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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강해설교

(요 14:6 강해설교) 내가 곧 길이요(1)

by 이서영 목사 2018. 11. 4.


(요 14:6 강해설교) 내가 곧 길이요(1)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 자동차가 다니는 길, 배가 다니는 길, 비행기가 다니는 길, 우주선이 다니는 길 등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이러한 길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착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집이나 직장이나 차고나 항구나 공항이나 우주정거장 등이 있습니다. 무한정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가 길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단교주가 자신이 길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길로 가게 되면 그 끝은 어디이겠습니까? 어떤 곳에 도착하게 되겠습니까? 철썩 같이 믿고 따라갔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천국으로 가게 하는 길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있는 지옥으로 가도록 하는 가짜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길은 어떤 길입니까? 예수님께서 참된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ej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나이다)”라는 자기선언방식을 통해 선언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는 나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나는 나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나는 길이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길이므로 아버지께로 올 자는 오직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복음서 가운데 길과 연관된 구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하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설교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설교를 하셨는데 그 가운데 길과 연관된 설교를 보면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갈 때 신속하게 즉시 화해하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해하지 않고 길을 계속 가도록 내버려두면 재판관에게 도착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화해하는 것이 그만큼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리고 “”과 연관된 설교를 하나 더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4절의 “협착하여”의 원어원형은 “qlivbw(들리보)”인데 “압박하다, 억압하다, 괴롭히다, 좁다”라는 뜻입니다. 수동형이므로 길이 압박 받게 되고 억압 받게 되고 괴롭힘을 받게 될 정도로 비좁고 험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고 많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적은 사람이 선택받았다는 것인데 그 안에 들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해주시므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하시고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이후로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는데 무덤이 있는 길로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는데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므로 아무리 많은 군대귀신이라고(눅 8:30) 하여도 깔끔하게 모조리 내쫓아주셨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셔서 쫓아내주신 것입니다.


귀신이 있는데도 잘만 되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이고 빼앗는 귀신이 들어오면 건강도 재물도 좋은 관계도 빼앗아가고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그렇게 해버리니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빼앗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깨뜨리려고 하기에 귀신은 있으면 있을수록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귀신은 쫓아낼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귀신의 일을 멸하여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나타나신(요일 3:8)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장면은 예수님께서 길에서 아무 소리를 듣지 않게 되시는 분이시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논쟁이 있더라도 맞대응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떠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옳으냐고 하였을 때 흥분해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한 가운데 교훈해주시고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죽이려고 의논하자 이를 아시고 그곳을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고 하신(마 12:18-21) 것입니다. 그 가운데 19절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이처럼 안식일인데도 아파서 안식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셔서 안식하게 해주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다툼하시거나 언성을 높여서 논쟁을 하시기보다는 안식을 필요로 하는 병든 사람을 고쳐주셔서 말뿐인 안식이 아니라 실제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가면 병든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병을 짊어지시고(마 8:17) 채찍에 맞으시므로 나음을 얻게 되었으므로(벧전 2:24) 모두가 온전히 고침을 받게 되었기에 병든 사람은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 큰 무리가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해변에 서 있는 무리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길 가와 흙이 얕은 돌밭과 가시떨기 위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마 13:4-8)입니다. 그 가운데 길 가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인데 마태복음 13장 4절입니다. “뿌릴새 더러는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러한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해주셨는데(마 13:19-23) 말씀이 결실하는 것에 대해 교훈해주셨습니다.

 

길 가에 떨어진 자는 천국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것은 악한 자가 와서 뿌려진 것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가에 뿌려진 자요.”


이어서 돌밭에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나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이고(21), 가시떨기에 떨어진 자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이고(22), 좋은 땅에 떨어진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인데 결실하여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가 된다고(23) 하셨습니다.

