냥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이 쏜다고 해도 빗나가기가 일쑤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점수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사는 재미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죄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고 과녁을 제대로 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신약성경 원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과녁을 잘 맞추고 목표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의 인간의 불행은 아담과 하와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왔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였을 때는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벗어나자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과녁에서 벗어나자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지상 최초, 지상 최고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좇겨났습니다(창 3:24).

 

그곳에서 벗어나자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모든 관계가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어려움을 당하고 건강의 어려움도 당하고 관계도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영생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중단되었습니다. 그 대신 죽음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후 가인은 에덴동산 동편인 놋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창 4:16). ‘놋’은 ‘노드’인데 ‘방랑’, ‘유리’, ‘추방’이란 뜻입니다. 인생이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방랑하게 된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하여 에덴동산과 멀어진 우리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사는 재미와도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앞서 나타나셔서 경고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과 제사문제로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한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생을 죽여버렸습니다. 가인이 그렇게 된 것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또는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설교자와 교사와 또 다른 분들을 통해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죄가 그대로 있으면 행복과 거리가 멀고 사는 재미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출입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구원도 천국도 행복도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때 모든 것이 풀립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필수적으로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어떤 상태로 있다고 합니까? 문에 엎드려 있다고 했습니다. ‘엎드리다’는 ‘라바츠’인데 ‘드러눕다’, ‘내뻗다’는 뜻입니다. NKJV 영어 성경이 이것을 다른 영어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sin lies at the door.” 죄가 문에 누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라는 말입니까? 죄가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아예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가 사람을 아주 만만하게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죄는 사람을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공략합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개들은 마치 잠자는 것처럼 누워있습니다. 그러나 바스락 소리가 나면 금방 깨어납니다. 낯선 사람이 오면 “컹컹컹” 무섭게 짖어댑니다. 심지어 물기도 합니다. 집을 지키는 개가 문 앞에 누워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손쉽게 공격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죄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덥석” 뭅니다. 진돗개처럼 물고 놓지 않습니다. 기어코 죄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렇게 쉽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예외일까요? 우리도 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롬 3:9).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문제를 필히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그 어떤 문제보다도 이 죄 문제부터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행복이 시작되고 사는 재미가 “쏠쏠”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죄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사람이라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죄를 사해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죄를 사해주십니다. ‘예수’라고 이름을 지은 뜻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타고 났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는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행복과 사는 재미 대신에 죽을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좋은 것을 가져다줍니까? 죄가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것만 잔뜩 줍니다. 사람은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죄라 사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23절이 말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죄가 사람을 사로잡은 다음에 무엇을 가져다 줍니까? 죽음을 줍니다. 야고보 1장 15절이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태어나면 왜 모두 죽습니까?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 12절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죽이고 빼앗고 멸망시키고 파괴시키고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 빈부귀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가 그대로 있는 이상 모두가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처럼 비참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죄라는 도둑이 오면 끝장이 납니다. 우리의 행복과 사는 재미를 도둑질해 갑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정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좋은 것을 가져다주십니다.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죄를 다스리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게 합니다. 더 나아가 더 풍성하게 해주십니다. 행복을 가져다주시고 사는 재미를 더해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오셨고 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5절이 말합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행복과 사는 재미를 위해 죄를 없애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죄에서 해방시켜주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이 얼마나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6절에서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십니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과녁을 제대로 맞추기 시작합니다. 목표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이 찾아오고 사는 재미도 생기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삼아주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과 31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4장 9절과 10절에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린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과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하여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나라로 옮긴 것을 말해줍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과 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과 5절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를 잘해서 수정을 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천국과녁을 더 잘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죄 문제가 해결을 받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천국은 누구에게 더 가까이 옵니까? 회개를 잘하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과녁을 빗나가게 만드는 죄가 사라지기에 천국과녁을 더 잘 맞춥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행복점수가 더 많이 올라가 참된 행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됩니다. 사는 재미의 점수도 역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회개를 더 잘해서 천국의 이 행복과 기쁜 삶들을 더 많이 누리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65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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