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4:9 강해설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과 행복을 누리려면 자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도는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의 의미가 결정되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기의 백성을 지극히 아끼시고 사랑해주셔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하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다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부분적으로 돌이켜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시고 자기 자신을 드리셔서 회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새 창조를 통해 온전히 회복되어 온전히 함께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새로워져서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이러한 사랑과 행복의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드라마를 통해 모든 것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마무리지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자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 가운데 오늘 말씀드릴 주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선택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창조와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의사대로 결정해버리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령하셔서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창 2:16-17) 먹어버린 것입니다.
여자가 열매를 따서 먹고는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어 남편도 함께 먹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좋지 않은 일에는 함께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에 부부가 일심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서 먹게 되자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자 불행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죽게 될 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이 시작되었기(창 3:16-19)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내포된 원시복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뱀에게 여자의 후손과(창 3:15) 원수가 되게 하신다는 것과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창 3:21) 지어 입혀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타락하였으나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손길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루어져 오고 있으며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해주시려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끝끝내 이러한 호의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창 6:5)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시대에 이르러 홍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불의한 가운데서도 노아는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창 6:9)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또한 창세기 7장 5절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후로도 결국은 또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바벨탑 사건을(창 11:1-9) 비롯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롯의 두 딸을 마다하고 동성 간에 상관하려는 소돔 성 사건을(창 19:1-11)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을 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끈질긴 구원의 손길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해주시자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습니다(창 12:1-3).
그럴 때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2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서 구십구 세인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크게 번성하게 해주시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시고, 심히 번성하게 하셔서 민족들이 나오게 해주시고 왕들이 나오게 해주시고,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해주시고, 나는 그들의 여호와가 되리라고 하시는 언약을(창 17:1-8)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인 할례를 하라는 언약도(창 17:9-14) 주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 23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고 구원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자기를 잘 다루지 못한 것과 잘 다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우선하다보니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를 잘 다루지 못해 죄를 짓게 하고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노아와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것을 우선으로 여기고 그대로 행하므로 자기를 잘 다루어서 회복하도록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출애굽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대로 아브라함 이후 크게 번성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매우 강하고 온 땅에 가득하게(출 1:7)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타나게 되자 그러한 이스라엘 자손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어려운 노동으로 생활을 괴롭게(출 1:11-13)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출 2:23-25) 돌보게 되셨습니다.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서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도록(출 3:7-10) 하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신 것을 대신하여 말하게 될 아론 형에게 알렸습니다.
출애굽기 4장 28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그리하여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 왕이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고 출애굽을 허락하게(출 12:31-32) 되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유월절을 지킨(출 12:21-28) 이스라엘 자손은 마지막 재앙을 당하지 않고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2절입니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애굽한 이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것을 모세가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것을 백성의 장로들에게 진술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7절입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이후에 살아가야 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들을 이렇게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입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살다보니까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이 하루 만에 죽게 되는(출 32:28)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은 계속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보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해서 두 증거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출 32:19).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를 부르셔서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두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출 34:28).
모세가 이 두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2절입니다.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이러한 것을 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살면 언제든지 금송아지 사건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살고 그러기 위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잘 다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스라엘 나라와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에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3장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그리하여 심판을 받게 되고 그런 이후에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되지만 또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8장 34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던 것은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또한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실상은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하신 여호와를 왕으로 여기지 않고 왕이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왕명을 어기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왕을 세워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왕이신데 그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무엘상 8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를 버리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여호와의 크신 사랑과 긍휼하심과 인자하심과 인내하심을 볼 수 있으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못마땅한 요구를 하였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셔서 사울 왕을 세워주셨고 이후로 다윗 왕을 세워주셨습니다.
