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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기독자료

원정하 목사의 Q and A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by 이서영 목사 2018. 12. 7.

원정하 목사의 Q and A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 이것이 궁금합니다           

                                                                      

                                 

2013.08.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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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su10a/14019534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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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하 목사의 Q and A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어느 학생 선교단체의 충성된 일꾼 :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 무엇이 더 성경적일까요?
워낙 민감한 문제지만 목사님께 꼭 여쭙고자 합니다. ...

대답 :

많은 분들이 사회주의가 더 성경의 이상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 자체가 원시 공산제의 낙원의 형태와 유사하고, 희년을 정점으로 하는 구약의 토지제도와 초대 교회 시절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던 공동체의 모습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에 근접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중에도 ‘사회주의가 더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실현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정도의 태도를 가지신 분이 많습니다. 적어도 이상은 사회주의가 더 고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심정적인 사회주의자 지지자인 것이죠.

자.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일까요? 만약 인류에 온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온다면, 그것은 에덴동산과 같아서 사유 재산도, 세금도, 정부도, 계급도, 군대도 없는.. 그러나 과학기술과 공동체 정신은 존재하는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낙원의 상태를 동구권 국가들에서는 전통적으로 ‘별’로 상징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깃발에 별이 들어갔죠.

그리고 ‘사회주의’란 그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의 한 형태입니다. 그 방법에 폭력 혁명이 있든, 혹은 제도적인 보안이나 선거를 통한 권력 쟁취에 있든 최종적으로 원하는 상태는 동일합니다. 찬란한 붉은 별이 상징하는 낙원의 상태가 될 때 까지, 쉼 없이 인류를 이끌어야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낭만적이고, 가슴이 따뜻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더 나은 사회는 가능하다.’라는 높은 이상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기 취업 등 현실론에 안주코자 하는 것보다 더 도덕적인 기준도 높을 수 밖에요.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청년들도, 또한 이상적인 신학생들도 여기에 끌리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형제님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낙원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네, 형제가 지금 자신 없게 대답한 그 말씀이 정답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맞습니다. 더 깊이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인 것이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잃은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바벨탑이 그랬죠. 공산주의, 파시즘, 뉴에이지, 히피 혁명.. 이 모든 것이 실패한 이유는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불 검이 쉬임 없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왜 초능력을 공부하는 게 교회에서 꺼림을 받을까요? 분명 에덴동산에서는 동물과 말도 했는데.. 왜 마술을 배우는 게 나쁜가요? 왜 점을 치고 영적인 존재들과 대화하는 게 나쁜가요? 왜 크리스천이 단학, 기공으로 소주천, 신선의 단계를 추구하는 게 나쁠까요? 요가나 초월명상으로 영적 평안을 얻는 건 왜 나쁜가요? 왜 돈을 많이 모아서 노후를 완벽히 평안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미성숙한 것인가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잃은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법에 폭력 혁명이 있든, 혹은 제도적인 보안이나 선거를 통한 권력 쟁취에 있든 그 과정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존재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반 종교, 최대한 잘 해 줘야 ‘종교의 존재를 용인’하는 선에서 DNA를 갖게 되는 것이죠. 사회주의는 변증법적 유몰론, 진화론에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자가 기독교인인 경우는 일반적으로 드뭅니다.(영세 받아 이름만 기독교인이거나, 혹은 무리한 신학적 시도를 해야 합니다.) 일단 인간은 선하고, 시스템 정비를 통해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람이 희망’이고 ‘민중이 그리스도’가 되며 심지어 ‘국민이 신이다.’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북유럽처럼 기독교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있는 듯 한 나라들조차도 사실은 강력한 사회주의의 세력을 기독교 세력이 견제하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보통은 사회당과 기독교 당이 따로 존재합니다. 기독교 사회주의당 같은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북유럽의 모델은 아주 적은 인구와 북해의 유전 등 매우 많은 자원, 그린란드 등 어마어마한 영토, 식민지 시절(직접 식민지를 못가진 나라조차도) 유럽에 쌓였던 악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유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즉, 기독교 사회주의는 현실세계에 구현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끼리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조금 실망스럽고 자칫하면 이기심을 합리화 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솔직한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자리가 들어올 여지가 존재하죠.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추구할 세상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세상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화지가 됩니다. 사실 기본적인 상태의 세상 모습이죠.(원래 ‘자본주의’라는 사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라는 좋은 용어를 선점한 자들이 반대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비아냥 섞인 용어입니다. 실제로는 ‘시장경제’가 올바른 표현이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는 지옥과 비슷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는 문자 그대로 지옥입니다. 이것은 양비론으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자본주의는 가능하나, 사회주의는 태생적으로 반 종교, 반 기독교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구원받은 영혼과 잃어버린 영혼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는 긍휼함입니다. 실천에 방법은 삶을 드려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기득권’, 과 ‘비 기득권’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득권에 대해서는 분노와 증오가 있습니다.

