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1:4-9) 장대 위의 놋뱀을 보니 살더라 ③-②
[성경강해 20200301 참좋은제자들교회 이서영 목사]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성경강해한 것입니다.
원고: 은혜의 동산 http://blog.daum.net/logosbibleinstitute/4596
영상: 은혜의 동산 https://youtu.be/Roo4fy8dOZ4
[강해설교 원고] [③-② 시작하면서] 야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입니까? 야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9회 말에 역전승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극적인 역전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 말씀 가운데 이러한 극적인 역전이 일어난 것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민 21:4-9)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두 세 가지 주제인데 오늘은 그 가운데 두번째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두번째 주제는 장대 위에 무엇을 매달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놋뱀을 어디 위에 매달았다고 하였습니까? 장대 위에 매달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장대 위에 매달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장대 위에 매달아라”고 하셨기에 모세가 말씀에 순종해서 장대 위에 매단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만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순종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쓸데 없는 일을 시킨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는 무시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니면 놋뱀을 매달기는 매달았는데 자기가 사는 천막 위에 매달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엄청난 화를 입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계속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게 되므로 화를 불러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씀 없이 사는 것도 위험하지만 말씀이 있어도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읽고 묵상하고 믿고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손해볼 텐데 별 것을 다 하라고 하네’라고 하면서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사상과 탐욕과 기호에 맞도록 변질시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보면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기준보다는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면 장대 위에 매달면 되는데 ‘하필이면 왜 장대 위에 달라고 하지’라고 하면서 자기가 매달고 싶은 곳에 매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잘 될 것 같았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뒤따라주지 않으니까 잘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 순종에 대한 보상이 없으니까 잘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보장된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으므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은 말씀대로 따라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토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사람의 생각을 집어넣어 해석하거나 변질시키지 마시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믿으시고 있는 그대로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힘든 것은 빼고 편하게 살려고 이런저런 이유를 달거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힘쓸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믿고 잘 지키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무엇에 대해 말씀드렸습니까? 놋뱀을 장대 위에 매단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이유도 있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숨은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장대 위에 단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죄에서 거룩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집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십자가를 상징하는 나무들을 통해 극적인 일들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마라에서 일어난 일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25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인도해서 사흘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에 물이 있긴 했지만 써서 마시지 못해서 그곳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셔서 모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15장 2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이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쓴 물이 어떻게 단 물로 변할 수 있겠습니까? 약품으로 처리한다고 되겠습니까? 아니면 초대형 정수기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이러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원망하지 않고 단물로 바꾸어 벌컥 벌컥 시원하게 마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기에 원망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아마 며칠 물을 마시지 못해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한 나무를 통해 대역전극을 펼쳐진 것입니다. 써서 마시지 못하던 물이 확 바뀌어져서 단 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역전극이 우리 인생 가운데 일어나게 되면 쓴맛 인생이 살맛나는 단맛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쓴 신앙생활과 사역이 단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 6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집을 지을 나무를 베다가 쇠도끼를 그만 물에 풍덩 빠뜨렸습니다. 빌려온 것이어서 탄식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가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물에 가라앉은 쇠도끼가 떠오른다? 있을 수 있습니까? 현대에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들어가니까 떠올랐습니다. 가라앉은 우리의 위기 상황도 얼마든지 떠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죄에서 건져 내주시고 지옥에서 건져 내시는 것을 떠올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두번째 주제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놋뱀을 어디 위에 매달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장대 위에 매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장대 위에 매달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숨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놋뱀을 장대 위에 매단 것은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무 장대는 역전의 장소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성경에서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에스더 5-7장을 보면 기가 막힌 극적인 대역전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만과 모르드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에스더 5장 14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무 장대입니다.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했다가 오히려 자기가 매달려 버린 것입니다. 에스더 7장 10절입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이러한 대역전극이 일어나게 되는 곳이 바로 장대 위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다가 살아나게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 장대는 마냥 좋은 곳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그곳은 처참한 비극의 장소입니다. 끔찍하게 처형을 당하는 곳입니다. 요셉이 바로 신하의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듣기에 좋지 않은 해석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0장 19절입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이러한 나무 처형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8장 29절입니다.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수아 10장 26-27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죽여 다섯 나무에 매달고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채로 두었다가, 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령하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들이 숨었던 굴 안에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까지 그대로 있더라.” 