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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사랑은 아니합니다 (고전 13:4-6)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사랑은 아니합니다 (고전 13:4-6)

 

“넌 사랑이 참 많구나!”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사랑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마음에 와 닿는 대로 머리에 생각이 나는 대로 짐작해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랑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만 하더라도 15가지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이미 말씀드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이고 친절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는 사람이 되고 사랑하면 친절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많은지 적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의 분량을 측정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느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느냐?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참아주는 분량과 친절의 분량에 따라 측정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아주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이 풍성한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안 돼”라는 말은 어감에 따라 다른 뜻이 됩니다. 한동안 인기 있던 “안 돼~”라는 말은 “해보았자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 돼!”라는 말은 “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억양과 어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과 선생님 등으로부터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주로 어떤 것을 말할 때 그렇게 말하지요? 하면 결과가 좋지 않은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할 때 “안 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을 보면 앞에 나오는 두 가지의 사랑은 적극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해줍니다. 오래 참아주는 것과 친절은 좋은 것이기에 자꾸만 더 잘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여덟 가지의 사랑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해줍니다. 이러한 것은 좋지 않은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라고 하는 것을 안 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면 역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할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안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안할수록 좋은 소리를 듣습니다. 안할수록 사랑받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안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여덟 가지의 금지사항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결과와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 여덟 유형의 사람이 됩니다. 본문을 보면 특이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인데 “아니하며”라는 단어입니다. 한글도 원어(‘우’)도 영어(‘not’)도 모두 같은 뜻입니다. “~은 아니다”라고 동일하게 말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여덟 가지의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보았자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좋은 것이 아니므로 조금도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여덟 가지를 행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여덟 가지 유형의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은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4절에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시기하다(젤로오)’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적대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시기하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극도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누가 있습니까? 가인과 에서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형입니다. 그런데 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사랑하면 잘 되기를 바라지만 시기하면 증오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기하지 않으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기하지 않게 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데 시기하겠습니까? 사랑하면 주고 또 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갖지 못하도록 배 아파할 수 있겠습니까? 더 잘 되고 더 잘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사랑하면 “어떻게 그렇게 잘 되고 어쩌면 그렇게 잘하세요?”하고 귀하게 여기면서 박수를 쳐줍니다. 인정해줍니다. 그렇게 하는데 사랑이 깨집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점점 더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셔서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고 박수쳐주는 시기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사랑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4절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한다고 해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만난 것을 간증하고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간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랑하는 목적이 자기를 들어내려고 한다면 관계는 멀어집니다. 속으로 ‘너 참 잘났다. 잘났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순수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조심스럽게 자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루어낸 훌륭한 업적에 대해 자랑합니다.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자랑합니다. 조국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자랑은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자랑은 사랑이 아니라 질투를 불러일으킵니다. 자랑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꼭 자랑하시려면 주 안에서 자랑하시고 조화롭게 절제하면서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가능하면 자기 자랑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4절에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교만하다(퓌시오오)’는 ‘풀무(퓌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부풀리다, 부풀게 하다, 부풀어 오르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부풀어 올라 의기양양해져서 자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만은 풍선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만듭니다. 개구리가 황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배를 불리다가 그만 배가 터져버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난 척하고 교만하면 우리의 인생도 터집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사람을 얻습니다. 교만은 대적을 불러일으키지만 겸손은 사람을 불러들입니다. 교만은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겸손은 상대방을 높여줍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은 낮추고 상대방은 높여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사랑하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5절에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무례하다(아스케모네오)’는 ‘수치스런 행동을 하다, 수치스러운 것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수치스런 행동을 하거나 보기 흉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이 수치스럽게 보이거나 흉하게 보이는 것이 무례한 것입니다. “도가 지나치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상태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도가 지나친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병든 사람을 고치고 예언하고 기적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모습일까요? 물론 그런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삶 가운데서 성령이 충만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 됩니다. 도가 지나치지 않습니다. 말이나 행동에 있어 자세와 태도가 공손합니다. 예의를 지킵니다. 토론할 때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예의가 바르지 못하면 토론에서 이겨도 사람은 잃습니다. 그러므로 무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춘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런던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진종오 선수가 공기총 10미터에서 한국선수단으로는 첫 금메달을 땄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올림픽에 연속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기총을 쏠 때 집중해서 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흡과 맥박을 조절하면서 공기총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쏩니다. 사투리로 ‘털팔이’가 있습니다. 건들거리고 산만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대충 겨누고는 “탕탕” 쏘아버립니다. 그러면 어쩌다 과녁에 맞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허탕입니다. 예선전에 나가지도, 아니 선수도 될 수 없습니다.

