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8:34) 자기부인(自己否認)과 참사랑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웃에 사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우당탕 쿵탕!” 싸움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고, 다른 한 집은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싸움소리가 나는 집의 남자가 웃음소리가 나는 집의 남자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아,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 집에는 모두 나쁜 사람들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만 방 한가운데 놓여있던 물그릇을 모르고 엎질렀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제가 그곳에 물그릇을 놓아두어서 그렇게 되었으니 제 탓이에요’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부주의해서 그랬으니 내 탓이요’하면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 나이 살이나 먹은 내가 보고도 치우지 못했으니 내 탓이다’라고 하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특히 언제나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입니까? 얼마나 서로 속상해하고 다투는지 모릅니다. 섭섭한 게 왜 그리 많은지요? 돌아서고 나면 또 섭섭하고 꼴 보기 싫어지는 일들이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참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이 부족하면 기름이 부족하면 기계가 “삐거덕 삐거덕” 거리면서 잘 안 돌아가듯이 서로 사이가 삐걱거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누구도 완벽하게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이상적인 참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참 사랑에 누가 더 근접하느냐의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행복에 겨워 살 수도 있고 섭섭함과 미움 속에 갇혀 살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 웃으면서 살기도 하고 다투면서 살기도 합니다. 서로 갈등이 많은 가운데 한숨 속에서 살기도 하고 서로 화목한 가운데 날마다 힘이 샘솟는 가운데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 가운데 살고 싶습니까? 당연히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잘 할 수가 있을까요?
자기 부인의 순교정신이 살아 있으면 사랑을 잘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확실히 되면 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뻣뻣한 나, 펄펄 살아 있는 나 자신이 참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어떤 자신입니까? “병든 나”입니다. 죄로 오염되고 변질되어 있는 “나”입니다. 그러한 나 자신이 치료받을 때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 찌든 내가 치료받을 때 회복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이 치료받고 사랑의 사람으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왜 따 먹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누가 더 우선이었습니까? 하나님 말씀보다 누구의 생각이 더 우선이었습니까? 자신이 더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유익이 앞섰습니다. “나에게 선악과가 얼마나 좋으냐?”그것이 판단기준이었습니다. 자기가 앞섰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결과로 인류의 불행이 초래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으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판단이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닙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이 더 앞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나의 유익이 앞서고 나의 편리함과 좋음이 우선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다투고 서로 섭섭한 게 많아지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자기 부인의 순교정신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순교할 때 사랑할 수 있고,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순교를 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순교하지 않으면 참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참 사랑은 어렵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미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죽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편리함과 좋음을 위할 때 사랑은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서로 다투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이 다툽니다. 왜 입니까?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순교는 서로 상승작용을 합니다. 참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순교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순교를 하면 됩니다. 자신이 죽으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뻣뻣하고 펄펄 살아 있는 이상 참 사랑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으면 참 사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앞서 처음에 싸움소리가 나는 집과 웃음소리가 나는 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했느냐? 아니냐?”입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주느냐 생각해 주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보다는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자세가 웃음소리를 자아내게 만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서도 그러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5절을 보면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례하게 함부로 대합니다.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 유익을 우선합니다. 성을 냅니다. 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우선합니다. 상대방에게 버럭버럭 성을 내지 않고 화를 참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악한 생각도 품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가 중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이타심이 자꾸만 생깁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꺾인 사람,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이 든 사람들의 동네에서 목회하셨습니다. 모두가 병이 옮길까봐 겁내고 근처에도 가기를 꺼렸습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입으로 빨아서 치료해주실 정도였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여 양자로 삼기도 하셨습니다. 손 목사님은 하나님도 지극히 사랑하므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가 오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무게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아마 추측해보면 꿈쩍도 않을 정도의 무게가 될 것입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도무지 옮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를 치워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참 사랑을 하면 좋은 데 이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이 잘 안 되는 참 사랑을 오늘 본문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해결책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인하고”(ajparnhsavsqw)라는 동사의 문법적인 특성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원형은 “아파르네오마이”(ajparnevomai)인데 이 본문에 사용된 형태는 “과거 명령형 중간태 디포넌트동사”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부인하고”는 중간태입니다.
중간태의 특징은 행동 자체보다 행동하는 주체를 강조하기 때문에 행동의 결과로 그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 분명히 자신에게 유익한 결과가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내 인생은 뭐가 되느냐? 내 인생은 없어지고 온통 희생하는 것뿐이지 않느냐?’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드렸습니다. 그 결과 희생만 하고 끝이 났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중간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기억에 얼마나 길이길이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습니까? 결국은 행동하는 그 주체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그 주체를 돋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 “부인하고”는 과거 명령형입니다.
과거 명령형은 일회성 사건을 말하기도 하고 단호한 동작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몇 번 지셨습니까? 한 번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힘들면 내려놓고 그러다가 또 졌다가 내려놓는 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참 사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참으로 무겁습니다. 십자가를 지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속이 상할 때도 많고 억울할 때도 많습니다. 답답하고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습니다. 그 십자가를 어떻게 손쉽게 태연하게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지 않습니까? 무거우면 내려놓고 힘들면 내려놓고 그러다가 생각나면 또다시 지고 그런 식으로 해서는 참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힘들면 내려놓아야지’라는 연약한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면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내려놓게 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십자가를 내동댕이쳐버립니다. 대충 메고 있으면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 총과 배낭을 메고 행군합니다. 천리 길을 행군하다보면 얼마나 무거워져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깨나 팔에 살짝 걸쳐서 행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아예 착 달라붙게 만들어야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느슨하게 메거나 늘어뜨려서 메거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내려놓을 생각을 가지고 지면 잘 질 수가 없습니다. 점점 더 무거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거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굳은 결심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흐느적거려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니 한 번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다시는 내려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굳게 결심하고 짊어지셨기에 계속해서 참 사랑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겠다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 나보다 하나님 우선, 다른 사람을 우선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인하고”는 디포넌트동사입니다.
디포넌트 동사는 헬라어에 있는 독특한 동사입니다. 겉으로 보면 능동적인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보면 수동적인 경우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이 능동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하지만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러한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반석을 통해 흘러나오는 생수가 해답입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을 통해 흘러나오는 생수이신 성령님이 해결책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과 16장 7절에서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시는 성령님이 오실 때 훨씬 더 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과 함께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사랑이 부어지고 마침내 우리는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5장 5절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이 쓴『교회는 목사만큼 행복하다』는 책을 보면 성령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나도 능력을 받는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성령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의 뜻에 따라 나를 사용하시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내게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써 주신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실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스왈드 샌더스가 쓴『영적지도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자의적인 항복과 믿음에 합당한 반응을 통해서 그의 인격이 성령에 의해 채워지고, 지배되고, 조절되는 것을 뜻한다. 이제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고 방해하지 않을 때 성령께서는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며, 그의 사역은 매력을 더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도 능력이 더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성령님이 충만해져서 우리가 성령님의 지배를 당하게 되면 그 결과로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갈 5:22)가 우리 삶 가운데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 맺습니다.
자기 부인의 순교를 하신 분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고 이웃을 향한 참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 자신이 뻣뻣하고 펄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힘입게 되면 굳은 결심을 하게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죽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어 드디어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용해주셔서 자기 부인의 순교자의 삶을 통해 참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2015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388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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