일단 ‘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묻는 세계관, 세상을 오직 ‘기득권과 비 기득권’으로 나누는 세계관이 들어가면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야는 들어갈 자리를 잃습니다. 그래서 비 기득권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요, 더 나아가 기득권을 증오하는 것이 정의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가장 큰 나라니 마땅히 증오의 대상이 되고, 삼성은 제일 큰 기업이니 해체해야 하며, 서울대는 제일 큰 대학이니 쪼개져야 하고, 대형교회들은 악이며 제일 큰 언론사들도, 각 학교의 총장들도, 기성세대도 일단 적대감을 갖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그렇게 말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문화적 기득권을 놓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해도 동성애는 사회적 약자니까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것이 되구요. 실천의 방법은 투쟁 뿐입니다. 또한 권력은 ‘민중’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국민’이라는 용어와 ‘민중’이라는 용어의 차이는 중요합니다. 국민은 모든 사람을 뜻하고, 민중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등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을 뜻합니다. 국민 권력과 민중권력은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민중에게 권력을 주라는 이야기는 국민 전체에서 자신들이 기득권이라고 설정한 자들을 권력에서 제외(사실 역사적으로 많은 경우에는 죽이고) 시키라는 뜻입니다. 즉 ‘민중권력’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최종 단계는 남한과 북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한국인은 역사상 많은 고통을 격었고, 그로 인해 ‘한’의 민족정신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남반부에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들어와 그 민족정신과 융합되니 ‘나도 한번 잘 살아보자!’ 라는 우월 열망이 가득하게 되어 웅비하는 에너지가 솟구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원조 받던 나라 중 유일하게 원조하는 나라, 세계 경제 15위에 선교사 파송 세계 2위의 나라가 된 것이죠. 물론 남들이 200년 300년 걸쳐 발전할 것을 한세대 만에 발전하려니 부작용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자전거가 앞으로 구르면서 균형을 잡듯, 역사의 전진 속에서 바로잡아 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잡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 민족정신(한)에 사회주의가 들어오니 주체사상이라는 괴물이 탄생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나도 한번 잘 살아보자’ 대신 ‘너도 한번 망해봐라!’ 라는 열등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일제와 투쟁했다 하고(별로 투쟁한 것도 없지만), 또 미제와 투쟁하며 ‘리명박 역적패당’과 투쟁하고.. 이렇게 계속 적을 만들어 나가야만 유지가 되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 극단에서 김정일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조선이 없는 세계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정말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가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면, 아마 북한은 내부에서 또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적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망하든 스스로 망하든, 그것은 지옥의 사회요, 지옥의 정치로 귀결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시 첫 단추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해서 잃어버린 낙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면 신명기적 토지제도도 주어지고 희년제도도 가능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성령께서 임하시면 제도로 강제하지 않아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어지게 되구요, 또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시면 바벨탑에서 흩어졌던 언어와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 진행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더욱 가까이 임하는 중에 급기야 우리 주님의 재림 후, 마지막에는 에덴 동산에서 잃었던 ‘생명나무 실과’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계2:7, 22:1~2)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들의 발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낙원, 즉 하나님 나라는 ‘was and is and is to come'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더욱 온전해지는 것은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시작되어지고, 각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속에서 한 성령께서 각양 은사대로 역사하시는 가운데 자라나며, 고난과 아픔의 시간들을 거쳐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기득권과 비 기득권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심을 알게 되면 선교의 심장이 고동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던지게 되지요.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자발적이고 과격한 나눔,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Downgrade하는 삶. 그렇게 한 사람이 낮아지고 죽으면, 그로 인해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게 되고, 주님의 나라는 임하실 것입니다.

