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요? (고전 12:31-13:8)
보석은 대부분 희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흔한 것이면서도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은 약방의 감초입니다. 사랑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이 가장 크고 가장 좋은 은사라는 것입니다. 본문 12장 31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은 바로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존속합니다. 본문 13장 8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언제나 지속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13장 13절에서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믿음과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은 천국에 들어가면 끝나지만 사랑은 천국에 들어간 이후에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사랑이 그만큼 귀한 것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될까요?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반드시 뒤따라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음으로 그런 결과를 맞이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버릴까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됩니다.
1) 시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빈 사람은 그렇게 요란합니다. 말은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작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말은 못합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합니다. 본문 13장 1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랑이 담긴 상태로 말을 해야 하는데 사랑이 없이 말하기에 듣는 사람에게는 잔소리로 들리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귀가 아파서 귀를 막아버립니다. 심지어 마음까지 닫아버립니다. 이처럼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유창하게 말하고 천사처럼 아름답게 말해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됩니다.
2)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자기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겨져 있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직업과 지식과 외모와 믿음까지 가지고 있어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 정도면 일등 신랑감, 일등 신부감인데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장 2절이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성경도 잘 알고 여러 가지 지식도 많고 심지어 산을 옮길 만한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3)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아끼는 재물과 시간과 재능을 내놓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귀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지라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됩니다. 본문 13장 3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무리 내놓아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감동이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사진이나 찍어 업적이나 생색을 내는 캠코더 구제와 봉사가 되어버립니다. 문자적인 이름을 남기는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대대로 존경받을 이름을 남기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마음에도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였으나 유익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월간고신 생명나무 2012년 6월호 “성경으로 본 한의학”이란 코너를 보면 해운대연합교회 장로인 김양규한의원 원장이 쓴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김양규 원장은 “심장은 마음”이라고 하면서 “살면 살수록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의학에서 ‘심’이라고 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심장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을 유형의 심이라 하고, 마음을 무형의 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형의 심과 무형의 심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신경을 많이 써서 마음이 상하면 실제 심장에 병이 들고, 심장이 안 좋으면 마음이 많이 아프게 된다는 말이다. 한의학적으로는 유무상통을 이렇게도 푼다. 물론 그 본래의 뜻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 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신경을 많이 쓰면 대개 심장에 문제가 생긴다. 적어도 한 20년, 임계기간이 지나면 마침내 심장에 치명적인 병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장병은 화병이라고 한다. 화가 쌓여서 울체가 되어서 생기는 병, 울화병이라고도 한다. 현대인들에게 많이 있는 심근경색증도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 몸에 있는 혈관의 총 길이는 대략 16만㎞다. 그런데 그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9만 6000㎞의 혈관이 심장 하나에 몰려 있다. 적도 둘레의 두 바퀴 반에 해당하는 이 길고 긴 혈관들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막히면 심근경색이 되어 심장마비로 연결된다.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다. 콜레스테롤, 니코틴, 기름기 등 다양한 원인이야 물론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해독은 바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심장이 질식하는 게 바로 심근경색증이다. 멀쩡하던 심장 혈관이 갑자기 좁아져서 경색이 오는 것이다. 한의학적으로 볼 때 마음은 곧 심장이라는, 마음 자체가 바로 또 하나의 심장이라는 논리를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렇다.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심장이 튼튼해지고, 부정적인 마음, 걱정과 염려, 근심에 싸여 있으면 심장에 병이 들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했다. 영적인 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이해하고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다.
영적인 심장이 굳어지면 심근경색이 온다. 영적인 심근경색은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용납하지 못하는 병이다. 미워하고 거부하며 정죄하는 병이다. 무서운 것은 그 병이 영적인 심근경색이라는 것이다. 남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죽이는,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무서운 병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영적 심근경색이 많다. 문제는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심근경색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알면 회개를 할 텐데, 회개를 하면 고치게 될 건데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심장이 튼튼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는 사람, 그런 사람들인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는 영적 심장이 튼튼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요?
