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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강해설교

(요 14:6 강해설교) 내가 곧 길이요(2)

by 이서영 목사 2018. 11. 11.


(요 14:6 강해설교) 내가 곧 길이요(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난 주에는 마태복음 가운데 길과 연관된 구절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에는 마태복음에 이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가운데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길과 연관된 구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에서 그러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잘랐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누가복음 6장 1절에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먹었지만 어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막 2:24) 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합법적이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인데 안식일에 노동을 하였기에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철썩 같이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안식일에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막 2:28) 시장한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준 것을 예로 드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막 2:25-27) 하셨습니다.


배가 고프고 헐벗어서 안식을 누리지 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러한 것을 해결 받아서 안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주일에 교회당에서 거룩하게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주일에 배고픔과 같은 것을 해결해주는 선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27절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는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라고(막 8:28-29)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시고(요 1:41, 4:25) 세상의 구주이신(요 4:42)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주 곧 그리스도이시므로(눅 2:11)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해주시는(마 1:21)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길에서 서로 논쟁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러한 말씀에 제자들이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잠잠하였는데 그것은 길에서 누가 크냐고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34절입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첫째가 되려고 하면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막 9:35) 하셨습니다.


논쟁을 한다고 해서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자기가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만큼 오염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것으로는 처방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낮아져서 섬길 때 높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세상이 그만큼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꾸로 된 세상과는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세상과는 역설적이지만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길과 연관된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굻어 앉아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사람은 여러 가지 계명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킨(막 10:19-20)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시고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막 10:21)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간 것을(막 10:22)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여전히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극복해야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땅에 재물을 쌓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게 쌓아놓아도 하늘에는 전혀 쌓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고 근심하게 될 정도로 자기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재산이지만 팔아서 나누어줄 때 비로소 하늘에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막 10:27)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초대교회를 보면 사도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을(행 2:43, 45)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게 되자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밭과 집 있는 자가 팔아서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자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바나바도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것을(행 4:33-37)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가복음 가운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 어떤 율법사가 찾아와 시험하는 가운데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길에서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는데 그 사람을 대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제사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역시 피하여 지나갔습니다(눅 10:32).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하게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튿날 돈을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눅 10:30-35)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이므로 가서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을(눅 10:36-37)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볼 때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거나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극 나서서 도와주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으로 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입니다. “그들이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께서 집으로 오시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다는 예수님께 혼자 일하지 않도록 도와주라고 말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고 빼앗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눅 10:39-42) 볼 수 있습니다.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육체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영혼의 양식인 예수님의 말씀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양식이 모두 필요한 양식이지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고(마 4:4), 살리는 것은 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고(요 6:63), 영혼이 잘 될 때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기(요삼 1:2)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길과 연관된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으나 눈이 가리어져서 알지 못하자(눅 24:16)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은 예수님이신 것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에 대해(눅 24:19-24)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관해 쓴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눅 24:27).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자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밝아져서 알아보게(눅 24:30-31)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길에서 말씀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길에서 일어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자 알려지게 되신 것을 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5절입니다. “두 사람도 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처럼 예수님은 육의 것을 보게 하는 육신의 눈도 뜨게 해주시지만 이보다 더 크고 더 귀한 일인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가운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에 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6절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므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않는데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의아해 하는 것을(요 4:7, 9)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과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구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하시자 여자가 물을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서 그러한 생수를 얻겠는지에 대해 여쭈는 것을(요 4:10-11)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물의 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하시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런 물을 내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여기에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주시기를 말씀드리는 것을(요 4:13-15)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요 4:16-18)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하시자(요 4:26) 비로소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시라고(요 4:28-29) 전했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 영의 눈을 뜨지 못하면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므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유명한 안과에 가도 해결 받지 못하는 것을 해결 받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 다음 장면은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동네를 떠나셔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는데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요 4:46-47)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려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드리자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요 4:47, 50)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갔는데(요 4:50) 내려가는 길에서 그의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 51절입니다. “내려가는 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낫기 시작한 때를 물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인 것을 알고는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게 되는 것을(요 4:52-53)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거의 죽게 된 불치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시지만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게 된 그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집안이 믿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행전 16장 19-34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려서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감옥의 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죽으려고 하였는데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우리가 다 여기에 있다고 하자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럴 때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그 밤 시각에 자기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온 집안이 믿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도 여전히 이러한 역사를 통해 믿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를 알 수 있으며 우리 각자의 믿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길과 연관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라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4절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해주겠다고 하신 다음에(요 14:1-3) 이러한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예수님만이 길이 되시기에 아버지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이라고 주장하고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님 이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아무리 다른 길을 찾고 다른 길이 있다고 애를 써서 주장하더라도 더 이상 다른 길은 없고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쓴 『한눈에 보는 요한복음』(퍼플, 2018) 319페이지를 보면 이에 대해 해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는 길을 너희가 안다고 하셨으나 앞서 살펴본 시몬 베드로처럼 도마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길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시므로 예수님을 통해 종착지인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고 실제로 “ej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나이다)”라고 자기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속이려고 말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께 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셔서 아버지 집에 영원히 거할 처소를 마련해주시고 가게 해주시고 거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상기와 같이 책에서 쓴 것을 포함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하의 사람 가운데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복음서 가운데 길과 연관된 구절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으며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와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하신 예수님을 믿으시고 영원무궁하도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 알게 해주신 교훈을 그대로 믿으시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 2018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cafe.daum.net/truegooddisciples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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