 

앞서 네 가지를 안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조금이라도 하지 않아야 할 것들입니다. 조절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편안하게 해버리면 탈이 나는 것들입니다. 진종오 선수가 호흡이 나오는 대로 맥박이 뛰는 대로 숨을 쉬어버리고 조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손이 떨리는 것도 무시하고 총을 쏘았다면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조절하고 절제하였기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사랑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네 가지가 없는 사람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는 앞서 말씀드린 이 네 가지가 없을수록 크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면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가 없는 성도, 이 네 가지를 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네 가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5)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5절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자기의(헤아우투)’는 재귀 대명사로 ‘그 자신의, 그 스스로의’ 뜻입니다. ‘유익’은 해석이 까다롭습니다.  관사 ‘호’인데 ‘이것, 이 사람, 저것, 저 사람’을 뜻합니다. 원뜻으로 ‘자기의 유익’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its ow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심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으로 삽니다.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 보다는 자기에게 맞추라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습니까?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습니까? 그런데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구중심의 사고, 다시 말해 자기중심의 사고입니다. 현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구가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줍니다. 자기의 것을 내세우는데도 사랑이 깊어만 갈까요? 대부분 사이가 깨집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어야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내 입장에서 말을 하고 대한다면 전달이 잘 안 됩니다. 궤도를 벗어난 행성이 충돌하듯이 인간관계도 충돌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면 질서정연하게 되고 평온하게 됩니다. 사랑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것만 주장하고 움켜쥐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6) 사랑하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5절에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성내다(파록쉬노)’는 본래 ‘날카롭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계속 재촉하고 자극해서 화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상대방이 좀 불편해하고 얼굴색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하던 말을 중단하고 하던 행동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밀어붙이면 사랑이 깨집니다. 계속 자극해서 화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을 내지 않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성내게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 집집마다 장독대가 마당 한 편에 죽 늘어서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간장독 된장독 고추장독 등의 크고 작은 장독이 있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 쬘 때는 엄마가 “장독 두껑을 열어 놓거라”고 하셨습니다.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올 것 같으면 “장독 두껑을 닫거라”고 하셨습니다. 대화에 있어서 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면 싸움이 납니다. 상대방 기분이 잔뜩 흐려져 있을 때는 입두껑을 닫고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기분 좋을 때 입을 열어야 잘 통합니다. 그러므로 성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을 성내게 만들지도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7) 사랑하는 사람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5절에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에서 악이 나옵니다. 악이 마음속에 들어 있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 7장 21-23절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이 있습니다.

 

다만 이 악이 바깥으로 나와서 행동에 옮기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악을 절제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녀도 둥지 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폭력물과 음란물을 보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면 사고 칩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잘 되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평생 상처를 주고 자칫하면 목숨도 잃게 만듭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백해무익하므로 악이 나오지 못하도록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악한 생각을 하지 않아서 악을 마음속에 더 집어넣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8) 사랑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6절에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불의(아디키아)’는 ‘의(디카이오쉬네)’의 반대말입니다. 사람은 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사용합니다. 콘트롤하는 것에 따라 자신의 몸을 의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요즘 불의해서라도 자신의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의로움과 공정과 정직이 결여되고 있습니다.

 

전쟁에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의의 병기로 어떤 사람은 의의 병기로 자신을 사용합니다. 불의를 행했는데도 사랑은 깊어만 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손해를 끼치지 유익을 주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는 사랑에 의해 통제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불의와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에 의해 통제 받아 의를 기쁘게 행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시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리면 사랑의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깨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사랑에 의해 통제 받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여덟 가지를 잘 지키는 사랑의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2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32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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