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요일 2:15-17)
하남중학교 화단에 가면 큰 돌이 있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쓰여 있을까요? 대부분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돌에 새겨놓습니다. 두 글자인데 ‘충효’(忠孝)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충효’ 정신은 언제나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래서 이 정신을 바로 세우려고 열두 달 가운데 5월은 ‘효’의 달, 6월은 ‘충’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충효 정신이 너무 희박해져 나라도 가정도 사회 곳곳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있습니다. 정신의 기초를 잘못 놓아서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무너진 가정 회복과 어지러운 나라의 회복을 위해 이 충효 정신을 꼭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책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인간 저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 중의 말씀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몇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을까요? 두 부분입니다. 첫 부분은 하나님에 관한 것, 두 번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부분의 처음 시작은 각각 무슨 명령으로 시작합니까? “충성하라”와 “효도하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이 ‘충’과 ‘효’가 모든 질서와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도는 모든 삶 가운데 첫 번째로 두어야 할 덕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계명의 명령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주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땅에서 장수하고 하는 일이 잘되도록 해주십니다. 이것이 잘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이 충효 정신을 꼭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십계명 정신 안에는 이렇게 좋은 충효 정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신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경천애인’(敬天愛人) 정신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인데 성경의 관점으로 풀이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 정신이 모든 사상과 삶과 일의 또 하나의 기본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기초되어 있지 않으면 그 무엇을 하든지 그 어느 곳이든 그 어느 때든지 흔들립니다. 아무리 잘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천애인의 정신도 꼭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이 경천애인의 정신을 잘 포함하고 있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어느 성경책이지요? 요한일서입니다. 요한일서만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집중적으로 잘 기록한 책은 없습니다. 요한일서는 결국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16)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4:7,8,20,21). 이러한 사랑에 관한 구절은 요한일서에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알고 보면 사랑의 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된 내용을 보면 사랑의 사귐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우레는 천둥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는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을 말해줍니다. 사랑은 이처럼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더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으로부터도 사랑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천둥이 칠 정도의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으나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강조했는가는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개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가파오’라고 하는데 신약 성경에 143회 나옵니다. 이 가운데 요한이 72회를 사용해서 50.3%나 차지했습니다. 요한복음에 37회, 요한 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를 사용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으며 그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사랑이 넘쳐 이웃을 향해 흘러가길 바랍니다.
본문 15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아멘. 한 구절에 무려 ‘세상’이란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일서 전체에서도 23회나 사용하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저자가 쓴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슨 모순인가요? 모순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세상의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거꾸로 바꾸어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세상은 사랑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반대입니다. 세상은 어떤 곳이지요? 본문 1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아멘. 세상은 육신의 정욕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이미 출발이 다릅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지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 곧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참으로 귀중한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마귀로부터 오는 세상의 것과 서로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 6:15). 도저히 조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지 말기를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우리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하면 안 됩니다.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랑을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에 속하면(of the world) 안 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동화되면 안 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고 세상과 잘 지내려고 한다면 하나님과는 점점 원수사이가 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성경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은 놔두고 세상과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세상과 간음하는 것으로 봅니다.
본문 17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멘. 세상의 것은 무익하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영원하기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합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을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을 것이며 더 나아가 영원토록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서로가 영원히 나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리하면 이처럼 영원한 사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사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랑에는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하라!”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훼손시키면서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목의 주님께서 왜요? 말씀의 검은 양날의 검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장소와 시간에 말씀을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아멘”과 “할렐루야”로 환호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귀를 막고 듣기를 싫어하거나 꼬투리를 잡습니다. 심지어 핍박까지 합니다. 양쪽 날을 가진 말씀의 검이 이처럼 휘둘러지면 한쪽은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구원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끝끝내 말씀을 튕겨내서 심판을 자초하여 화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강 건너편에서 모였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들어가거든 그곳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의 말씀을 잘 청종하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성경책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신이 명령한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거듭거듭 명령한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왜 그렇게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을까요? 그곳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땅은 아름답고 좋은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넘어 이 명령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의 바울 사도도 로마서 12장 2절에서 당부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처럼 사랑에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지만 시대에 동화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시대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옷을 누가 맞추어 입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식 세계관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람이 그런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봐도 무엇을 생각해도 어떤 정책을 내놔도 무슨 일을 해도 기독교식으로 해냅니다. 