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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마 9:35-36) 예수님께서 오시면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마 9:35-36) 예수님께서 오시면

 

“병든 자여 다 내게로 오라!” 누가 한 말입니까? 예수님, 의사, 그리고 누구입니까? 못 쓰는 고물이나 빈 병을 가져오면 엿으로 바꾸어 주는 엿장수입니다. 우리는 다 고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새롭게 해주십니다. 더러워진 죄의 오물을 닦아 반짝 반짝 빛나게 해주십니다. 찌그러진 모습, 찌그러진 인생을 쫙쫙 펴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 가지 가운데 오늘 본문은 특별히 세 가지를 행하시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세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일, 전파하는 일, 고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정에 들어오시면 가정 안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내 심령 안에 오시면 말씀을 가르침 받게 되고 전파 받게 되고 고침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회도 그렇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께서 임하셨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새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180도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던 자가 복음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모르던 자가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말씀이 절대 진리이며 삶의 기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성경 말씀을 꼭 붙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과 몸과 영혼과 환경까지도 치료받고 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쳐주시고 전파해주시고 고쳐주십니다. 충만하게 임하실수록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에게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행하여주시므로 말씀을 가르치게 되고 복음을 전파하게 되고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쳐주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본문의 마태복음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곳곳마다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세 가지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도 행하셨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보다 분명하게 영접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게 됩니다. 더 멀리는 전 세계, 더 멀리는 다음 미래세대에 사이트나 문서나 영상 등을 통해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일어나는 일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앞서 세 가지 사역을 아무리 거창하게 잘 해도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본문의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시기에 이 세 가지 사역을 훌륭하게 완수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5절에도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교하기 쉬운 곳, 살기 좋은 도시에만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외딴 마을에도 두루 다니셨습니다. 빈부귀천에 따라 잘사는 동네만 골라 다니고 못 사는 동네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예루살렘이든, 사마리아든, 어디든 차별하지 않으시고 두루두루 다니셨습니다. 

 

36절에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었습니다. 양은 스스로 풀이 있는 곳, 물이 있는 곳, 집이 있는 곳을 잘 못 찾습니다. 목자가 이끌어주고 지켜주어야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우왕좌왕하고 사나운 짐승에게 죽기도 합니다. 늑대가 양떼를 습격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목자가 없을 땐 고생하면서 삽니다. 그러므로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가 되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온 힘을 쏟고 계십니다.

 

자신이 가지신 그 모든 것을 주십니다. 사랑하니까, 불쌍히 여기시니까, 그 모든 것을 다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내 것이 없어집니다. 그저 그저 주고 또 주게 됩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주시고 또 주시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오시면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갑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갑니다. 사랑하면 내 것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고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특히 세 가지 사역에 있어서 더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익하게 됩니다. 잘 먹히지도 않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칠 때 그 마음이 잘 전달되고 거기서 진정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리더십의 대가인 존 맥스웰이 말했습니다. “리더십을 평가하려면 그의 머리에 자를 대지 말고 그의 가슴에 자를 대라.”

 

빌 하이벨스는 자기 지도력(Self Leadership)을 확인하는 5가지 방법을 말했습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는가? (2) 뜨거운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았나? (3) 교만이 잠재워졌는가? (4) 과거의 상처들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5)번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자라고 있는가?” 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자라고 있을 때 진정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머리의 크기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크기가 큰 사람이 진정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려고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가르치는 일, 전도하는 일, 고치는 일은 불쌍한 마음이 들 때 힘들어도 온갖 수모를 당해도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고 전도해주고 고쳐줍니다. 시켜서 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런데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힘들어도 자원해서 기쁘게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고 계십니다. 가장 큰 지도력을 가지신 분인 예수님께서 오시면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 31~34절입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불쌍히 여기심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또한 불쌍히 여기심으로 먹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3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그리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르쳐주시고 전파해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불쌍히 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세리와 죄인을 찾아 오십니다. 병들고 힘이 없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겉모습과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합한 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버지도, 형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조차도 형들의 겉모습을 보고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목장일을 누구에게 시키겠습니까? 막내둥이를 보내겠습니까? 들의 짐승도 있고, 도둑도 있고, 일도 힘듭니다. 그렇기에 어린 막내가 잘 못해냅니다. 힘이 좋은 형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내인 다윗이 들로 보내졌습니다. 다윗이 그들의 눈에 보기에 보잘 것 없어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형들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대단해 보였던 형들은 골리앗 앞에서 힘도 한 번 못쓰고 벌벌 떨었습니다. 하지만 약해 보이는 다윗,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다윗은 골리앗과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쓰러뜨리고 이겼습니다.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계시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 앞 9장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2~33절에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27~30절에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23~25절에 죽은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20~22 혈루증이 고쳐졌습니다. 11~12절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필요로 합니다. 6절에 중풍병자가 나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불쌍히 여겨주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지역에,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연약해 보여도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자처럼 보여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고쳐서 쫙쫙 펴주시고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광이 나게 해주십니다. 아무리 겉치장이 화려해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다윗의 허우대 좋은 형들과 같이 맥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사람이 보기에는 별 볼일이 없어 보여도 크게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용서 받지도 구원받지도 못합니다. 구원의 삶, 신자로서 살지도 못합니다. 어둠 속에 살면서도 어두운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습니다. 살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7, 33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누가복음 10장 33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베드로전서 3장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마태복음 9장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장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누가복음 6장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역은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일 중심에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형에 빠지면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쪽이 됩니다. 능력과 열매 가운데 능력이란 외형만 있고 사랑이란 열매는 없게 됩니다. 반쪽 모습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됩니다. 반쪽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다 갖춘 사람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판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평가합니다. 가르치고 전하고 고치는 사역 자체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평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게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쳐도 아무런 상급이 없습니다. 자신이 보기에는 대단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대단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20~23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나안 혼인잔치의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근본적으로 180도 다른 변화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누구에게나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나의 모습이 바꾸어지고 내 안에 가나안의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리게 됩니다.

 

기독교는 실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내 안에 계십니다.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실제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바꾸시고 계십니다.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도 가르쳐주시고, 복음도 전파해주시고, 연약함과 병든 것도 고쳐주십니다. 허황된 말잔치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랑이 가득 찬 기쁜 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이 충만해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실제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보다 충만하게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 아름다운 사역을 사랑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자세로 맡겨진 삶과 직분과 사명을 보다 더 잘 감당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202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394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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