낙원을 향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에 함께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

 
2. 어느 형제님께..

찬미 예수님!

보내주신 메일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저 역시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서 제안을 드립니다. 앞으로는 기본적인 상식선의 지식들을 굳이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성인끼리의 대화에 사회주의의 개념, 공산주의의 유래, 신자유주의의 폐혜 등의 기본적인 강의는 없어도 됩니다. 문제제기와 실례를 위해 필요한 만큼만 언급하셔도 충분하죠.

우리는 팩트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입니다. 팩트의 근거가 될 사실들은 서로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대가 모른다는 전제로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은 낭비입니다. 사실, 저에게 주신 질문들도 결국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형제님의 입장을 설명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형제님. 일방적인 가르침의 태도...보다는 토론의 태도가 아쉽습니다.

먼저, 정치적 우파는 탐욕을 미화한다고 하신 말씀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죠.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형제님은 제국주의의 악행을 모두 ‘정치적 우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온 현상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파 제국주의도 있고, 좌파 제국주의도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패권을 잡았으면 지금보다 좋은 세상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교 제국주의도 있었고, 이슬람 제국주의, 잉카나 마야도 약소민족에게 충분히 잔인했죠. 요는, 인간은 탐욕적인 존재입니다. 다만 우파는 기독교를 비롯한 신앙의 자유를 전제하고 시작하지만, 좌파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시작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링컨이 연방 유지에만 급급했지 노예 해방엔 신경도 안 썼다는 식의 이야기는 몇몇 사적인 편지글 한두줄을 인용한 좌파 학자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오류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링컨의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연설문과 편지, 일기, 기도문들은 다 무시한채, 연방의 중요성을 역설한 한두 마디를 재인용하는데 여념이 없죠. 하워드 진을 필두로 한 진보 역사가 그룹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상대화와 우상 파괴만이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없던 문화는 없습니다. 이제 와서 묻기는 쉽습니다. 왜 그당시에 기독교는 노예를 가졌냐고. 그러나 인간의 본성의 악함을 아는 우리는, 당시 거의 전 세계가 노예를 가졌거나, 혹은 능력이 없어 못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죠.(어쩌면 기독교 문명이 과학이 더 발달했기에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질 수 있어서 더 눈에 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순수한 열정을 갖고 일어날 수 있었던 문명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죄가 많다지만, 역사상 초강대국이 없었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로마, 페르시아, 몽골, 대영제국, 청조, 대일본제국..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그러합니다. 그것은 우파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된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힘이 있으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주의가 막을 수 없죠. 그리고 기독교 사회주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자본주의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기득권에 대한 분노를 정의감으로 착각하며 인간 본성에서 나온 모든 악 - 제국주의, 노예제도, 세계화, 전쟁, 남녀차별, 기득권의 부패, 시장 역기능 등 -를 기독교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정말 가벼운 태도입니다.(이 모든 것은 기독교 바깥 세계가 더 심합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사회주의는 철저한 무신론에 근거합니다. 북유럽의 예를 들어도, 사회당과 기독교 당이 따로죠. 기독교적인 사회주의가 있는듯한 나라들조차 사실은 강력한 사회주의의 세력을 기독교 세력이 견제하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기독교사회주의당 같은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북유럽의 모델은 매우 적은 인구와 매우 많은 자원, 식민지 시절(직접 식민지를 못가진 나라조차도) 유럽에 쌓였던 자본금을 바탕으로 유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즉, 말씀하신 기독교 사회주의는 현실세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개념입니다. 근본주의적인 사회주의는 폭력 혁명을 꿈꾸고, 북서 유럽식 사회주의는 과정에서의 폭력을 배재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자가 기독교인인 경우는 거의 드문 것이죠(영세받아 이름만 기독교인이거나, 혹은 무리한 신학적 시도를 해야 합니다.) 일단, 인간들끼리의 시스템 정비를 통해 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전제니까요

그러나, 인간이 낙원을 상실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이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마귀적인 것이죠. 바벨탑이 그랬고, 뉴에이지, 히피,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시도의 실패는 그것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사회주의와는 달리 체제로서 규제하려는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죠.

