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죽음, 그 이후에는? (히 9:27-28)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환자의 임종을 맞이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괴로운 표정으로 힘을 다해 손을 허우적거렸습니다. “말하기가 어려우면 글로 써보세요.” 목사님은 종이와 볼펜을 주었습니다. 환자는 버둥거리면서 몇 자를 힘들게 적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목사님은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형제는 주님 곁으로 편안히 가셨습니다. 이제 고인의 마지막 유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발 치워, 호흡기 줄 밟았어.”
“한 번 태어난 자는, 한 번 죽어야 한다.” 이 말은 죠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명궁』(Jacula Prudentum)이란 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 얼마나 평범한 말입니까? 그러나 또한 얼마나 진지한 말입니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드러먼드(William Drummond)는 “나는 태어났을 때, 죽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가 쓴『시집』(Poems)에서 말하였습니다. 오웬 메러디드(Owen Meredith) 역시 “인간 생활에서 확실한 것은 이것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죽음의 의미를 애써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죽음이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죽음이 피해갈까요? 존 리드게이트(John Lydgate)는 “아무 약도 죽음에는 효과가 없다”라고『죽음의 무도회』(Daunce of Machabre)라는 책에서 밝혔습니다. 세익스피어도『심벌린』(Cymbeline)에서 “의술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을지 모르나 죽음은 의사에게도 엄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죽는 것은 확고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언제부터요?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이 명령을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말을 바꾸어 속입니다. 창세기 3장 4절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셨지만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죽지않았다면 지금도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영향으로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받고 지나가고자 합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 더 맞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이 더 옳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믿고 따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누가 극복하며 죽음을 어떤 강대국이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몰리에르(Moliere)는 “로마도 죽음을 막는 처방을 못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이길 사람이 없고 죽음을 이길 법이나 제도도 없습니다. 『돈 키호테』(Don Quixote)를 누가 썼지요? 세르반테스(Cervantes)입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모든 것에는 구제책이 있으나, 언젠가는 필연코 우리를 엎드리게 하는 죽음에만은 구제책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죽음에는 구제책이 없을까요? 사무엘하 14장 14절도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하듯이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대책이 없어도 하나님은 대책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안을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대책이 되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도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데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시고 이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9장 28에서도 죽음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께서 단 번에 자신의 몸을 드려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인데 죄로 인한 죽음을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니 죽음도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치욕스런 수난을 당하시고, 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로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를 해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단 번에 자신의 몸을 드려” 우리의 죄를 해결해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서 죽음을 이기게 하고 영생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땅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본문 9장 28절 하반절이 말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첫 번째는 죄 때문에 오셨지만, 세상 끝에 다시 오시는 두 번째는 죄보다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 그 이후의 문제, 세상 끝 이후에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죄와 상관 없이” 심판하러 오십니다.
본문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하면서 무엇이라고 하였지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나 세계적으로 뛰어난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모든 행로는 묘지에서 끝난다”라고『신을 찾는 흑인 소녀의 모험』이란 책에서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무덤에서 끝나버릴까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팔라다스(Palladas)라는 분은『그리스 시화집』에서 “죽는 사람을 슬퍼하지 말라. 죽음 저편엔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 뒤에 고통이 없다고요?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고요? 보먼트(Beaumont)와 플레처(Pletcher)가 공동으로 쓴『티에리온과 테오도레트의 비극』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무덤 속에는, 대화도, 친구의 즐거운 발소리도, 애인의 목소리도 없다! 아버지의 정성어린 충고도 없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망각과 흙과 끝없는 암흑 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좋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말 죽어버리면 끝나는 걸까요? 우리가 꼭 죽어봐야 알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교훈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나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이나 생각이나 추측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죽음,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9장 27절을 다시 한 번 합독하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다면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그 어떤 사람이라 해도 죽으면 끝장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심판과 지옥에 가는 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을 보면 추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마태복음 3장 12절과 같습니다. 한 편은 예리한 낫을 들고 낫을 땅에 휘둘러 땅에 익은 곡식을 거둡니다. 다른 한 편도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지고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진노의 틀에 넣어 찧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전혀 다른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 그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준비해서 죽음 이후를 잘 대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타락한 죄인들은 극렬하게 이것을 부인하거나 무덤덤하게 여깁니다. 여기에 오신 분은 한 분도 예수님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모두 다 잘 익은 알곡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미 알곡이 되신 분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그가 쓴『서한: 내 친애하는 E에게』(Letter: My Dear E)라는 책에서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올 때는, 연령도 업적도 고려하지 않는다. 죽음은 병자도 강자도, 부자도 빈자도 속세에서 쓸어 없애며, 우리가 죽음을 대비하며 살기를 배우도록 할 것이다.” 죽음은 정말 공평합니다. 클라우디아우스는 “죽음은 모든 것을 대등하게 한다”라고『약탈 당한 프로세르피나』라는 책에서 말하였습니다.
