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의 사람들 (고후 1:18-20)
아주 유명한 관광지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어떤 여행객이 물었습니다. “이곳은 좋은 곳인가요?” 노인이 되물었습니다. “이전에 다녀오신 여행지는 어떠했습니까?”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볼거리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했습니까? 이곳도 그런 곳입니다.” 그 사람이 가버린 다음에 다른 어떤 여행객이 노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좋은 곳인가요?” 노인 역시 똑같은 말로 되물었습니다. “이전에 다녀오신 여행지는 어떠했습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볼거리도 많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곳도 그런 곳입니다.”
똑같은 관광지이지만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좋지 않아도 좋아 보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좋아도 좋지 않게 보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를 보면 한글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글이 아무리 좋아도 나쁘게 보고 한글을 만들고 널리 알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눈은 어떨까요?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처해 있는 환경을 바라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본문 1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요한계시록 3장 14절을 보면 보다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아멘이 되시는 분이시라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아멘’은 신약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도 ‘아멘’인데 “진실로, 그러합니다. 확신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니오”가 아니라 “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멘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말합니다.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을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소리가 늘어날수록 신앙이 늘어나고 아멘 소리가 줄어들수록 신앙도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설교 말씀을 듣다가도 “아멘”하시고, 찬송을 부르다가도 “아멘”하시고, 기도하시다가도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하늘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실 때 좋아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싫어하셨겠습니까? 잘 모르겠지만 추측해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내려가서 구원하라고 하시는데 세상을 바라보니 너무나 기가 막혀보였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을 잘 모르는 우리가 봐도 세상을 그렇게 좋지 않게 봅니다. 하물며 이 모든 것을 속속들이 훤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 보셨을 때 죄악이 가득찬 세상은 매력이 없는 세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세상이 싫다고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곳에 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좋지 않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우가 좋지 않고 열악한 곳은 피하려고 합니다. 유리한 지역을 고르고 힘 있고 이익을 볼 만한 사람을 고릅니다. 대우가 좋은 곳을 찾아가고 잘 대해주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로 물든 죄인과 병들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온통 죄악과 허물과 탐욕 투성이인 그런 세상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더 풍성한 삶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으로 순종하셨기에 우리가 이 귀한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아멘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으로 가라”고 하시면 두말하지 않고 “예”, 다시 말해 ‘아멘’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생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어라”고 해도 “아멘”하고 죽습니다.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멘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천국은 아멘의 사람들이 사는 아멘의 나라입니다. 대표적으로 두 구절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7장 12절입니다.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4절에도 아멘의 나라인 것을 보여줍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이처럼 천국은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우스개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노멘’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노멘입니까? 아니면 아멘입니까? 이것저것 토를 달고 변명과 핑계를 대면서 “아니오”라고 노멘합니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예”라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을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노멘이 아니라 “아멘”을 잘하시는 아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귀한 인물들은 예수님처럼 하나같이 아멘의 사람들입니다. 역대상 16장 36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아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감사하면서 찬양하자고 권하였을 때 장면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도 끝에 보면 “아멘”으로 끝나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도 찬송할 때 아멘을 잘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멘을 얼마나 잘하는지 심지어 불순종하면 화가 닥친다는 것조차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느헤미야 5장 13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아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이해되든 안 되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을 잘하면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올까요? 아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멘의 나리인 천국을 가져다주고 아멘의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멘을 진심으로 크게 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그 죄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하고 변질되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악과 이 좋지 못한 부정적인 습관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럴 때 축복이 오고 천국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는 삶은 저절로 살아지지만 바르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늙지만 곱게 늙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곱게 사는 것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힘을 써야 얻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질할 때 보기가 좋은 것처럼 힘써 가다듬으려고 노력할 때 울퉁불퉁한 우리의 모습이 단정해집니다. 다듬을 때 천국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잡초를 그냥 두면 계속 자라납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계속해서 김을 매서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다주는 잡초도 계속 뽑아내야 합니다. 도둑이 들면 어떻게 합니까? “도둑님, 대환영”이라고 반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둑이 들어오면 쫓아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도둑이 들고 있습니다. 마귀는 긍정적인 마음을 훔쳐가고 대신 부정적인 마음을 두고 갑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고 부정적인 생각도 쫓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리 마음에 천국이 오고 축복이 가득차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정이 상했을 때 감정적으로 맞서는 것은 쉽습니다. 속이 상할 때 속이 상한 그대로 거친 말을 하기도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참는 것은 어렵습니다. 싫은 사람을 포옹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타락한 우리 죄인은 저절로 두면 타락한 상태로 빠집니다. 그래서 저절로 쉽게 되는 것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힘쓰고 애써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다듬을 때 천국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그러나 싫은 것은 싫습니다. 인간적으로 많이 속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성도의 대응방식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멘”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감정보다는 하나님이 우선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구절이 우선입니다. 