탐욕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종교 정서를 띌 수 밖에 없습니다. 손정도 목사 등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 공산주의를 시도해 본 사람들도 없지는 않으나 역사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은 DNA(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님께서는 사회주의 제도의 ‘엄청난 세금과 통제를 통해 탐심의 어둠을 극복이 가능하다‘ 라고 쓰셨는데, 저는 여기서 강한 인본주의를 느낍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좌파로 치우치신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게다가 일전에 형제님께서 말씀하셨던 ‘지역경제, 작은정부, 조화로운 관계의 대안’ 과는 모순이 되기까지 합니다.

형제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산 혁명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아시는지요? 인간의 탐심을 보호한 자유시장경제, 결국 가진 자가 더 돈을 모으게 되면서 부익부빈익빈으로 이어진 고통이란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왜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들도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주로 먹거리를 재배하고 수확을 지역 내에서 거래하던 농민들로 하여금 명석한 도시 기업들이 판매 중심의 곡물 등을 재배하도록 부추긴 후, 유통 판매를 독점하면서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의존적이 되게 만든 것이지요. 결국 도시 소비자들을 위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부채에 시달리고 점점 스트레스 받으며 가격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도시 안에서도 자본이 튼튼한 대기업이 큰 매장을 열면 주변 소상인들은 결국 손을 들게 됩니다. 자유로운 경쟁이 아니라 불공평한 경쟁이며 부익부빈익빈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지요. "

라고요.

공산 혁명이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신 형제님의 논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유시장의 역기능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하시지만, 이것은 좌파의 논리일 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되면 공산혁명이 일어난다고 했죠. 그래서 좌파는 공산주의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찾기에 반시장 반자본으로 심한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론대로라면 영국, 미국등이 가장 먼저 공산화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공산혁명이 일어난 모든! 모든! 나라는 농노 경제였습니다. 자유시장이 존재해본적도, 산업화가 제대로 되어본 적도 없는 나라였죠. 소련, 남미, 동유럽, 인도차이나가 모두 그렇죠. 그리고 간혹 소련군에 의해 무력으로 공산화 된 나라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 공산주의는 왜 일어났을까요? 기득권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세력이 있었고, 반역의 영이 사람들에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탐욕스러운 통치자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더더욱 탐욕스러운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인민은 더욱 고통받게 되었구요.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말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죠

FTA는 분명 명암이 있습니다. 형제님께서 균형을 추구하신다면 밝은 면 역시 조금이라도 언급을 하셔야 합니다. ^^ 굳이 여기서 강의를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치우침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형제님께서 계속 한쪽 입장만 이야기하시는 것은 정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화와 강대국의 이익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도, 그냥 그렇게 믿어져서 하시는 말씀인 듯 합니다. 저 역시 제 세대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장하준 교수의 책을 읽었고,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들을 보았으며 김어준 류의 자료들 또한 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20대 내내 14개국(거의 극빈국)을 다니며 세계화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플랜테이션과 비공정 무역의 속성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의 밝은 면은 아시는지요? 세계화의 가장 큰 단점은 상대적 박탈감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강점은 빵이 커진다는 거죠. 양극화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조차 세계화 이전보다는 풍요로와집니다. 인정할 수 없다구요? 30년전에 비해, 세계 어디에서도 절대 빈곤, 대량 아사는 획기적으로 줄었습니다. 기계화로 인해 농촌에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농촌이 붕괴된다지만, 일단 식량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늡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농촌 공동체의 소멸을 슬퍼하는 것은 너무 감상적이죠. 그리고 땅을 잃은 농민들이 일단은 저가 노동력이 되지만, 일단 고용창출을 통해 들어온 재정은 내부 시장을 돌리게 되고 그 재정이 교육에 투자되어 저가 노동은 점차 고가치 노동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캄보디아나 인도, 중국을 가보십시오. 동의하시게 될 것입니다. 세계화 내에서의 빈곤은 북한이나 남미, 아프리카 독재정권과 같은 세계화 밖에서의 빈곤과는 비교과 되지 않습니다.