신명기 21장 23절에서는 처형 후에 나무 위에 밤새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어떻습니까? 십자가가 목걸이나 강대상 장식용 정도로 여겨집니까? 사형대인데 무엇이 그렇게 좋겠습니까?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곳이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매달리시면 상황이 역전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장소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처리되어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시므로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5-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러하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저주를 역전시켜 처리해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놋뱀처럼 자신도 십자가에 들려야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십자가에 들리실 때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놋뱀처럼 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장대 위에 왜 어린 양을 달지 않았을까요? 놋뱀을 단 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면 장대 위에 유월절 어린 양처럼 어린 양의 형상을 달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린 양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뱀의 형상을 만들어 매달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와 죄값에 대한 죽음과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죄와 죄값을 불뱀으로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한 불뱀에게 물린 것을 치료해야 하기에 불뱀 모양을 만든 놋뱀을 매달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놋뱀에서 “놋”의 히브리어 원어의 원형은 “נְחֹשֶׁת(네호세트)”인데 “청동, 놋쇠”를 뜻합니다. 이러하므로 놋뱀은 놋쇠로 불뱀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백성이 짓고 처벌은 예수님께서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뱀인 사탄이 매달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불뱀이 상징하는 사탄이 패배하게 되고 멸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가룟 유다와 사람들을 부추겨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았지만 결국은 자신이 매달리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은 마치 하만과 모르드개처럼 예수님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라는 대역전극이 펼쳐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뱀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패망하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3장 14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출애굽기 7장 12절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오늘 본문인 민수기 21장 9절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욥기 26장 13절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시편 91편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이사야 27장 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누가복음 10장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요한계시록 20장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이처럼 뱀인 사탄은 결국은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이 땅에서 설치고 다녔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탄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사탄을 따르는 추종자들인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수많은 사람들도 잠시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맙니다. 종말에도 대역전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 지옥과 천국으로 갈리게 됩니다. 성도들이 마치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여도 대역전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7-8절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러자 그들이 서로 기뻐하고 예물을 보내기도 합니다. 11장 9-10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마치 끝장이 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대패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역전극이 일어납니다. 11장 11절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1장 12-13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장 9-10절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겨 놓은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야구경기에서는 9회 말 역전승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역전이 된다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주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놋뱀을 왜 장대 위에 매달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이 중요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숨은 이유도 있습니다. 장대 위에 단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놋뱀이 매달리고 예수님께서 매달리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대역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옛 뱀인 사탄에게 물려 죽어가던 우리가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이고 빼앗으려던 사탄이 오히려 패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나무로 말미암아 역전이 일어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나무가 들어가자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고, 물에 빠져 가라앉은 쇠도끼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자가 매달리는 비참한 처형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매달리시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역전의 장소가 됩니다. 사탄이 패망하게 되는 곳이 됩니다. 죄값을 처리하시고 죄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곳이 됩니다. 이와 같으므로 장대 위에 선한 어린 양을 매달지 않고 범죄하여 물린 불뱀의 모양을 한 놋뱀을 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인 사탄을 처리하시고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놋뱀을 상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대 위의 놋뱀처럼 극적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저주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매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과 헌신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굳게 믿고 바라보셔서 죽어가는 모든 영역이 되살아나는 대역전의 역사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대역전을 시켜주시는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역전을 일으켜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니,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죽음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사탄 마귀에게서 벗어나게 해주시니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장대 위의 놋뱀처럼 극적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저주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매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다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한 잘못을 용서해주옵소서. 또한 우리 주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데, 저희들의 사상과 생각대로 살아온 것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 돌이켜 간절히 회개기도드리오니, 그동안 돌이켜 기도할 때 회복시켜주신 것처럼,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총체적으로 큰 위기에 빠진 저희들의 모든 영역도 되살아나게 해주시옵소서. 이후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면서 살고 헌신하면서 살기를 원하오니, 크신 능력으로 역사해주셔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게 해주시옵소서. 역전의 하나님이시여, 그리하셔서 우리의 삶과 사역 가운데 대역전극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이를 통해 우리 주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셔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대역전시켜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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