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면 용서 받습니다 (눅 6:35-38)
세계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요? 전기일까요? 유전자일까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정말 꼭 필요한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지우개가 있습니다. 컴퓨터 자판에도 꼭 있는 것이 ‘삭제(Delete)’ 기능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지우는 기능이 없다면 아무리 거창한 컴퓨터라고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우개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삐뚤어지고 잘못된 것을 고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도 최고의 필수품 가운데 신앙의 지우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라는 지우개입니다. 신앙생활의 최고봉은 사랑인데 그것이 나타난 것이 용서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은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용서를 통해 가능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신앙의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고 용서합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보복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17절을 보면 형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아버지가 요셉에게 이런 유언을 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은 권력으로 얼마든지 해칠 수 있습니다. 이미 형에게 계략을 펴서 감옥에 몇 번 들어가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형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깨끗이 용서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에서 21절에서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이러한 신앙의 지우개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었습니다. 용서가 없었다면 형들은 모두 처단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대는 끊어졌을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였기에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길러냈고 많은 백성이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되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힘이요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 가지 귀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좋은 성품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용서입니다. 느헤미야 9장 17절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줍니다.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용서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없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용서해주는 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기에 구원받아 영생을 얻어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 열두 명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평지로 내려오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으려고 몰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더러운 귀신이 들려 고난을 받던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그러우시고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성품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지금은 대강절기간이고 다음 주는 성탄주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주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너무 아낀 나머지 세상에 보내기 싫어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도 탄생하신 성탄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는 자가 있었기에 세상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서해주셨기에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처음부터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거역하던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해주시고 화목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우리는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등을 돌리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들어가자 두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38선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철책담이 무너졌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원수된 것을 예수님의 육체로 허물어뜨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처럼 하나님은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뺀 하나님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면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용서할 때 사랑과 구원의 역사는 오늘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용서가 들어가면 두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요셉처럼 용서해주면 요셉 때문에 가족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명까지 구원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곳곳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성품을 가지고만 있지 않으십니다. 그런 성품을 나누어주십니다. 용서를 나누어주십니다. 그 자비로우심이 넘치기에 비판하지도 않으시고 정죄하지도 않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일이 비판하시고 일일이 정죄하시고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의 영생은 어떻게 되어버리고 이 땅에서 걷고 있는 천국 길은 어떻게 되어버렸겠습니까?
그러나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셔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 일을 하라고 본문 37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를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그 안에도 용서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하실 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 용서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35절에서도 용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가복음 11장 25절 역시 용서에 대해 말씀해줍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용서받은 용서가 취소되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용서는 이미 받았지만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더 충만하게 받으려면 우리가 용서해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풍성한 기쁨을 누리려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본문 앞에 나오는 27절에서 34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이 모든 일은 황당한 일이고 쉬운 일도 아니고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용서가 더욱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때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저 따뜻하게 숯불에 떡을 구워주시고 생선을 구어서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오히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용서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수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안 들고 저것이 괘씸하다고 여기면서 가지를 다 쳐버렸다면 예수님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쳐버릴 것은 사람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과 섭섭함입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나지 못하도록 말씀과 기도와 결단으로 잘라내 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지 않고는 못 사는 존재입니다.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흠 없이 실수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끝없이 용서를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도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과 그 자비로우심이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셔서 나쁘게 대하든 잘해주지 않든 그 어떤 상황에도 상관없이 깨끗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용서를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면 끝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용서를 주는 자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본문 38절은 주는 자의 결과가 어떤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기만 하고 손해만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생자마저 아낌없이 주니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칭송하며 감사드리며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마저 아낌없이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주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기만 하고 끝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후히 풍성하게 받습니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받습니다.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면 오히려 비판당하지 않고 정죄당하지 않고 용서받습니다.
“꽁”하면 하늘이 “꽁꽁” 묶입니다. 그러나 “확” 풀면 하늘이 “확확” 풀립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 그것을 말해줍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꽁꽁” 언 마음은 하늘도 “꽁꽁” 얼어붙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꾸만 풀려고 해야 합니다. 자꾸만 녹이려고 해야 합니다. 암도 저온에서 잘 자라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따뜻한 마음에는 암도 잘 자라지 못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기가 어려우나 이 일을 하고나면 상이 큽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고 기다리면서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모두 이루어주십니다.
용서하면 어떤 좋은 것이 옵니까? 잠언 19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본문 35절은 그 영광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나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용서의 하나님이신 그의 아들로 칭송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줄 때 받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무엇을 주라는 겁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있고 정성도 있고 관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도 있고 용서도 있습니다.
본문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눈여겨볼 말씀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주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좀 더 확장해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면 그대로 품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되돌아온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돌아오기 때문에 나쁜 것은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흘려보내야 합니다. 상수도와 하수도의 역할을 서로 바꾸면 안 됩니다. 미움과 같이 버릴 것은 하수도에 버리고 용서와 같이 좋은 것은 상수도로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뒤바뀌면 얼마나 생활이 불편하겠습니까? 상수도에서 하숫물이 나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므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말씀에 약속하신 대로 많은 좋은 것들이 되돌아와서 품에 넘치도록 가득 안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4장 32절은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도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불만이 가득 차더라도 서로서로 용납하고 서로서로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깨끗이 용서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사이에도 서로 먼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여 늘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우리 등에는 “허물”이란 딱지를 여기저기 늘 붙이고 다녀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에는 서로를 비참하게 파괴시켜버리는 미움과 원망과 섭섭함이란 한과 독을 품고 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용서해주고 서로서로 용서를 받음으로써 서로서로 마음이 풀리시고 하늘까지도 풀리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지키면서 어떤 기쁨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하늘문이 열리는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용서라는 신앙의 지우개를 사용하셔서 꽁꽁 언 마음을 푸시고 꽁꽁 걸어 잠근 마음을 활짝 여셔서 서로의 마음이 확 풀리는 기쁨이 충만하시고 아울러 꽁꽁 잠긴 하늘문도 활짝 열리는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0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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