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을 왜 드릴까요? (엡 1:3~14)
8월 15일 광복절은 우리 나라로서는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광복절은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오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배하여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 한반도는 일본이 약 35년 동안 강제로 점령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광복절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국권을 되찾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꼭꼭 불렀던 광복절 노래입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과 감격!! 조국을 되찾고 주권과 영토를 다시 찾고 그 흙을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이젠 살았다. 숨을 제대로 쉬게 되었다. 일본 순사의 눈치를 안보고 살게 되었다. 우리 글로 대화하고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자유다!” 너무나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바다의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는 마치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을 노래했을 것만 같습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이 기쁨을 노래한 백성들이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도 애굽에서 자그마치 약 400년 동안 눌려 지내고 종처럼 살았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은 쉽게 내놓지 않았습니다. 마치 일본이 한국을 내놓지 않다가 핵폭탄의 대재앙을 맞고서야 항복하고 내놓은 것처럼, 애굽도 10가지 재앙을 당할대로 당하고나서야 겨우 마지못해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이 바뀌어 애굽의 최정예 군대를 총동원해서 홍해까지 뒤쫓아 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서슬이 시퍼런 애굽 군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카드를 뽑으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갈라버린 것입니다. 홍해 바닷물을 벽으로 만들고 바다 밑바닥을 마른 땅으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병거와 군대와 군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가다가 모두 몰사했습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우리가 기뻐서 부르는 광복절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이러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2절입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아멘.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아론과 모세의 누이인 선지자 미리암이 모든 여인들과 함께 작은 북을 손에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9~21). 아멘.
그 날에 그들 모두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홍해 바닷물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해방시켜준 바닷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홍해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하늘 위로 높이 뿌리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마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노래를 했을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구원받고 해방되어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을 외치고 노래한 것이 찬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신자는 찬양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떠나서 존재하실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신자들 역시 찬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찬양 중에 계시는 분이시라고까지 한 것입니다. 시편 22편 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아멘. 이렇게 찬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찬양을 그 어떤 피조물이 가로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 8).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다른 곳에 가서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속상해 하십니다. 그것은 큰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찬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합니다.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 어떠한 분이십니까? 신명기 10장 21절입니다. “그는 네 찬송이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시편 107편 8, 15, 21, 31절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아멘.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기적의 관계입니다. 기적 속에서 구원받고 기적 속에서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답고 크신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령한 복을 주셨는데,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 안에서 택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1: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을 받도록 해주셨습니다(1:7~11).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해주시고 하늘나라 상속에 대한 보증이 되어주셨습니다(1:13). 이 모든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1:6,12,14).
우리는 이것을 억지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격하면서 너무나 기뻐서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심정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이 땅에 살면서 다시 찾은 에덴동산의 흙을 만져보면서 노래하고, 마지막 날엔 새 하늘 새 땅의 흙을 만져보면서 노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귀한 흙을 만져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앞으로 만져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신 기적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뻐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찬양으로 연결된 사이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자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기이하신 사랑과 구원과 은혜에 대해 기뻐서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노래했습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찬양드리는 일이 선한 일이라고 했으며 아름다운 일이고 마땅한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편 33절 1절에 보면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바로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아멘.
그러므로 이 찬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통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찬양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들으실 때 하나님의 손이 춤을 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꽉꽉” 막혔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순식간에 해결해 버리십니다.
역대하 20장 22절을 보면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아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새까맣게 쳐들어온 3개국의 연합군을 보고는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과 모든 백성은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12절). 그러자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17절).
그리하여 그들은 매우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고 찬송을 드렸습니다. 전쟁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한 후에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셔서 연합군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쳐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들이 남긴 전리품도 얼마나 많았는지 사흘 동안 실어다 나를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26절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이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아멘. 이처럼 찬양의 힘은 큽니다. 찬양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노래 되었고”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홍해 바다의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가 됩니다. 3개국의 연합군의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가 됩니다. 든든하게 지키고 잠긴 감옥의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가 됩니다. 찬양의 힘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우리 역시 찬양을 드리면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들이 오히려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재료가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괴롭히고 “꼼짝” 못하도록 “꽁꽁” 묶고 있는 두려움이 변해서 우리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고 히브리서 13장 15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아멘. 그러므로 찬양을 싫어하면 신자로서 살아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사나 죽으나 영원토록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드려야 하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작도 찬양을 드리면서 시작하고, 마침도 찬양을 드림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역시 묵도 찬양으로 시작해서 묵도 찬양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역시 찬양을 먼저 올린 후에 고백하고 간구를 드리고 마지막에 다시 찬양을 올리고 기도를 마칩니다. 이처럼 찬양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 또한 찬양을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광복절을 맞이해서 기쁜 마음으로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 역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되찾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고 더 풍성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크기가 크든 작든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이 되시고, 찬양은 우리의 삶이고, 찬양은 우리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5절을 읽으면서 마치겠습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아멘.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33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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