사람들이 야속해도 환경이 좋지 못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멘이신 예수님처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이 길 이외, 이 방법 이외 다른 길도 다른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아멘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기준보다도 오직 아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따를 때 문제를 해결 받고 축복이 임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도 어느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아멘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아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감정과 생각이 끌고 가는대로 두면 안 됩니다. 아멘이 아니라 노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습관과 체질을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건강하게 잘 살고 나의 품격을 높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품격이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 때문에 가문의 품격이 올라가고 우리 교회와 지역과 나라의 품격도 올라갑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드시고 오셨지요? 아침을 먹고 나면 무엇을 합니까? 설거지합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서 설거지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도 설거지해야 합니다. 언제나 식사가 끝날 때마다 그릇을 깨끗이 씻어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씻어내서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변화시키면서 체질을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아니오. 안 돼!”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결코 자신을 잘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복되게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건강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사명도 잘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고 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버립니다. 잘못된 결과를 거두게 합니다. 파헤치려고 하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파헤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섭섭한 것도 참으로 많습니다. 부정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환경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추어내기 시작하면 자신이 가장 먼저 속이 상합니다. 들추어내면 잠시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점점 그것 때문에 더 기분이 나빠집니다. 속이 점점 더 상합니다. 속이 상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손에 잘 잡히겠습니까? 가정생활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직업생활이나 교회생활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좋은 면보다 좋지 않은 면이 더 많습니다.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되씹고 파헤치다보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먼저 속상해하고 자신이 먼저 망가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습관과 체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습관과 체질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보고 얼마나 크게 보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잘못은 그것에 가려서 잘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 자신이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하기보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거기다가 잘 따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부족과 잘못은 잘 깨닫지 못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가정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심지어 교회까지 원망합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보의 교회소식을 보면 맨 아래 이런 글이 늘 적혀있습니다. “국가와 가정과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면 시험에 잘 빠집니다. 그러므로 국가와 가정과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활하십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긍정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을 많이 칩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험지를 받고 치는데 그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좋은 성적이 나오는 학생과 좋지 않은 성적이 나오는 학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도 신앙의 시험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시험(test)을 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선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십니다. 정금같이 나오게 하셔서 바르게 곱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악한 시험(temptation)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긍정적인 시험으로 아멘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부정적인 시험은 노멘의 시험입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이 두 가지 시험을 각각 통과하면 그것에 합당한 자격을 줍니다.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면 어떤 자격을 받습니까? ‘미움사, 섭섭사, 비난사’라는 부정에 전문인 자격증을 줍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이 파괴당하고 가정도 나라도 교회까지도 파괴당합니다. 마귀는 이러한 시험에 합격을 많이 시켜서 파괴하는데 전문가인 노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아멘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 “된다”, “할 수 있다”, “좋다”는 생각을 주십니다. 긍정에 전문인 자격증을 주십니다. 아멘을 잘하는 ‘아멘사’ 자격증을 줍니다. 아멘사는 인기 있는 여러 가지 ‘~사’ 자격증 가운데 가장 귀한 ‘사’입니다. 아멘의 사람인 아멘사는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불쌍하게 여겨주고, 대접을 받으려하지 않고 대접하고,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섬깁니다. 아멘의 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앞섭니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은 크게 보고 다른 사람의 부족과 허물은 작게 봅니다. 범사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자세로 일합니다.
그래서 만사를 되게 만듭니다. 자신도, 가정도, 나라도, 교회도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안 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 대보십시오. 안 되는 이유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환경이 온갖 모순투성이고 온통 잘못투성이 속이지만 “된다!”라고 외치면 그 말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좋지 않은 것도 좋게 해석하면 좋게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과 환경이 실제로 점점 좋게 바뀝니다.
본문 1장 20절은 하나님의 약속은 아멘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그대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잘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온갖 부정적인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시고 긍정적으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셔서 부정적인 세상을 긍정적인 세상으로 바꾸어주시고, 안 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죄인을 긍정적인 성도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아멘이신 예수님처럼 주님께서 역사해주시는 가운데 우리가 힘을 다해 가다듬어나가서 긍정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멘”,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아멘의 사람들이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우리의 변화된 마음을 통해 아멘의 소리가 널리 퍼져나가서 긍정적인 변화가 이곳저곳에서 많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아멘의 나라인 천국이 임하고 마음과 가정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축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긍정의 삶을 사셔서 하나님께서도 크게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03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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