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자 (요 1:16-17)
개구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마법에 걸린 공주입니다. 저에게 키스해주시면 아름다운 공주로 돌아가서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그 개구리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 후 주머니 속에 있던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저는 마법에 걸린 공주라니까요. 저에게 키스해주시면 저는 다시 공주가 될 거예요.”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낚시만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는 또 말했습니다. “마법에서 풀려나면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드린다니까요.” 그때서야 노인이 싱긋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개구리 공주. 이 나이의 영감에게는 아름다운 공주보다 말하는 개구리가 훨씬 더 낫소.”
개구리와 관련된 고사성어도 있습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입니다. 우물 ‘정’, 낮을 ‘저’, 갈 ‘지’, 개구리 ‘와’인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후한 때 마원이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마원은 조상의 무덤을 지키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서의 제후인 외효가 마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당시 촉나라에는 공손술이 왕이 되어 제(帝)라고 일컫고 있었습니다. 외효는 그 인물이 어떤지 궁금했으므로 마원을 보내 만나보도록 했습니다.
마원은 공손술과 고향 친구였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촉나라로 갔습니다. 이때 공손술은 무장한 병사들을 계단 아래에 세워놓고 거만한 태도로 마원을 맞이하고 옛날의 친분을 생각해 장군으로 임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원은 공손술의 오만불손한 태도로 보아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서둘러 돌아와 외효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정저지와입니다. 조그마한 촉나라에서 뽐내는 것밖에 모릅니다. 상대하지 마십시오.” 외효는 마원의 말을 듣고 공손술을 멀리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저지와’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인데 소견이 좁은 사람, 보는 것이 좁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 대해 아는 것도 좁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도 좁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러다보면 다른 좋은 것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발전이 없고 크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조금 밖에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제껏 지켜온 신앙생활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고수하므로 더 풍성하고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보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서 더 넓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들어가셔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더 많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은혜 위에 은혜, 축복 위에 축복입니다. 본문 1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아멘. 주님의 은혜는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라는 말씀이 보기보다 해석이 꽤 어려운 말씀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원어로는 ‘안티’입니다. ‘안티’는 ‘~대신에, ~때문에, ~대조하여, ~반대하여’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번역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적합한 용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NASB 영어성경과 NRSV 영어성경 등은 ‘upon’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upon’은 ‘up(위에)’과 ‘on(위에)’의 합성어입니다. ‘on(위에)’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만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동작을 특별하게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jump upon the table(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다)”라고 할 때 사용합니다. 뛰어오르는 ‘jump’를 강조하기 위해 ‘up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시간도 아닌데 머리 아프게 왜 길게 설명하십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Max Zerwick이 쓴『헬라어 신약성경 문법사전』을 보면 “grace upon grace”라고 해석하면서 “one grace after another”라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은혜 뒤에 또 하나의 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NIV 영어성경을 보면 그렇게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all received one blessing after another.” 축복 뒤에 또 다른 축복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위에(안티)’는 단어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뜻은 끝없이 이어지는 풍성한 은혜를 말해줍니다. 이 은혜가 풍성한 이유는 대가를 받지 않고 주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주는 은혜이기에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선물로 베풀어주셔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것을 선물로 계속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우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선한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곧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7-10). 그러므로 예수님을 꼭 믿으시고 그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과 더 풍성함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은 이처럼 은혜가 겹쳐서 쌓이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가 차곡차곡 쌓여서 차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은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쌓이도록 계속 부어주셔서 영혼이 필요로 하는 은혜와 축복도 주시고 육신이 필요로 하는 은혜와 축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 말하는 ‘은혜 위에 은혜’는 마치 하나의 축복의 도착과 그 다음 축복의 받아들임 사이에 약간의 틈도 없는 것처럼 영속적이고도 신속한 축복의 연속을 나타낸다.” ‘은혜 위에 은혜’를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은혜에 더하여 은혜를 받았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있는데 또 더 받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은 이처럼 끝없이 계속하여 풍성하게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있고 축복 위에 축복이 있습니다. 무한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물 안에 갇혀 살고 있기에 잘 모르고 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물 밖으로 나와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물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망망한 은혜와 축복의 바다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장자(壯者)의『추수편(秋水篇)』에도 ‘우물안 개구리’가 나옵니다. 井底蛙不可以語於海(정저와불가이어어해).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우물 안에 살고 있는 개구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만 알기 때문에 그 넓은 바다를 말해주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냐?”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업신여기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바다보다 더 넓고 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그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체험하자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우물 안 개구리를 비유로 든 것입니다.
새 찬송가 302장(통합 찬송가 408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다함께 부르겠습니다.
1절.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4절.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주님의 은혜와 축복은 바다보다 더 깊고 바다보다 더 넓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대입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우물 안에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물 안의 은혜와 축복에서 벗어나 바다와 같이 넓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풍성한 은혜와 축복은 어디서 옵니까? 본문 16절을 다시 합독하시겠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렇습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받습니다.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데 이것을 어디서 받느냐하면 모두 다 예수님의 충만한 데서 받습니다. 16절에 이어 나오는 17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아멘.
하늘의 온갖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데 누구를 통해 오느냐하면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은 예수님을 통해 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주어도주어도 끝이 없이 줄 수 있을 만큼 하늘보화가 충만하기에 우리에게 끝없이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시고 축복 위에 축복을 부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이 그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해줍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모든 보화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이 잘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면 당연히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17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을 때 ‘온’ 것이라는 성경의 원어는 ‘기노마이’입니다. ‘온다’는 것의 원어의 뜻은 ‘생겨나다. 만들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온다’라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만들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체험하면 없던 것이 생겨나고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은 창조에 참여하시기도 합니다. 1장 3절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것을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그래서 시들고 흑암 가운데 있고 혼란스럽고 괴롭고 절망적인 그 어떤 상황이라도 해도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 그 예수님을 통해 변화를 받아 희망이 생기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찮은 예수님이 아니라 존귀하신 예수님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욥기 22장 24절은 우리가 가진 보화가 더 이상 보화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진정 보화인 것을 알라고 합니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렇게 하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화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은과 금이 되어주십니다. 24절에 이어서 나오는 25절이 말합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우리는 우물 안에 살면서 우리가 가진 것을 보화로 여기고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밖으로 나가면 진실로 더 귀한 보화가 무진장하게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화로 여기는 것을 던져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머니속의 보화보다 훨씬 더 큰 보화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보면 천국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진정한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보화보다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것보다 하늘의 것이 얼마나 더 소중하고 더 값진 것인지를 알고 그곳에 인생 전부를 겁니다.
그 사람은 우물 안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무엇이 진정 보화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동안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알고 그곳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발견하지 못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6절을 보면 모세는 왕궁의 그 호화로움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더 귀한 보물인 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큰 재물보다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보화를 발견하였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랑스럽던 보화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종 진귀한 보물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귀한 보물이신 예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더 풍성함이 들어 있습니다. 죄와 저주와 악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열쇠도 들어있습니다.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 천국에 있는 보물창고에서 더 풍성함을 꺼내올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물 안의 작은 은혜와 축복에 만족하고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벗어나 무궁무진한 더 큰 주님의 세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그 크고 놀라운 은혜 위에 은혜, 축복 위에 축복을 풍성하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05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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