앞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이 없이 말하는 사람은 시끄러운 사람이 되고, 사랑이 없이 격식을 갖춘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사랑이 없이 선행하는 사람은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영적 심근경색이 걸려서 자신이 먼저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은 그만큼 사랑이 모든 것에 있어서 매우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반대로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영적 심근경색이 아니라 튼튼한 사랑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따뜻한 마음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본문을 통해 보면 15가지의 사람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먼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정도의 사람이 된다면 어디를 가나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오래 참습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대하든 참아줍니다. 사랑을 담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랑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렇게 해야 사랑하는 것이고 이렇게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래 참아주는 것이 사랑의 첫 번째 특징인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오래 참아주고 있다면 사랑해주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상대방이 우리에 대해 오래 참아주고 있다면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소 엉뚱한 말씀 같지만 방귀를 오래 참는 것도 사랑입니까? 그것도 하나의 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거리낌 없이 방귀가 나오는 대로 뿡뿡 뀌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지독한 방귀를 뀌면 어떻게 되겠어요? 냄새도 풍기지만 온실가스가 발생해 지구 온난화에도 영향을 줍니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이라고요? 지구의 방귀를 다 모아놓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난 7월 11일에 수원 연합뉴스의 신영근 기자가 올린 기사입니다. “소(牛)의 방귀와 트림으로 발생하는 온실가스 양을 줄일 수 있는 사료 메탄 발생 예측지수가 개발됐다. 농촌진흥청은 소로 대표되는 반추(反芻)가축에 급여되는 사료 종류에 따라 발생하는 메탄가스 양을 측정해 ‘사료 메탄 발생 예측지수’를 개발했다고 11일 밝혔다.
반추가축이 되새김질할 때 장내 박테리아는 음식물을 분해, 발효시키고 이 과정에서 온실가스인 메탄가스가 생성돼 가축의 방귀나 트림으로 배출된다. 반추가축의 방귀와 트림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2008년 이산화탄소로 환산했을 때 연간 국내에서만 361만t에 달하며, 이는 국내 농업부문 온실가스 발생량의 19.7%를 차지하는 규모이다.
농진청은 기존 영양소 함량과 소화율만을 기초로 배합한 사료를 반추가축이 먹을 경우 사료 에너지의 2~12%가 메탄으로 배출되지만, 이번에 개발한 메탄 발생 지수를 포함시켜 배합한 사료를 먹이면 메탄 배출 비율을 1~2%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사소한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큰 강물이 되고 넓은 바다가 되듯이 우리의 작은 사랑도 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다고 우습게 여기지 않고 작은 것 하나라도 오래 참으면 멋있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방귀 하나라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방귀를 우습게 여기면 큰 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에게, 방귀쯤이야 무슨 문제가 있다고?’ 아닙니다.
지난 7월 4일자 마이데일리 뉴스에 나온 사건입니다. 김경민 기자가 올린 기사입니다. “자신의 집 앞에서 방귀를 뀐다며 이웃을 총으로 위협한 남성이 체포됐다. 미국 폭스뉴스 4일(현지시각) 보도에 따르면 노스 뉴저지주 티네크에 거주 중인 다니엘 콜린스 주니어(72)라는 남성은 자신의 집 앞을 지나던 이웃 주민을 32구경 권총으로 위협해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콜린스는 권총을 들이대면서 “머리에 구멍을 내놓겠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붙잡힌 콜린스는 “이웃 주민이 내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방귀를 뀌어서 화가 났다”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설명했다. 현지 경찰 대변인인 맥거는 “이웃이 상습적으로 방귀를 뀌어 악취를 참지 못해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콜린스는 결국 무기 불법소지와 테러 위협 및 살인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여러분도 아무 앞에서나 방귀를 뀌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곳에서나 뿡뿡 뀌면 안 됩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방귀를 뀌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집이든 어디서든 방귀가 나오려면 오래 꾹 참았다가 화장실 등에 가서 뀌시기 바랍니다. 오늘 좀 싱겁고 유치해 보이는 방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오래 참는 사랑은 이처럼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13장 4절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오래 참다’는 ‘마크로뒤메오’인데 7절에 ‘참다(스테고)’와는 다른 뜻입니다. ‘스테고’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말하는데 ‘마크로뒤메오’는 인내심이 강하고 참을성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꾹꾹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렇게 ‘마크로뒤메오’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래 참아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모두가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즉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면 우리 몸과 영혼은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심으로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하반절입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마크로뒤메오)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그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하라고 사도 바울이 권면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마크로뒤메오).” 아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해주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아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이렇게 오래 참아주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고 존경받는 멋있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에 사용된 ‘오래 참다’는 단어는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에도 나옵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마크로뒤메오)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마크로뒤메오)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것은 종이 임금에게 “내게 참으소서”라고 한 것과 용서받은 그 종에게 동료 종이 “나에게 참아주소서”라고 한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참아달라고 하였지만 그 결과는 서로 다릅니다. 사랑이 담긴 마음의 여부에 따라 참아주기도 하고 참아주지 않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래 참음으로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오래 참아주고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러한 신적 용서와 오래 참음의 마음을 가진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하여 이웃을 용서해주고 오래 참아주십시다. 그리하면 영적으로 튼튼한 심장을 가진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3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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