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강해/주일설교

돕는 배필의 원리(창 2:4-23)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돕는 배필의 원리 (창 2:4-23)

 

두 명의 처녀가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얘, 드디어 준현씨가 내게 청혼했어.” “그래? 나도 결혼해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 “누군데?” “응, 엄마 아빠, 교회식구들, 내 동생까지.” 그러다 결혼하자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 돈은 좀 있나?” “아빠, 남자는 똑같네요.” “왜?”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인데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서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을 창설하신 에덴동산에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상황에 비추어 보면 땅에 관한 일을 하도록 두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일이 아니라 지상의 일을 하라고 두신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에덴동산을 관리하라고 두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이 농사를 짓는 것을 보셨습니까? 곰이 감자 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강아지가 밭을 매는 것을 보셨습니까? 주는 것을 먹는 것은 보셨을 것입니다. 동물은 농사지을 줄 모릅니다. 잘하면 있는 것을 모을 줄은 알아도 농사는 못 짓습니다. 가축도 못 기릅니다. 자연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관리할 수 있습니까? 누가 농사를 지어야 합니까?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어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된 피조물을 관리할 수 있고 마땅히 관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동역의 원리가 나옵니다.

 

동역은 아름답습니다.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함께 가꾸는 즐거움, 함께 일하는 즐거움, 함께 삶을 나누는 보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원맨쇼를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과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에덴동산이 하나님과 사람이 동역할 때 에덴동산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이 그러한 동역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려주시고 사람은 땅을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에덴동산은 더 살기 좋아지고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낙원은 이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하였고, 2절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하였고, 4절에는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천지창조가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절에는 아직 들에는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창조가 끝난 것이 아닙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가 되었지만 더 풍성하게 하는 사역은 진행 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된 기반 위에 무언가를 새롭게 진행시키시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시개발을 할 때 먼저 도시가 들어설 기반부터 조성합니다. 땅을 고르고 도로를 만들고 상하수도, 전기시설 등을 갖춥니다. 그런 터 위에 건축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에덴동산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 상황인 1장 11절과 창조된 이후 진행되고 있는 본문의 2장 5절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조 당시 1장 11절의 “채소”(에세브)와 창조 이후 2장 5절의 “초목”(에세브)은 ‘푸른 풀’이라는 뜻으로 동일한 원어입니다. 그러나 1장 11절에 나오는 “풀”(데셰)은 ‘어리고 연한 풀, 새로 돋은 풀’을 말하고 본문 2장 5절에 나오는 “채소”(시아흐)는 ‘관목, 수풀’을 뜻합니다. 한글로 “채소”라는 단어가 같아 보이지만 원어로는 다른 단어로 뜻도 다릅니다.

 

요점은 1장 11절 상황은 풀이 돋아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1장 11절의 “내다”(다샤)라는 단어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싹트다, 푸른 싹이 나다’는 의미입니다. 봄에 새싹이 돋듯이 그런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린 풀들이 돋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2장 5절로 넘어오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수풀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알려줍니다. 수풀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비가 온 후에는 쑥쑥 자라납니다. 무성하게 본격적으로 자라납니다. 사람이 솎아주거나 하면 더 잘 자라납니다.

 

본문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풀이 더 우거질 수 있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고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직 땅에 비를 내리시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해주셔서 아름다운 에덴동산의 기반을 만들어놓으셨으나 함께 살아가고 함께 동역할 사람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다음에(7절)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8절)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15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동역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를 주셔서 자라게 하십니다. 은혜의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럴 때 자라납니다. 모든 일이 성장하고 잘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혼자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함께 참여하여 가꾸어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홀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계획과 창조는 하시지만 더 풍성케 하는 사역에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심고 가꾸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할 때 더 큰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더욱 힘써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역은 어떻게 됩니까?

 

본문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시고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15절 앞에 나오는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주의사항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15절 다음에 나오는 16절과 1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지키다”(샤마르)는 ‘준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준수하고 감시하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것을 잘 감시하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계획하시고(18절)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한 개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21-22절). 돕는 배필을 만드셨는데 이때 “돕는”은 ‘도움, 원조, 돕는 자, 원조자’(에제르)를 말하고, “배필”(네게드)은 ‘~의 앞에서, 상대편에, 마주하고’라는 뜻입니다. 종합해 보면 도와주는 거드는 짝(helper)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이 그 여자를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23절에 보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보기에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배필이었습니다.

