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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사랑의 띠 (출 26:26-29)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사랑의 띠 (출 26:26-29)

 

오늘날 사회 현상의 어려운 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집이 없어서입니까? 돈이 없어서 입니까? 못 배워서 입니까? 예쁘지 않아서 입니까? 건강하지 않아서 입니까? 못 살아서 그렇고 못 먹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예전보다 훨씬 잘 살고 잘 입고 잘 먹고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곳곳마다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지요? 옛날보다 환경이나 시설이 훨씬 좋아졌는데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조차도 왜 그런가요?

 

모든 것이 더 좋아진 것은 사실인데 왜 더 많이 다투고 깨어지고 있습니까? 왜 낙심하고 속상해하는 일이 많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감싸고 좋게 봅니다. 관계가 깨지고 마음이 깨질 수 없습니다. 마음 아파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단단하게 묶어주기 때문에 아무리 깨뜨리려고 해도 깨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단단하게 결속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각자 서로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이 그런 곳입니다. 가정에서 너무 잘잘못을 따지면 가정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는 서로 품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도 그런 곳입니다. 교회에서 사소한 것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너무 따지면 삭막해집니다. 결국 시험에 들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 사이가 서먹서먹해집니다. 그만 교회를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을 때는 교회가 단단히 결속되고 든든히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사랑을 많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조각목은 어떤 나무를 말합니까? 조각 조각난 나무를 말할까요? 아니면 조각하기에 좋은 나무일까요? 조각목은 그런 나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막 광야에서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그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성막 널판을 지탱해주는 띠는 무슨 띠입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띠, 즉 노끈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성막의 ‘띠’(베리아흐)는 ‘막대기, 빗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막의 널판을 지탱할 기다란 가로막대기를 말합니다. 이 띠는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만드는 널빤지를 연결하는데 사용합니다. 널판을 고정시키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띠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널판이 그대로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널판을 쌓아놓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띠가 꼭 필요합니다. 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냥 두면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나 한 널판 한 널판을 띠로 붙여놓으면 쓸모가 있게 됩니다. 거룩한 성막이 만들어집니다.

 

널판은 한 널판 한 널판이 모두 다릅니다. 널판의 옹이, 닳은 부위, 나무결, 강도, 색깔, 널판 하나하나가 다릅니다. 다른 것이 많습니다. 똑 같지 않습니다. 그것을 연결해서 성소와 지성소를 만듭니다. 이렇게 된 것은 띠로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르고 모난 점도 있지만 하나로 결속되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띠로 연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띠는 사랑의 띠를 상징합니다. 서로 다른 널판이지만 띠로 연결할 때 아름다운 성막이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렇게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하나씩 흩어져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지런히 연결되니까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많이 다릅니다. 기질도, 생각도, 남녀 성별도, 외모도, 옷 입는 취향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교양도, 그 무엇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하나가 되니까 잘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많이 다르지만 사랑의 띠로 서로 잘 결속되어서 아름답게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 널판의 띠가 신약성경에서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눈에 거슬리면 금방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다가 크게 다른 것이 겹쳐지면 결정타를 받습니다. 홈런 한 방을 맞는 것과 같습니다. 관계가 매우 악화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아물게 하는 것이 사랑의 띠입니다. 상처를 감싸고 허물을 감싸서 좋아지게 만듭니다.

 

신약 성경에서의 ‘띠’(쉰데스모스, 골 3:14)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3장 14절이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KJV 영어성경을 보면 ‘완전함의 띠’(the bond of perfectnes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매어주는 띠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서로 다른 우리를 온전하게 연결시켜 주고 묶어줍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띠의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용납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을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용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용납하는 것이 단단히 결속시켜주기에 서로 용납하라고 한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은 말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허물을 가려주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이 뜨거우면 죄도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들추어내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때론 감추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7절에도 말했습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경건과 형제간의 우애도 사랑이 더해질 때 더 큰 경건과 형제우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단단하게 묶어주고 사랑이 하나 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띠의 힘은 큽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 12절이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따로 떨어지면 각자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연합할 때 서로 힘이 되어주고 서로 세워주게 됩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성막의 널판이 띠로 단단하게 연결될 때 성막이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의 띠로 서로 연결되면 단단하게 결속됩니다. 쉽게 상처받지 않고 쉽게 미워하지 않고 쉽게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에 상처받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집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도 그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과 교회는 사랑의 띠로 단단하게 결속된 가정과 교회입니다. 서로 많이 다르지만 서로 용납함으로 하나로 단단하게 결속된 가정과 교회입니다. 이런 결속력이 생겨야 건강한 가정과 교회가 세워지고 지탱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이 사랑의 띠가 있을 때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이 사랑의 띠가 있을 때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 사랑의 띠가 있을 때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사랑의 띠로 서로의 행복을 붙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띠로 아름답게 이루어집니다.

 

성막의 널판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을 이루는 널판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통해 성막이 아름답게 거룩하게 세워집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의 지체입니다(고전 6: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한 몸 한 지체입니다. 서로 돌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2:12-27).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띠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널판의 띠로 성막이 세워지듯이 신약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 안에서 세워집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입니다.

 

본문 26절과 27절을 보면 성막의 널판을 5개의 띠로 연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사진을 보면 4개의 띠만 보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1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막의 사진이 잘못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개는 바깥에 설치되어 있지 않고 널판 중앙에 구멍을 파서 그곳을 통과시켜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 가운데 띠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띠로 우리를 묶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랑의 띠로 우리를 연합시키고 계십니다. 이런 복음송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 됐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 됐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면서 연결시켜주시고 연합시켜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띠로 묶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참고. 롬 8:35)에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이 예수님의 사랑의 띠는 우리를 영원토록 단단하게 묶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띠는 끝까지 이어집니다. 본문 28절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널판 가운데에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만들라는 것입니다. 장막 벽체의 널판을 결합시키는 중간막대가 널판 중앙의 이 끝에서 저 끝을 통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널판의 중간띠는 널판 중앙을 관통하여 널판을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잡아줍니다. ‘끝’(카체)은 구약성경에서 97회 나오며 공간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변함없이 끝까지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과 저 하늘의 공간,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시간, 어떤 공간이든 시간이든 끝까지 잡아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띠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중도에 탈락시키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빼놓지 않습니다. 모두 끝까지 붙잡아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십니다.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십니다(요 18:9). 세상 마지막 날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불러주십니다(마 24:31).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잃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띠입니다. 그 사랑의 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천국에까지 이끌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중간과 좌우에 있는 2개씩의 띠는 예수님의 사랑의 띠와 함께 우리의 사랑의 띠로도 결속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여러모로 서로 다른 모습들을 용납하는 우리의 사랑의 띠가 요청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우리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 중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중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널판 가운데에 위치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척하지 않으십니다. 입으로만 사랑하지도 않으십니다. 마음 중심으로 실제로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주도권을 잡고 사랑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거짓 없는 사랑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 중심으로 끝까지 서로 사랑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64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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