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온유하며 (고전 13:4)
사랑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요?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본문 13장 4절에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인 온유한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온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의 사람이세요? ‘온유’라는 글자대로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일까요?
국어사전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풀이해주고 있습니다. 영어사전은 “gentleness, mildness”라고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말할까요? 사랑하면 온유한 사람이 되는데 그런 사람을 말할까요?
먼저 온유한 사람으로 어떤 사람이 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온유한 사람 가운데 단연 최고의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성품이 온유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의 누나와 형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면서 비방하였을 때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인간적으로 맞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습니다. 함께 인도하던 백성의 지도자들과 그리고 또한 그 백성들이 거역하더라도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온유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온유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구약에서 모세라면 신약에서는 누구일까요? 모세가 구약 성경 가운데 중요한 모세오경을 썼다면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가운데 대부분의 서신서를 썼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온유함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신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하였으며(출 32:32) 바울은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롬 9:3) 엄청난 말을 하였습니다.
모세와 바울은 그럴 정도로 온유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큰 일을 맡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온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그러한 평가를 내립니다. 시편 37편 11절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팔복 가운데 세 번째 복이 무엇이지요?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마 5:5). 이처럼 온유함으로 대하는 사람이 위대하게 쓰임 받습니다.
모세와 바울이 바로 그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그런 사람이 온유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해서도 그런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에베소서 4장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온유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온유하셨는지 입을 다문 것을 어린 양이 잠잠한 것에 비유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2절입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12장 19절을 보면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할 정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유하지 않으시고 즉각 맞대응하시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흉허물에도 불구하고 온유하게 받아주시고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심으로 영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아직도 온유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신다면 이번 기회에 꼭 온유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온유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앞서 말씀드린 성경구절 가운데 ‘온유한’이란 단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세에 대해 사용한 ‘온유한’은 원어로 ‘아나우(humble)’이고, 다윗 왕이 사용한 ‘온유한’도 ‘아나우’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들어와서 ‘프라위스(gentle)’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하셨을 때 이때의 ‘온유한’이 원어로 ‘프라위스’입니다. 팔복 가운데 세 번째에 나오는 ‘온유한’도 이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소개할 때 ‘온유’를 명사형인 ‘프라위테스(gentleness)’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온유한’에 대한 구절도 역시 ‘프라위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온유, 온화, 친절, 겸손’이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말씀드린 온유는 주로 일반적인 온유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서 나온 온유의 의미는 온화하고 점잖고 겸손한 것에 가까운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온유하다’의 뜻은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원어도 ‘크레스튜오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한 번 나옵니다. 헬라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로 기독 문헌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온유하다’(크레스튜오마이)는 말은 ‘친절을 보이다(show kindness)’라는 의미입니다. 온유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 가운데 ‘친절’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 의미를 이 단어가 더 드러낸 것입니다. 다소 복잡한 것 같지만 본문에 의하여 간단히 말씀드리면 온유하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온유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래서 꼭 설명을 드려야 하고 그 설명을 꼭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온유는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원어 성경을 보면 다릅니다. 또한 영어 성경을 봐도 다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본문을 ‘kin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영어권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kind’로 알고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 가운데 표준새번역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로, 우리말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온유로 번역해 놓은 다른 한글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성경책을 함께 살펴보면 더 잘 깨달을 수 있기에 다른 성경도 함께 찾아본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온유라는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지요? 본문에서 말하는 온유의 개념은 또 다른 측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다시 풀이하여 말씀드리면 “사랑은 친절하며(love is kind)”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오신 온유와 어떻게 다르십니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는 친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면 매우 친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사랑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친절한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친절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친절로 보여줍니다. 