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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온유함의 복 (마 5:5)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온유함의 복 (마 5:5)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오늘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곳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이 일어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이 있으라(3011)”를 찬양 드리겠습니다. “1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2절 예수님을 구주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3절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오시면 참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크게 보면 세 가지의 두드러진 좋은 일이 나타납니다. 회당에서 가르쳐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해주시고,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시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이 좋은 소문이 각처에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듭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4장 23에서 25절에 이 역사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맹활약하시던 그 당시에만 그친 사건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은 언제나 변함없으신 예수님께서 오늘날도 여전히 행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 가운데 가르치는 일과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병약한 것을 고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좋은 일을 보고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그 당시에 이러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산에 올라가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입니다.

 

산상수훈이란 말은 산에서 받은(受, 받을 수) 말씀이란 뜻이 아닙니다. 산 위에서 베풀어주신(垂, 드리울 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수(垂)’자를 좀 더 이해하려면 이 글자가 사용된 글자를 알아보면 됩니다. 수직(垂直), 현수막(懸垂幕), 수양버들(垂楊버들), 뇌하수체(腦下垂體), 솔선수범(率先垂範, 먼저 앞장서서 몸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이다)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이 ‘수(垂)’자를 사용한 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내려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중국어 사전을 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수(垂, chuí)’를 동사로 사용하면 ‘(아래로) 드리우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에서 아래에) 베풀어 주다’라는 뜻도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이처럼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산상수훈은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산상설교(山上說敎, Sermon on the Mount)’라고도 부릅니다. 설교는 사람이 많이 배워서 사람의 머리와 입에서 나오는 강의와 다릅니다. 설교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설교를 사람의 말로 받으면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그마한 말 한마디에 걸핏하면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나쁜 것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은 일이 옵니다. 나쁠 수밖에 없는 것도 좋아져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사람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내밀지 않고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아만 장군은 푸대접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참고 그의 말대로 일곱 번 몸을 잠그니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열왕기하 5장 14절은 이 사건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이러한 좋은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나는 진리다”(요 1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친히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5장과 더불어 6장과 7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팔복(八福)을 서두로 하여 율법, 화목, 간음, 헛 맹세, 악한 자 대적, 원수 사랑, 구제, 기도, 금식, 재물, 비판, 대접, 좁은 문, 행함 등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신 줄 믿으시고 아멘으로 잘 받아들이시고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무엇이지요. “온유함의 복”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온유함의 복.” 온유는 산상수훈의 팔복 가운데 세 번째 복입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다섯 번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 여섯 번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 일곱 번째 복은 화평하게 하는 자,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받습니다.

 

이 복은 천국을 보상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천국을 보상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3절에 첫 번째 복이 나오는데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이 나오는데 역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복도 뒤따르지만 그보다는 영적인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IVP 성경주석』에서 마태복음을 주석한 프란스(R. T. France)는 그런 뜻을 주석해주고 있습니다. “온유(마카리오스)는 축하와 권고의 용어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러한 삶을 따름으로써 아무도 패배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지적한다. 그 보상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경험과 관계의 차원에 있다. 이 부분을 시작하고 끝맺는 핵심 구절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다.” 그러므로 온유하셔서 영적인 복을 많이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온유할 때 어떤 천국의 복을 받을까요? 온유하면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본문은 땅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5절을 합독하시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29절에도 이어서 말합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의인이 세상에 살다보면 땅을 차지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땅은 반드시 차지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세상에서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으나 영원한 땅인 천국에서는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잠시 동안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땅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어 의인이 되어 영원한 땅을 차지하시고 그곳에서 영원히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야 만이 복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만 복이라고 한다면 우리 성도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살았고 핍박도 참아왔는데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허탈할 것입니다. 그런데 팔복은 역설적인 복을 말해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고, 우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자가 불쌍히 여김을 받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천국을 차지하는 복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복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족해도 영적으로는 부요하고 영원한 땅에서는 부요한 사람은 이런 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복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많이 받고 삽니다. 영원한 복을 영원히 누리고 삽니다.

 

본문에 ‘~이요’라고 번역된 말씀은 성경의 원문으로는 ‘호티(~하는 것 때문에, because)’라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땅을 기업으로, 즉 땅을 상속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은 본문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상속받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땅은 새 하늘과 함께 하는 새 땅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새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신약시대에 와서 본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그 영원한 땅을 우리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우리도 이 영원한 새 땅을 바라보고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느 마을의 추장이 죽음을 앞두고 마을 청년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딸과 결혼시켜주고 추장직도 물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마을 밖으로 나가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가져왔습니다. 어떤 청년은 어느 동굴에 가니까 귀한 보석이 있어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청년은 가파른 절벽에 사는 진귀한 약초를 구해왔습니다. 마을의 청년들이 각자 귀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추장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청년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추장에게 말했습니다. “저 높은 산 너머에 가면 기름진 땅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땅을 차지하여 드리겠습니다.” 청년은 현재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앞으로 소유하게 될 비전의 땅을 보고 그것을 추장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추장이 말했습니다. “바로 이 청년이 내가 찾던 사람이네.”

 

우리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안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진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영원한 땅, 천국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새 땅을 바라보시고 이 땅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땅은 누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나운 짐승은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 맹수는 사라지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사나우면 땅을 차지 못합니다. 사나운 폭군이나 독재자들이 땅을 차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나운 개 옆에 사람들이 접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나운 사람에게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차지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 온유한 의인이 이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땅까지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온유의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사랑의 사람이 온유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은요? “사랑은 온유하며”(고전 13:4)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은 온유의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온유의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자신에게 거역하는 사람을 온유하게 훈계하는 사람이 온유의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입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디도서 3장 2절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갈라디아서 6장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러한 온유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받습니다. 영원한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납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 도움의 손길도 끊어집니다. 아삽이 지은 시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인 시편 76편 5절에서 9절에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으셔서 영원한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으시고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06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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