그런 사람이 시대의 옷을 잘 만들어 입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옷을 입어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만들어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식 세계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같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시대의 옷이 아니라 세속적인 시대의 옷, 인간 중심의 옷을 입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식이지 참된 기독교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부패하고 변질된 마음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에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만 전혀 옳지 않습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망치고 있습니다. 시대의 옷을 잘못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어떤 뉴스를 보면 1900년대 YMCA 회원들이 절에 가서 수련회를 열고 기념으로 대웅전 앞에서 사진 찍은 것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에도 종교간 평화를 이루는데 큰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표적인 인간 중심의 세속화된 시대의 옷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종교 간의 평화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분별한 종교 간의 평화를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셨을까요? 그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신사를 참배해야 하는 한일 합방이 되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너무 무분별한 사랑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 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재고해야 합니다. 석가탄신일 봉축 법요식에 일부 무분별한 기독교계가 인사가 대거 참석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뉴스거리가 된다면 1900년대의 사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이 나라에 닥쳐오겠습니까? 이러한 무분별한 종교 간의 평화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저 평화를 잘 유지하고 잘 연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를 잘 유지하고 연합을 잘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에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철저한 기독교식 세계관으로 무장하고서 평화를 유지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무분별한 타종교와의 연합과 평화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박수를 받고 크게 환영을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할수록 결국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평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효 정신을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때론 세상과 충돌할 때가 생깁니다. 공중 잡은 권세자와 그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과 충돌합니다. 세속과 성경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쟁이 당연히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이 말씀의 뜻을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한 누가복음 12장 51절 말씀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또한 세상에 속한 자들과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평화를 누리고 연합을 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뜻이 서로 잘 맞아서 잘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뭉칠수록 하나님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립니다. 다른 생각과 정책을 내놓게 됩니다. 성경 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이 잘못되어 있으면 자꾸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합니다. 자신들은 확신을 가지고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잘못된 정보를 가정에 제공하고, 학교의 학생에게 제공하고, 시민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래서 점점 기독교식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기독교식이 되어야 가정이 잘되고 사회가 잘되는데 반대로 가면 마음은 잘되기를 바라지만 점점 내리막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국가 최고의 권고기관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신뢰해야 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관련해서 볼 때 요즈음 계속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심히 우려가 됩니다. 종교차별과 종교편향에 대해 용역기관에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백상현 기자가 보도한 기사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종교차별 실태조사 연구기관으로 선정된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공동대표 박광서)이 과거 한국교회를 공격했던 행적이 추가로 드러나면서(표 참조) 국가인권위원회에 여론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주요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종자연의 안정성과 신뢰성, 공신력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연구기관으로 졸속 선정한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참여불교재가연대 부설단체인 종자연의 종교 편향적 행보는 광범위하고 심각하다. 이 단체가 2005년부터 집중적으로 문제제기한 이슈는 학내 종교자유 보장,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강화, 종교편향 자치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이다. 겉으론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용은 모두 기독교 신앙을 표출하는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다. 종자연은 심지어 ‘Jesus loves you’라는 문구가 적힌 고려은단의 옥외광고판까지 시비대상으로 삼았다.
매년 185억원씩 820억원의 국고가 투입된 템플스테이나 수십억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연등회, KTX 통도사역 병기 논란 등의 이슈에 대해선 일절 함구했다. 이는 종자연의 종교편향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종자연을 이끌고 있는 박광서 공동대표는 현재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이사와 한국불교재가회의 운영위원, 조계종 화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잘 먹고 잘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이 노력한다고 잘 안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충효 정신 경천애인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기독교식 세계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노력해도 힘이 듭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해도 학교가 불안합니다. 학교 폭력과 자살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잘해보려고 한다고 잘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함께 잘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고 그저 자기 혼자 잘되려고 자기 가정과 자기 기업만 잘되려고 하다가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도 이혼율이 세계 최고입니다. 경제도 갈수록 어렵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편합니까? 잘못된 세상에서 사는 참된 성도들은 갈수록 당하는 고통이 커지고 있습니다. 같이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을 올바르게 무장해야 합니다.
건강한 정신의 바탕 위에 잘되어야 하지 그냥 잘되는 것은 오히려 재앙입니다. 잘되고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못 되어도 재앙이고 잘되어도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정신과 영혼을 먼저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고 강건해집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 나아가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기독교식 세계관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신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 많이 진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바탕 위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은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정신적 가치가 무너져서 나라와 학교와 직장과 사회가 흔들리는데 개인과 가정과 기업이 어떻게 올바르게 설 수 있고 잘될 수 있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생각과 방법이 잘못되어 가는데 잘 되도 못 되도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독교식 세계관으로 시급하게 무장해야 할 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본문 2장 15절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그 사랑의 동기는 다르셨습니다.
사랑의 사도가 쓴 사랑의 책인데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요한일서 4장 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과 달리 세상의 것이 좋아서 세속화되기 위해 세상으로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사랑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왜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사라져버릴 세상과 잘 동화되어 잘 먹고 잘 살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있습니까? 아니면 다소 어려움을 겪고 때론 다툼도 있지만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실현시키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데 있습니까?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25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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