사무엘 푸트(Samuel Foote) 역시 “죽음과 주사위는 모든 차별을 없앤다”(『소수자』The Minor)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찾아온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에는 좋은 심판과 나쁜 심판이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말하고 있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은 좋은 심판을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우리는 모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믿어 이 좋은 심판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살던 그 당시 상황으로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서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 그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할 때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를 그치고 쉬는 복과 행한 일에 보상을 받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복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실제로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과 실제로 복되고 아름다운 교제를 영원히 나눕니다. 그러니 천국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하겠어요?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도 나타납니다. 윌리엄 핸드릭슨은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잘 비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진술하고,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계 21:1). 창세기는 빛을 내는 것이 있으라고 명령하여 있게 하였으나, 계시록은 그것이 쓸데 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기 때문입니다(계 21:23). 창세기는 에덴동산에서 낙원을 잃어버린 것을 기술하지만, 계시록은 회복된 낙원을 제시해줍니다(계 2:7, 22:2).
창세기에서는 마귀의 간교함과 꾀를 보여주지만, 계시록은 마귀가 결박되어 유황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하여 숨는 무서운 광경을 이야기해주나, 계시록은 매우 아름답고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받는 백성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계 21:3). 끝으로 창세기에는 생명나무가 있으나 그곳에 이르는 길을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반해, 계시록은 그 생명나무에 갈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여 그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계 22:14).
성경은 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핸드릭슨은 말합니다. “승리자는 마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비록 잠시 동안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마침내 완전히 승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 주님과 연합된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서 확실하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인 우리 성도는 복을 받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라고 할 때 복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행복한’(happy)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행복, 마귀는 결박당하고 하나님과는 친밀하게 교제하는 행복,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행복, 사랑과 기쁨은 있지만 아픔도 미움도 슬픔도 괴로움도 눈물도 한숨도 없는 행복, 죽음마저도 없는 행복을 영원하게 누립니다. 이 모든 행복이 몽땅 우리의 것으로 주어집니다. 이 놀라운 행복을 주님 안에서 얻어 주님 안에서 영원히 누리기를 바랍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2문답을 보면 “우리의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값 지불이 아니라, 오직 죄의 소멸이며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정한 영생과 안식의 복을 받는 입구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죄를 가진 채로 죽는 자는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죽음, 그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고 물릴 수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날은 기쁨의 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실 때는 죄 문제로 오셨지만 세상 끝에는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그 날에는 온전한 완벽한 구원을 해주십니다. 이 구원이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그 이후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셔서 이 구원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예수님을 더 잘 바라보십시다. 또한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구원을 기대하면서 남아 있는 여생동안 잘 참아내고 주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믿고 더욱 더 잘 지키십시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13 담임목사 이서영]
'성경적강해 >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주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요 11:17-26) (0) | 2015.07.17 |
---|---|
[종려주일·고난주간] 겸손하게 오신 왕 (마 21:1-9) (0) | 2015.07.17 |
앞서 준비해주시는 하나님 (눅 22:7-13) (0) | 2015.07.17 |
담장을 넘는 울창한 나무의 성도 (창 49:22) (0) | 2015.07.17 |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전 10:23-33) (0) | 2015.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