세계화가 문제가 아니라, 완전한 세계화가 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농업 보조금 같은것들은 스스로의 세계화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민에 대한 제한도 마찬가지입니다. FTA등에서의 불균형은 그런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FTA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자유시장을 미국에 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 대의를 보면 지금처럼 인류 전체가 풍요롭고 굶주림을 벗어났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양극화의 가장 아랫계층에게조차 마찬가지입니다.(인도의 슬럼조차, 이제는 굶어죽는 사람은 획기적으로 줄었습니다.) 세계화 없는 경제성장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제 삼의 길, 더 성경적인 길이 있다면, 얼마든지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대안화폐를 배운적이 있습니다. 참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적 자본주의가 토지에 대한 투기나, 지나친 이자로 인한 불로소득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 자본주의도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정치판에서의 매뉴판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입니다.

저는, ‘완전히 성경적인’ 체제가 없음을 슬퍼하며, 조금이라도 ‘더 성경적인’체계에 저의 충성을 바칠 수 밖에 없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둘 다 흠이 많은 체제라도, 둘 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더라도 남왕국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남북 전쟁 당시 북군에 공업화를 향한 자본의 탐욕이 있었더라도, 남군에 입대할 수는 없습니다. 북군의 승리를 기원해야죠. 미국과 영국이 완전히 순수하지 않더라도, 히틀러와 천황을 상대로 승리하도록 응원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립니다.

1. 민족주의, 애국주의는 주님 안에서만 옳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복음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모든 나라가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제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빼앗겼듯, 우리도 북한을 빼앗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하면 분명 동포의 육신과 영혼을 살릴 곳으로서, 또한 축복과 선교의 전초기지로서, 저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애국심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민족의 복음화와 축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민족이 망했을 때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우리는 세상 권위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공무원이나 직속 부하가 아닌 이상 대통령 개인은 우리의 권위자가 아니죠. 주권자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헌법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입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기도하며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과 또 그 혜택을 누리는 후손들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헌법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질서에 입각한 남북통일을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패는 나라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반역은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대한민국에 반역의 영이 흐르고 있다고 믿습니다.

2. 형제님은 대중의 지지를 얻는 시위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시며, 북송 저지 시위조차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데모와 시위는 이리에게 보냄 받은 양의 길이 아니며, 힘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어리석은 시도일 뿐입니다. 성공하면 얻게 된 권력으로 정치를 하겠지요. 비록 선한 성치를 하겠다고 다짐하겠지만 권력지향적인 방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정치 역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실제로는 존재감이 희박한 기독교 사회주의의 예까지 들어가며 정치를 말씀하시던 분이 왜 이렇게 논조가 바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시위를 해서 한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값진 일입니다. 그리고 탈북자가 뭔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게 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죠. 또한 시위는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권리입니다. 투표도 마찬가지구요. 그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시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악용의 소지는 설교에도 있고 구제에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시위는 예언자의 외침처럼, 무관심하고 굳었던 양심을 깨웁니다. 마틴 루터 킹의 시위를 반대하십니까? 간디의 시위를 반대하십니까? 그들의 시위도 충분히 정부를 움직이기 위한 정치적 시위였습니다. 독일 통일을 이루었던 니콜라이 예배당의 촛불시위도 반대하십니까? 시위 자체를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는것 보다는 그 시위가 성경적인 시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터무니없이 높은 도덕적인 기준이 때로는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합리화가 되는 것을 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계셨던 것 보다 거리에서 외치신 날이 더 많습니다.

강정마을에서도 시위 해도 됩니다. 반 FTA 시위도 가능하죠. 하지만 시위가 문제가 아니라 불법 폭력 시위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가 사대문 안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반미 폭력 시위를 보았습니다. 죽창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미 대사관이나 청와대로 강제 진입하려는 사람들. 전경은 당연히 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북송 저지 시위를 보십시오. 경찰과의 무력 충돌은 한번도 없었습니다.(탈북자들보다 더 한이 쌓여있어서 무력 시위를 하시는건지요) 우리가 불법 폭력 시위를 하지 않는 한 시위는 정당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3. 일관성 없는 가치에 대해서..

형제님께서는 좌파우파가 둘다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편도 못 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좌파나 우파가 그렇게 된 데에는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형제님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우셔서 깨끗하게 정치에서 손을 때신다는 것입니까? 무관심과 기권자의 책임이 더 큽니다.