친절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요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스스로 생각해보실 때 친절하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불친절하다고 여기십니까?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 말은 “친절하다, 불친절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문제는 친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친절의 문제를 해결하면 사랑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친절한 사람이 되셔서 사랑의 문제를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공기업이든 회사든 공무원이든 상가든 친절 교육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시작한 가락아파트 2·3단지 상가에서 실시한 상인대학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말은 공손하게, 표정은 밝게, 행동은 친절하게”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만 하면 사업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품질도 좋아야 하고 가격도 적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가격도 아무리 싸게 팔아도 위의 세 가지가 없으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제품인데 누구는 잘 팔고 누구는 왜 잘 못 팔까요? 바로 친절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식당이나 상점에 갈 때 불친절하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불친절하게 대하면 거의 물건을 사러 간다든지 음식을 먹으러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친절은 이처럼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객 만족”의 시대를 넘어서 “고객 감동”까지 가도 있습니다. “고객이 오케이할 때까지” 등의 표어도 등장합니다. 이렇게 기업도 공기업도 공무원도 필사적인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고객의 마음을 열고 고객의 지갑을 여는 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친절 분량은 어느 정도 되십니까? 다른 조직은 친절 교육에 필사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교회 안에서는 친절 교육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친절해야 할 교회와 성도가 친절 교육에 목숨을 매달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해봐야할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랑하라”고 그렇게 외치면서도 정작 친절에 대해서는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은 친절하며”라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것에 머물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절의 중요성을 알고 친절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친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마음이 착하고 친절한 자가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이다”(the heart benevolent and kind. the most resembles God). 이 글은 R. 번즈(Robert Burns)가 쓴『겨울밤』(A Winter Night)이란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친절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친절을 등한히 여깁니다. 그러나 친절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세네카(Seneca)는『은혜시여론』(恩惠施與論, De Beneficis)이라는 책에서 “끈질긴 친절은 악한 자를 정복한다”(persistent kindness conquers the ill-disposed)라고 했습니다. 친절은 정복합니다. 악한 사람만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정복합니다. 사람만 정복하지 않고 기업까지도 정복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차지하고 물질까지도 차지하게 합니다. ‘하찮은 친절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해낸다고 그래요?’ 혹시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아 보이는 친절이지만 위대한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친절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작은 호텔 종업원이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 새벽 1시 무렵에 빗속을 뚫고 차 한 대가 호텔로 들어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노부부는 프론트에 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비바람이 거세서 길을 갈 수가 없군요. 예약은 안 했지만 혹시 방이 있습니까?’ 숙박부를 통해 이미 객실이 다 찬 것을 확인한 종업원은 주변 호텔에까지 전화로 확인했지만 남은 객실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방을 내줬고 부부는 그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사는 체크아웃하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돼야 할 사람이군요.’ 정확히 2년 후, 신사는 그 종업원을 뉴욕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뉴욕 5번가로 가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같은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호텔은 당신을 위해 내가 지은 것이오.’
그 빌딩은 바로 뉴욕 역사를 상징하는 42층짜리 랜드마크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노신사는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리아였고 그 종업원은 훗날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 애용하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최초 지배인 조지볼트(Goerge Boalt)였습니다. 조지는 늙어 호텔 재벌이 됐지만 죽을 때까지 이 호텔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일화는 호텔리어가 천직인 한 지배인의 몸에 배인 서비스 마인드가 어떤 결과를 불어왔는지 일깨워주는 사례입니다. 서비스업은 유형적인 재화와 달리 무형인 인적, 물적, 시스템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습니다. 호텔은 서비스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업태상 ‘고객이 중심’이 됩니다. 서비스업 중에서 ‘고객이 왕’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입니다”(프라임경제 전지현 기자).
친절은 이처럼 작은 것이 위대한 것을 이루어냅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도 그러한 일을 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친절을 베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친절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교회 안에서나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나 사회에서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친절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친절이 담긴 성경적 친절 교육도 많이 개발하여 보급하고 이것을 잘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친절의 문제를 잘 해결 받아 사랑의 문제도 잘 해결 받고 친절한 사랑의 사람도 될 줄로 믿습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31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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