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강해/주일설교

[대강절] (행 1:6-11)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by 이서영 목사 2015. 12. 20.

[대강절] (행 1:6-11)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다시 온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죽어서 무덤에 갇혔을 뿐 아무도 부활하여 승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온 세상의 소망이신 구주 예수님만이 부활 승천하셨고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오늘은 무슨 주일이지요? 주보를 미리 읽어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이란 말이 생소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대강절(待降節)은 대림절(待臨節) 혹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합니다. 대강절(Advent)은 ‘오다’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절기는 성탄 전 4주간 예수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507년 투르 공의회에서 지정되었으며 이때는 성탄 전 40일간 지켰습니다. 하지만 9세기부터 오늘날까지는 성탄 전 4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보다 더 의미 있게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고민도 하면서 은혜 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대강절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한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무엇을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입니다. 이것을 본문의 순서를 바꾸어 본문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할까요?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말한다”는 말을 흔히 듣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좀 부족한 말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하신 것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재림하실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만 말하지 않습니다. 초림하신 예수님과 재림하실 예수님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다시 오시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우리의 생애동안 긴장하면서 계속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 모든 것을 걸고 현실을 위해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그리하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지 않고 이 땅에 쌓아두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귀한 자원을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뜻 깊게 사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정 다시 오시긴 오실까요? 신약 성경 가운데 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운데 재림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로 삼아라”(마 28:19)고 말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마가복음은요?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요? “나를 따르라”(요 21:19)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그 유명한 사 복음서 마지막에 나오지 않으니까 다시 오시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복음서는 복음 자체인 예수님에 대해 소개한 부분이 많습니다. 초림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사정은 달라집니다. 1장에서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합니다. 본문 11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처럼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신약 성경이 사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으로는 무엇이 나옵니까?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가 등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5장 23절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이후에는 히브리서가 나오는데 10장 3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이후로는 야고보서 다음에 사도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후서가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3장 3절에서부터 13절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신약 성경 가운데 사도 베드로 이후로는 사도 요한이 등장합니다. 역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8절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후로는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쓴 유다서를 거쳐 사도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이 나옵니다. 성경책 마지막이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그것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21절 바로 앞 절인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사실을 볼 때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신약 성경은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과 재림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로 끝나고 탄생으로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오셔서 완전히 통치해주셔서 완전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이처럼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통치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까지 죄가 남아 있으므로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교회마다 환경마다 온전하지 못하고 좋지 못한 모습이 간혹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지긋지긋한 죄에서 벗어납니다. 불완전한 모습이 완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속을 완전히 통치해주시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통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서야 비로소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모습 이상이 됩니다. 완전한 통치가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청산해 버려주시고 완전히 통치해주시는 그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시면서 의미 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그 때와 그 시간은 정확하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안다고 하면 탈이 납니다. 이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알려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셨습니다. 본문 7절을 합독하겠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요.” 우리가 몰라도 되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9절에서도 모르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9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모든 것을 훤하게 잘 볼 수 있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볼 수 없도록 가렸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알려고 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하였으니 그것을 알고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는 신비로 두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 버리고 인간의 머리와 수단으로 파헤치고 알 수 있는 신은 이미 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풀 수 없는 신비를 가지셨기에 모든 우주만물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도 신앙생활에 지장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알 것을 알지 못하고 궁금한 것만 알려고 하면 이단의 성경공부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알고 있는 말씀을 더 잘 지키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와 시기에 관해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 지식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세 안에 두신 것이다. 그 이외 아무도 장차 올 때와 시기를 계시할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 자신도 그 시간을 모르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래서 세상 마지막 때와 다시 오실 날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을 말씀해주시지 않으시고 다만 징조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때를 정해놓고 하나님이 맞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계에 우리의 시간표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때까지 살 수 있겠습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림의 때와 시간은 잠시 제쳐두고 그 때와 시간을 우리 일생 동안인 것으로 교훈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언제 강림하셔도 우리는 거리낌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때를 알면 나쁜 짓을 하다가도 딱 멈추고서는 회개하면 되겠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종말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이 올 때를 모르기 때문에 기름을 미리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도 나옵니다. 언제 돌아와서 회계할지 모르니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가서 최선을 다해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도 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판단기준은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나눠주고 나그네를 돌보고 병든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아보는 여부에 따라 구분하십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와 시간은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와 시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별력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오셔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말이 언제 끝이 날지 몰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셔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는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동안 우리의 가진 것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시길 바랍니다.

    

3. 무엇을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할까요?

 

기차를 기다릴 때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지루합니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면 정말 지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지루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히 사모하는 분은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있어서는 “지루하다”는 표현보다는 “설레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본문 6절을 합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 즉 현실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우리 역시 현실 세계에 대해 관심이 더 많고 회복하는 것에 대해 기대하면서 살 때가 많습니다.

 

본문 10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천사들이 11절 상반절에 말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콘라드 겜프(Conrad Gemp)는 11절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콘라드 겜프의 의도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초점을 두면서 그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현실 나라를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지는 몰라도 콘라드 겜프는 존 스토트(John Stott)가 사도행전을 강해한 것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땅 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크게 모순된 일이었다.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점성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 세계를 무시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반대로 현실 세계를 너무 중시해서 현실 세계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현실 속에서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이 본문 8절에 나옵니다. 합독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현실의 나라를 회복하시는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시려나?” 제자들은 현실 세계를 갈망했기에 예수님께서 속히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다리라고 천사는 말하였습니까?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 보느냐” 매튜 헨리는 이것을 “너희가 무엇을 보고자 하느냐”라고 주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확실한 명령을 받았으니 속히 가서 명령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제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우리도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일거리인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97 담임목사 이서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