만일에 좌에 있다면, 소외된 자의 인권을 위해 잘 하셨습니다. 더 잘합시다. 그리고 북한 인권에도 소리칩시다 해야 합니다. 우에 있다면, 북한 인권에 대해서 더 가열차게 외칩시다. 그리고 한국 안의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더 정성을 쏟읍시다 해야 합니다.

좌는 북한에 대해, 우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신경 안쓰니 난 둘다 싫다. 판단하고 돌아설 문제가 아닙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지, 형제님이 하시지 않습니다. 형제님은 더 성경적인 좌우를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만일 정말 싫어하는 두 당 밖에 고를 게 없다면.. 그나마 차악을 뽑으십시오. 그나마 더 성경적인 곳에 표를 주십시오. 아니면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소수 정당중에 더 성경적인게 보이면 사표를 두려워 말고 투표하십시오. 만일, 정말 정치계가 한심하다면, 전능하고 공의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직접 정치에 투신하셔도 됩니다.(부디 그런분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할수 있는데 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국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그래도 비만을 걱정하고 핸드폰과 노트북이 있는)보다는, 절대 비참한 상황에 있는 북한 주민 인권이 주님 보시기에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목사로서는, 그래도 복음을 접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한국인보다는 인구 비례당 사역자가 제일 적은 나라 중 하나인 인도가 주님 보시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곳에 있습니다.

4. 형제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민족과 국가의 부강, 주변 열강들과의 경쟁력, 대한민국이 우뚝 서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이 복음과 얼마나 심각하게 충돌하는지 살펴보시기를 기대합니다. "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힘도 주님의 축복이라구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원하시는 나라에 부도 주시고 축복도 주시고, 또 거두시기도 하셨습니다. 부와 힘이 항상 복음과 충돌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염세적인 판단입니다.

도리어 부와 힘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소서. 그러나 부와 힘이 교만케 하고 당신을 전하는데 떠나게 된다면 도로 거두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경제력, 그리고 한류로 인한 인지도 상승의 영향도 큽니다. 여기에 어떤 복음 전파와의 충돌이 있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힘도 능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성장과 한류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실제로 영국이 가장 먼저 국가 GDP의 과반수에 해당하던 노예무역을 중지하고(요한 웨슬리, 윌버포스같은 신앙의 위인들이 70년을 투쟁했죠) 전 세계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영국을 축복하시고 들어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 등 제국주의 시절의 죄악과 악한 사상들의 침투를 막지 못하며 나라의 영성이 주님을 떠나기 시작할 때, 영광도 영국을 떠났습니다. 저는 감리교인입니다. 웨슬리가 직접 세운 신학교가 신입생이 없어 폐쇄되었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엉엉 울었습니다. 영국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미국을 강하게 하셔서 소련을 막아 주셨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곳곳에 보내는 위대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라들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떠나면 촛대는 옮겨집니다. 이미 영국은 그렇게 되었고, 미국도 쇠락의 기미가 눈에 띄게 보입니다. 저는 미국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미국에게 진 빚이 너무나 많습니다. 복음도 빚지고, 육이오때 생명도 빚졌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지금보다 정의롭고 복음이 충만하며 강한 나라가 되도록 축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결코 저주하는 쪽에 서서는 안됩니다.

물론 코리아라는 이름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건국 기도문에서 주님과 맺었던 언약(민생의 복지를 주시오면, 북한의 동포를 구원하고 세계에 평화-복음-를 전하겠다)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팍스 코리아나 - 제국주의가 아니라 복음과 축복의 전파자로서 - 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외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도도, 프랑스도, 탄자니아도, 미국도 주님께서 세우신 목적과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 진리 안에서 더욱 강성하고 위대한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모든 영역(정치를 포함해서)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형제님의 글에서 기득권, 정치계, 세계화 등에 대한 아픔이 많이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판단하고 정죄한후 실천없이 기권하는 것은 정말 큰 사치입니다.

사회주의, 진보 가치의 가장 좋은 점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신념과, 그것을 위한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득권 증오와 허탈, 냉소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성경적인 정직함과 겸손함이 필수입니다.

판단자가 아니라 치유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선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가치에 대한 포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실천 없는 판단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한 하나님 가치의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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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좋은제자들교회
글쓴이 : 이서영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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