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 (고전 15:45-49)
6월 6일은 무슨 날이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현충일입니다. 현충일(顯忠日, the Memorial Day)은 “국토 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하잖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북침하였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글을 써도 제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북한 정권이 말하는 대로 앵무새 역할을 충실히 잘해야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누가 이 땅을 점령하려고 하였고 누가 이 땅을 지키려고 하였습니까? 이것을 바꾸어 가르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국군 장병들이 무엇 때문에 죽어갔습니까? 10대의 순정의 나이인 학도병들이 무엇 때문에 죽어갔습니까? 유엔에서 파병한 수많은 나라의 장병들도 무엇 때문에 죽어갔습니까? 누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까? 누가 이 땅을 점령하려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까? 이것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과 학도병들과 유엔의 젊은이들의 충성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과 수고를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들의 애국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이분들이 흘린 피 때문입니다. 모두가 살겠다고 총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숨어버리고 싸우지 않았다면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이 땅을 위해 바쳤기에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개인 소유의 등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토 방위를 하지 못한 북한 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인 명의로 등기가 가능합니까? 조금만 독재해도 못살겠다고 야단인데 3대 세습하면서까지 독재하는데 그런 땅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평화롭게 잘 산다면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탈북하려고 합니까? 오늘날 국가관과 안보관이 잘못되어도 정말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연 국적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지난날의 독재 정권도 국가관과 안보관은 철저했습니다. 그렇다고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 정권을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 국가관과 안보관이 희미한 세력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민주화투쟁인지 드러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 투쟁인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인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가지고 민주화 투쟁을 한 사람은 진정한 민주화 투쟁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투쟁을 위한 투쟁, 정부타도를 목표로 한 투쟁은 정당성이 없습니다. 순국한 분들에게 대한 고마움과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고 이 땅을 자유 대한민국 소유의 땅으로 지키려고 투쟁하지 않았다면 올바른 민주화 투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누가 북침하고 누가 남침했습니까? 그 당시에 없어서 모릅니까? 끝없이 조작했다고 하는 주장을 보면 모릅니까? 북한 정권은 서해안에 무력침공하고 연평도를 폭격하고서도 조작했다고 하고 먼저 공격했다고 허무맹랑한 엉터리 주장을 합니다. 더 한심한 것은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때문에 이 남한 땅에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북한 정권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허위날조와 주장에도 불구하고 누가 북침했는지 남침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누가 먼저 공격하였습니까? 남한입니까? 북한 정권입니까? 북한 정권이 늘 먼저 침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잡아줘야 하는데 정치계와 법조계와 교육계와 언론계와 문화계와 심지어 일부 종교계 인사까지 나서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생명”, 입만 열면 “인권”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전국적으로 촛불을 동원해서 시위하면서도 정작 북한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말 한 마디도 못합니다.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선량한 지도자를 향해서는 온갖 험한 말과 욕을 퍼부으면서 끈질기게 공격합니다. 이러한 것을 제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토 방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분들의 애국심을 길이 받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침 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와 성도들이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순교도 많이 당했습니다. 포로로도 많이 잡혀갔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또한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유일신 사상이 그들의 우상화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태양은 오직 독재자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합니다. 유일한 태양을 더 강조할수록 기독교를 더 박해합니다.
북한 땅에 있는 성도가 지금도 얼마나 많이 잡혀 죽어가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까? 부산노회에서 주관하여 삼일교회당에서 여는 탈북 성도의 간증 집회가 있습니다. 가서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 실상이 어떤지를 생생하게 알 것입니다. 북한 정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독교를 인정한다면 지금 북한 온 땅에 교회가 세워져 있고 자유롭게 교회에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주일예배를 은혜롭게 잘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계의 일부 인사가 나서서 북한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유일신 하나님이 보일까요? 자칭 민족의 태양이라고 하는 사람만 더 크게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이 시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켜줄 수 있습니까? 육해공군이 지켜주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가진 군인은 오히려 자신의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팔아먹는 스파이노릇을 합니다.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이면서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관련 서적을 읽고 기밀을 유출하고 북한정권에 이로운 말과 행동을 한다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가진 군인만이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군인뿐만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가진 채 평화통일을 위해 힘써 노력하고 있다면 그가 진정 애국자입니다.
우리의 애국심은 피를 흘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지켜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유족들에게 얼마만큼 보답하고 있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애국심을 얼마나 본받아서 올바른 국가관과 안보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현충일을 맞이하여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들의 애국심을 본받은 애국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과 애국심은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현충일도 잘 지켜야 합니다. 영적인 현충일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순교한 분들께 감사드리고 그분들의 충성심을 잘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국해야 합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44절을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의 몸도 있고 영의 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육의 몸을 가진 사람과 영의 몸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육의 몸을 가진 사람은 비신자입니다. 신자는 육의 몸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영의 몸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롭게 부활하여 완전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납니다. 그 이전의 신자는 자연 상태로 태어난 육의 몸과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태어난 영의 몸, 이렇게 두 가지의 몸을 모두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45절과 46절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신령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본문 47절이 말하기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정리하면 아담은 땅에서 난 흙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요 둘째 사람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난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사람입니다.
본문 48절을 보면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호이’(자들은)는 ‘호’(자)의 복수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한 사람 아담을 말하고 흙에 속한 자들은 이와 같이 흙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하늘에 속한 자는 한 사람 예수님을 말하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이와 같이 하늘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 48절에 이어서 나오는 본문 49절을 보면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성도를 말합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흙에 속한 몸도 입고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몸도 입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늘에 속한 몸을 입고 삽니다. 그러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는 완벽한 신비롭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는 그 몸을 입고 신비롭고 영화로운 삶을 영원히 삽니다. 정말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도라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 성도의 신분은 이 땅에도 속해 있지만 하늘에도 속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앉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은 말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앉혀있다고 하였습니다. 6절 앞에 나오는 5절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심하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세 가지 단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함께(‘쉰’, together with)‘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 내 죽음, 예수님 부활 내 부활, 예수님 승천 내 승천”이 됩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원어로 된 성경을 보아야 알 수 있는데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과 일으킴과 하늘에 앉힘이 모두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 부활승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승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성도로서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정말 이 일이 이미 일어났을까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 태어난 성도라면 분명히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는 흙에 속해 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해 있는 존재로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죄인이 구원을 받아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본문 45절에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미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는 두 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땅에 속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 태어난 이후로 이미 승천하여 하늘에 앉혀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일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제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이미 시민권을 받아 소지하고 있는 상태로 하늘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민권은 몇 개라는 것입니까? 성도는 땅의 시민권과 하늘의 시민권, 즉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한 개의 시민권을 가진 흙에 속한 육의 사람이 아니라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처럼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는 육의 몸을 입고 있다가 육의 몸이 사는 곳인 유황불못의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육의 몸을 벗어버리고 영의 몸을 입고 영원히 천국에서 신령하게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만들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신 솜씨와 그 사랑과 은혜에 그저 경배드릴 뿐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그렇다면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현충일을 맞이하여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의 현충일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국토 방위를 목숨을 던져 지켜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들의 후손도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들의 애국심을 길이 본받아 이 땅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현충일도 잘 지켜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도 잘 따라야 하지만 하늘의 법칙도 잘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발휘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봉사도 잘해야 합니다. 신앙과 진리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구약시대와 초대교회 이후 오늘의 시대까지 순교해 오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 38절을 보면 순교적인 삶과 순교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나라에도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 순교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았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재물을 희생하고 심지어 어린 자녀들까지도 희생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해주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지켜주신 분들과 그분들의 후손을 잘 기억하고 감사하며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분들의 애국심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충성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24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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