 

얕은 돌밭은 세상이 박해하는 등으로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가시떨기 위는 세상이 발전해서 소득수준이 높아져서 많이 벌어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지 흔들리지 않고 결실하지 못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고 끝까지 순종하여 결국에는 풍성하게 결실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사흘이나 되었으므로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길에서 기진할까 해서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32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몇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주셨는데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둘 정도로 풍성하게 먹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출애굽할 때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만 육십만 명인데(출 12:37)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에서 만나로 사십 년을 넉넉하게 먹여주신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을 상상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그 어마어마한 천국 백성이 모두가 맛있게 풍성하게 사십 년이 아니라 영원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공급해주시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비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을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하게 된다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2-13절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러한 비유는 전도에 적용해도 되기 하지만 그것은 이차적인 적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크다는 것이고, 길을 잃은 작은 자를 찾는 자가 크고, 형제를 용서하는 자가 크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에 대한 비유를 전도에 적용하려면 누가복음 15장을 적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을 의미하고 있는데 잃은 양을 찾은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와 잃은 아들을 되찾은 비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 18장에서의 잃은 양은 소외된 작은 자를 잃지 않고 찾아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아프고 마음 아파하고 사는 게 힘들고 괴롭고 답답해하는 처지에 있는 작은 자를 찾아서 섬겨주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힘 있고 덕을 볼 일 있는 사람이라면 기를 쓰고 찾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사람들을 찾기보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무런 힘도 없는 작은 자를 찾아서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에서 이르시되.”


길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20장 18-19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넘겨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넘겨지지 않으실 권능이 있으시지만 힘을 다 쓰지 아니하시고 순순히 넘겨지시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시고 부활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반드시 이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고 그만큼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게 되는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사망과 죄와 저주와 화와 악한 영을 떨쳐버리게 해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해주시고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주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므로 참된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막혔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길이 열려서 그 길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가게 되었고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맹인 두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소리를 질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 30절입니다. “맹인 두 사람이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여도 더욱 소리를 질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자 그들이 눈 뜨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머물러 서서 그들의 눈을 만져주셔서 곧 보게 해주셨습니다(마 20:31-34).


앞을 못 보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데 곧 보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고쳐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자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입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에 펴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이사야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것을 이루려고 하신 것인데 왕이시지만 겸손하시다는 것을 나타내신(마 21:4-5) 것입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하듯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웅장하고 힘 있는 백마를 타지 아니하시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만큼 겸손하시다는 것입니다.


구유에서 탄생하셔서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리하셔서 낮아지심으로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고 결국은 오히려 가장 높아지게 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처럼 교만하여서 끝까지 죽지 않고 군림하려고 하고 자기를 내세우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구원과 영생과 천국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심으로(빌 2:8) 인류를 구원하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하게 되신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께서 혼인잔치 비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혼인잔치에 비유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종들을 보내 오찬을 준비하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시라고 초청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는(마 22:4-6) 것입니다.


그러자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하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다는(마 22:7-10)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9-10절입니다. “네거리 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러한 혼인잔치를 보면 초청을 해도 아예 응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긴 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마 22:11-12)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마지막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시는 것을(마 22:14)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쓴 『한눈에 보는 마태복음』(퍼플, 2018) 287-288페이지를 보면 이에 대해 해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청함을 받았으나 오지 않은 자도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함을 받아 데려옴을 받았더라도 예복을 입지 않으면 역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일 때문에 아예 교회에 오지도 않는 사람과 교회에 왔더라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바깥 어두움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복”(11, 12)은 어떤 옷을 의미하겠습니까? 옷으로는 세마포 옷이 있는데 성도들이 입게 되는 의로운 행실의 세마포 옷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옷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는데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를 보면 천사가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계 19:7-9).


본 단락에서 볼 수 있는 혼인잔치 비유와 매우 비슷한 상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복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면 비록 혼인잔치에 왔더라도 바깥 어두움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9장 말씀에서 가리키는 성도들의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행실로 단장하는 행실의 예복이므로 본 단락에서 의미하는 예복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예복에는 또 다른 의미의 옷이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의의 예복을 뜻합니다. 혼인 잔치에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10)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악하고 선하고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예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예복은 성도들의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혼인잔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요한계시록 7장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입게 되는 어린 양의 피로 희게 씻은 옷(계 7:2-14)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침을 받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입게 되는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의 문맥상으로 볼 때 택함 쪽에 더 비중을 두어 의의 예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기와 같이 책에서 쓴 것을 포함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전도를 해도 교회에 오지 않은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전도를 받아 교회에 왔더라도 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를 택하여주셔서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먹보다도 더 검은 죄를 깨끗이 하얗게 씻어주신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한 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태복음 가운데 길과 연관된 구절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018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cafe.daum.net/truegooddisciples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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