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넘는 울창한 나무의 성도 (창 49:22)
우리는 인생살이가 잘 안 풀릴 때 이런 저런 원망을 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 내 중심이 바로 서 있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인생을 살고 싶으면 새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남은 인생이 형통하려면 이제까지의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 마음과 새 습관으로 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해야 잘될 수 있는가를 나무에 비유해서 깨우쳐주십니다. 시편 92편 12절과 14절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의인은 나이가 들어도 나이에 상관없이 젊고 활기차고 많은 결실을 맺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기에 종려나무같이 크게 번성하고 백향목같이 쭉쭉 성장합니까? 어떻게 했기에 백발의 머리가 되어도 여전히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수액이 풍족하고 파릇파릇한 잎이 무성하여 울창합니까? 그 해답은 바로 앞에 나오는 13절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잘 자라나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교회에서 떨어지지 않고 교회에 붙어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8).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말을 전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5-6).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결말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반대의 결과를 거둡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7).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이냐 하면 앞서 봉독해드린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물 가에 심어져 뿌리가 강변에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더위가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잎이 싱싱합니다. 가물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이 결실을 그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울창한 나무가 됩니다. 담장을 넘어갑니다. 나를 넘어 이웃에게로 나라와 민족을 넘어 세계로까지 뻗어갑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담장 너머로 뻗은 울창한 나무였습니다. 야곱이 유언하면서 축복할 때 그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은 실제로 담을 넘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밤만 되면 몰래 담을 넘고 다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도 잘되고 감옥에 들어가도 잘되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장소와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막히는 것이 없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시원시원하게 뚫린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집의 주인은 요셉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똑똑하게 보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시는 것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창 39:3,23). 그래서 집안의 우두머리로 삼고 모든 것을 맡겼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자 자기 자신의 담을 넘어 칠년 가뭄의 대 흉년으로부터 자기 가족을 포함해서 많은 친척을 살려내고 더 나아가 애굽 나라 전체와 온 세계를 건져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담장을 넘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울창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울창한 나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먼저 하나님 아버지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 이미 들어왔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지식이나 재물이나 건강이나 재능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시편 1편 3절은 말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런 복을 받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복을 받습니까? 그것을 2절에 말해줍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의 집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요, 복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뜰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번성하시고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언니인 마르다와 여동생인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잔치를 준비하느라 매우 바빴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마리아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 말씀드렸습니다. “나 혼자 일하게 두지 말고 동생에게 명령하셔서 ‘마르다를 도와주라’고 하소서.”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예수님을 맞이하는 잔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일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일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잘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일을 할 때 잘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원리를 잘 깨닫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세상에 나가 살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르다는 일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잔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일보다 예수님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이 예수님보다 앞섰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이때도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마르다는 일 중심이었으나 마리아는 예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하는 일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부흥사의 설교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또한 이것을 교단의 이념 등으로 각 교파에서도 많이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말하고, 하나님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교회 중심의 신앙을 말하고, 그 교회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인데 이것은 말씀중심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 중심이 잘 잡힌 신앙은 가면 갈수록 번성하는 나무와 같이 울창하게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누누이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와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55장 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받아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고 나서 배가 몹시 고플 때 시험을 당하시면서도 말씀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성도가 살아갈 때 필요한 일용할 양식으로 밥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반드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먹어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늘 말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잠언 4장 10절은 어떻게 말할까요?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잠언 8장 32절은 어떻게 말할까요?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게 와서 들으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생명의 해가 길어지고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잘되기 때문에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자녀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길 잃은 양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는데 잘 따라가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고 풍성함이 있는 그곳으로 가지 않고 곁길로 가다가 가시밭길을 만나고 황무지를 만나고 이리를 만납니다. 하나님은 속이 탑니다. 떠나간 것을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예수님은 아버지를 거역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 그 뜻을 보여주십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 집을 떠나고 좋은 길로 이끌어주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버지집에 있어야 되고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뿌리치고 나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훤히 보이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탕자는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돼지 먹이를 먹을 정도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재물도 잃고 명예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집으로 돌아오니까 살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니까 풍성함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따지지 않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안아주면서 대 환영하였습니다.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 자격이 없다고 해도 반지를 끼워주면서 아들인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종으로 살려고 해도 주인의 옷을 입히고 주인의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저 밥 한 끼만 먹어도 된다고 해도 그 비싸고 맛있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잘못 판단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집을 떠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하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그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잠언 13장 13절은 말합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18절에서도 말합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잠언 16장 20절도 말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리다고 젊다고 싱싱하고 번창하는 것은 아닙니다. 탕자는 얼마나 젊고 패기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몸만 젊었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집을 떠나고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아무리 젊고 아무리 힘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지고 있던 건강, 재물, 시간, 재능을 곶감 빼먹듯이 솔솔 빼먹다가 결국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30절은 말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소년이든 장정이든 피곤해하고 넘어지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힘을 얻습니다. 31절이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소년이라 해도 청년이라 해도 피곤합니다. 막히고 쓰러집니다. 겉으로 소년이고 겉으로 청년이라고 해도 소년이 아니고 청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소년과 청년이 진정한 소년이고 청년입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언제나 왕성하고 푸르른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됩니다. 그런 늘 푸르고 왕성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4장 10절에서 20절을 보면 씨를 땅에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결과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밭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씨는 같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의 상태는 각각 다릅니다. 길 가 상태의 마음은 말씀을 듣자마자 사단이 와서 가져가버립니다. 말씀이 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돌밭 상태의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잠시 기뻐하나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환난이나 박해를 받으면 말씀을 저버리고 넘어집니다. 가시떨기 상태의 마음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향락과 욕심이 말씀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의 마음은 말씀을 잘 듣고 잘 깨닫고 잘 지켜서 무럭무럭 자라나 무성하게 결실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의 밭이 되어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습관으로 살아서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로 결실을 거둡니다. 담장을 넘을 정도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울창한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하나님 아버지집을 떠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나 살아왔다면 이제는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새 마음과 새 습관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돌아온 탕자처럼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푸르른 나무가 되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로 결실하는 나무가 됩니다. 자기 자신의 담장을 넘어 이웃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울창한 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돌아온 탕자처럼 돌이키시고, 마리아처럼 주님 곁에 머물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요셉처럼 풍성하게 결실하여 담장을 넘는 울창한 나무가 되셔서, 우리 자신을 살려내고 우리 가정을 살려내고 우리의 이웃과 나라와 세계까지도 살려내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1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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