 

이런 넌센스 퀴즈가 있습니다. 남자는 목욕탕에 가면 금방 나오는데 여자는 왜 오래 있는지 아십니까?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 물에 오래 있으면 풀어지고 여자는 뼈로 만들어 오래 간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하면서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특히 하와는 동역하는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와를 머리에서도 발에서도 취하지 않으시고 옆구리에서 취한 이유가 있다고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그의 머리에서 취하지 않으시므로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의 발에서 취하시지 않으므로 그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옆구리에서 취하시므로 그와 동등하게 하시고 그의 팔 아래서 취하시므로 그의 보호를 받고 그의 가슴 근처에서 취하시므로 그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돕는 배필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꼭 여자만 아닙니다. 각자 처한 입장에서 돕는 배필이 됩니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 어디서나 돕는 배필이 될 수 있습니다. 상사가 되기도 하지만 부하가 되고, 스승이 되기도 하지만 제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지만 아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 위치에서 동역하는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에 협력하라고 하셨을까요?

 

1장 27-28절을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잘 다스리라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 일에 돕는 배필이 잘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2장 15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 일은 아담에게 직접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함께 협력하라고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잘못했다고 언급한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 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잘못했다는 선악과를 둘러 싼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2장 15절에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신 다음에 주신 말씀이 2장 16-17절입니다. 이 일은 어떤 일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잘 감시하고 주의하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이 일에도 협력하라는 명령이 돕는 배필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와가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먹도록 권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도록 잘 감시하고 주의하면서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따먹고 그것을 남편도 따먹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돕는 배필로서의 행복이 일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마저도 날아갔습니다. 인격적으로 동등하고 남편의 보호를 받고 사랑 받는 배필로서의 지위가 손상되었습니다.

 

3장 16절을 보면 “너는 남편을 원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을 원한다는 무엇입니까? “원함”(테슈카)은 ‘갈망, 열망, 사모'를 뜻합니다. 남편을 사모하는 것이 어떻게 죄의 결과입니까? 좋은 현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이제는 갈망해야 합니다. 사랑도 원해야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힘들지 않겠습니까?

 

더 심각해져버린 것은 남편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3장 16절에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옆구리에서 동등하게 지음을 받았는데 마치 발에서 취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남편과의 사이가 애증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없으면 있어야 하고 있으면 힘든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남편인 아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아내가 권해도 지켜내야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일했는데 이제는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먹을 것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생명나무 열매까지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못 먹게 되었습니다(3:22-24절). 얼굴에 땀을 흘려 수고해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땅을 갈아도 차원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하고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일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아담은 일에 눌려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회복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타락하게 만든 사탄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탄 마귀의 유혹으로 하와도 아담도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동역, 사람과의 동역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회복시켜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아름답고 행복한 동역의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3장 21절에도 회복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어린양 예수의 피로 씻은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 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 죄를 지심으로 깨어진 아름답고 행복하며 사랑스러운 관계, 즐겁고 기쁘게 동역하는 관계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선악과를 먹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돕는 배필로서 다른 사람도 지켜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안에서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오늘날에 의미하는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서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러 가지 선악과 가운데 한 개만 살펴보면 교만이란 선악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절대로 지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머리 숙이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지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귀의 술책이요 마귀가 가져다주는 선악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로 가르칩니다.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경배하면 높여준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깨지고 오히려 땅바닥에 떨어져 비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따르고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1-12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과로서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줍니다.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도와주는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과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선악과를 먹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생명과를 먹고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잘 따르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지키게 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배필로서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선악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를 먹게 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경작하고 다스리고 보존하게 해주십니다. 마귀가 주는 왜곡된 생각의 선악과는 먹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돕는 배필로 동역하게 하시고, 부부간에도 이웃 간에도 삶의 각 현장 안에서도 돕는 배필로 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 말씀 안에 거함으로 돕는 배필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사랑받는 돕는 배필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기쁘게 일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웃과도 함께 만들어가는 매력 있는 동역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63 담임목사 이서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