사무엘하 5장 12절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부족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불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이스라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세워주신 왕을 중심으로 해서 나라가 크게 번영하게 되었습니까? 이 역시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왕을 세워도 참된 왕이신 여호와의 통치를 벗어나게 되면 살 길이 막히게 되고 나라마저도 위태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뿐인 신정국가가 된 이스라엘 나라는 결국은 패망하게 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는 황폐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어느 나라나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부분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소견대로 살다가 패망하게 된 것을 보게 되기도 하지만 유월절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 6장 20절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또한 여호와의 말씀도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이러한 부흥이 일어나긴 하였지만 부분적이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여호와를 등지다가 결국은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패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6절입니다.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심판을 자초해서 포로가 된 가운데서도 자기를 경건하게 지키고 하나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섬긴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잘 다루어서 총리까지 오르게 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1장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제국을 다스리다가 한껏 교만해졌으나 하나님께서 낮추시므로 그때서야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5장 21절입니다.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사람이 자기 멋대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왕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세운 왕들과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모르신다고 하시고 자기를 위하여 만든 우상도 결국은 파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8장 4절입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왕궁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세우더라도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 8장 14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왕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또한 나라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과 관련된 일도 마찬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바라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자기 집에 쌓지만 그러한 것을 모두 불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학개 1장 9절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이렇게 여러모로 여호와를 거역하여 화를 자초하게 되지만 회개하여 돌이키면(욜 2:12-17)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엘 2장 18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나훔 1장 7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고 피하는 자들에게 산성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스라엘 나라가 멸절되지 아니하고 남은 자들을 통해 영속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여호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시겠습니까?
말라기 3장 17절에서 여호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것을 아끼고 주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쏟아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체가 앞으로 말씀드릴 하나님의 귀하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후로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기 백성을 자기의 백성의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것을 움켜쥐시고 자기 목숨을 자기 백성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다면 죄에서 구원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처럼 자기 것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욕심내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이른바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보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자기를 희생해주셨으므로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고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모든 관계가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죽이고 빼앗는 도둑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는(요 10:10) 선한목자가 되셔서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셔서 양우리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렇게 해주시는 예수님은 어떠하신 분이십니까?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러하신 예수님이시므로 자기 사람들을 위해 할 수만 있으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마 26:39) 하실 정도로 참혹한 십자가이지만 기꺼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이렇게 된 것은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시므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7-8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흘려주시고 죽어주시므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다가 범하게 된 죄를 영원히 속죄해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러한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성경에 자기에 관해 쓰인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처럼 성경이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에 관한 감동의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것을 내세우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것을 희생하시고 아낌없이 주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창조와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창조해주신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하다가 타락한 아담과 하와 이후에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주는 욕심에 복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자기의 욕심에 따라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온갖 시험입니다. 걸핏하면 시험에 잘 드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 살아가려는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러한 가운데 처해 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일서 4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므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살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해주시고 모든 것이 살아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끝없이 주셔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할수록, 그러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실수록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창조의 모습대로 아름답게 바뀌게 되는데 새 사람을 입게 되면 그러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세상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온전히 새로워진 새 사람을 온전히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주셔서 함께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십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렇게 오셔서 이루어지게 되는 곳은 어떤 곳이 되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위하도록 속여서 인류를 궁지로 몰아넣은 악한 원수 마귀와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분리배출 되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은(계 2:2) 곳입니다. 이곳에는 어떤 분이 계십니까?
이곳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십니다(계 21:3).
이와 같으므로 이곳에는 자기를 위하여 살다가 자초하게 된 화와 저주와 사망과 고통과 아픔과 눈물과 애통과 슬픔이 없습니다(계 21:4).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끈질기고도 지극하신 손길로 말미암아 만물을 새롭게 해주시고(계 21:5) 이 모든 좋은 것을 상속 받게 해주신(계 21;7) 것입니다.
그리하여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다해 함께 영원히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말씀드린 “자기”와 관련된 구절을 보면서 성경은 어떤 책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성경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더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중한 것을 주셔서 함께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고 살아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2018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cafe.daum.net/truegooddisciples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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