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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행복한그리스도인

[행복한 그리스도인] 제3장 내면의 치유

by 이서영 목사 2020. 3. 31.

[행복한 그리스도인] 제3장 내면의 치유

 

[3] 새롬 커피숍에서

 

3부는 두 친구가 새롬 커피숍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우정을 훈훈하게 나누면서 치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인데 내면의 치유를 받기 위해 애쓰는 장면입니다이를 통해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내면의 치유를 함께 받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장별 주제
3 내면의 치유

 

 

 

3장 내면의 치유

  

3장 개요

 

3장은 내면의 치유에 대한 것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란 치유의 사람을 의미하는데 자아가 치유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상한 자아가 치유를 받게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유를 받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치유를 받게 된 행복한 그리스도인을 통해 가정이 치유되고 교회도 치유되고 나라도 치유되고 민족과 세계 열방도 치유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충만이와 반석이란 두 친구를 등장시켜 성경구절과 이경순이 쓴 분노에 묶인 사슬을 끊고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소설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3장 내용

 

두 사람이 함께 시냇가 역에 도착했다.

 

충만이는 조심스럽게 가방에

손을 넣었다 빼내었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반석이는 난처해하는 충만이의 모습에,

충만아, 너 무엇 때문에 그래?”

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때서야 충만이가 안심하면서 반석이에게 말했다.

  

사실은 나도 좋은 책을 가지고 있어서 

네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네가 먼저 보여 주어서

그냥 있으려고그랬어.

 

그렇지만 헤어지기 전에 네게 꼭 보여주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그렇다면 꼭 봐야지.”

 

그럼, 좀 늦었지만 저기 있는 새롬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먹으면서 읽어 보자.”

 

반석이의 호의에 충만이는 감동이 되었다.

 

반석아, 정말 우린 멋진 친구야. 너무 고맙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사이가 새로워지고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게 될 줄로 믿어.”

  

각자 자기 집에 전화하느라 잠시 동안 소란해졌다.

 사람이 전화 통화를 끝내자

새롬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충만이는 반석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가방에서 책을 꺼내 반석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경순이 쓴 분노에 묶인 사슬을 끊고라는 책이었다.

  

반석이는 밑줄 친 부분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고 예비해놓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시키신다.

 

상처받은 그 부분들을 하나님께 치유 받을 때

다시 완벽한 작품으로 재창조된다.

아무리 걸작품이라도 흠집이 나면 아무 소용없다.

 

인간도 하나님 앞에 고침 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모든 사람들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

  

치유 받지 못하고 내 마음이 아프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아픈 것만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두 마음이 있다면

사랑에 허기진 마음과 버려진 마음이다.

 

이 마음들은 상호 반대 작용을 해서

같이 있을 수 없다.

한 마음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다른 한 마음은 구심력으로서

멀어지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두 마음이 서로 잡아당겨 찢어진 마음,

곧 깨어진 마음( 2:13)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와 같다.

  

원심력은 끌어당기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를 가슴 속에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깨어진 그곳에

사랑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다.

  

그래서 공허하고 끊임없이 허기진 사람처럼

무언가를 자신에게 채우려고 세상으로,

교회로 헤매고 다닌다. 안정감이 없다.”

 

여기까지 읽은 반석이는 놀라워했다.

안정감 없이 헤매고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훤히 알고 있듯이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말했던 것과 중복되는 점도 있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내적인 치유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읽어 나갔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하나님도 우리 속에 내재할 수도 없게 됐다.

인간의 마음을 채워주었던 하나님의 사랑도

자동적으로 철수됐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웠던 인간의 마음에

자신이 뚫어놓은 웅덩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 부분을 채우려고

끊임없이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사랑으로 가슴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 속엔 만족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슴이 채워질 때

 

치유 받아 찢어진 상처가 꿰매어지고

아문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므로

우리 속에서도 사랑이 나갈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사랑의 박탈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구심력이 강한 사람이 있다.

잠재의식 속에서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동하지만

역반응으로 나타나는 경우다.

  

성장과정에서

강력한 억압과정을 통해 눌려 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부모와 웃어른들의 지나친 억압으로

어른들과 대화가 단절되어

엄격한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신의 의사표현이 거부되고

참견하는 것으로 치부되어

눌려서 자라온 사람들은

  

성장해서 직장에서나 교회,

어느 단체에서도 윗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데도 망설여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다.”

 

반석이는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옆에 앉아 있는 충만이의 존재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차를 무엇으로 드실래요?”

라는 웨이터의 목소리에 그때서야 겨우 고개 들었다.

  

아참, 충만아, 우리 뭘 마실까?”

 

그들은 오늘 이 순간만이라도

서로가 한 마음이 되고 싶어 커피로 통일시켰다.

커피를 주문하자마자 반석이는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다시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멈칫거린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르게 해야만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다.

 

개인 개인이 병들어 있을 때 가정이 병들어 간다.

마찬가지로 개인 개인이 치유를 받을 때

병든 가정이 회복된다.

 

가정 하나가 회복되면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가정도 회복되어 간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먼저 치유 받아야 한다.

많은 아픔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치유 받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치유함을 나눌 때

교회가 치유 받고, 이웃이 치유 받고,

이 나라가 치유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한 영혼을 바로 잡으면

다른 많은 영혼을 붙여 주신다.

즉 개인 개인이 치료받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계시며 기뻐하신다.”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고

자신을 위한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다니기는 하는데

자신 안에 믿음이 확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안의 불신자로 볼 수 있다.

자신들도 힘들고 괴롭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믿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

 

몇 십 년이 되어도

믿음이 성장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상처를 통해 사단은 막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들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셔서

영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갈구한다.

작은 행복을 찾아서 사람들은 떠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찾아가지만 그곳에 이르러 보면

그 행복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음을 느끼고 실망한다.”

 

반석이는 읽는 것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너무도 소중한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행복을 찾아 나서고 사랑을 찾아 다녔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등

치유되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굶주린 마음이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이 사람 아니면 저 사람

이렇게 사랑의 여행을 떠난다.

 

인간에게 사랑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독하게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고통이 될 때가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깨어지고 분열된 상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닌다는 얘기다.

인생의 사랑은 마치 나그네처럼 여행의 길을 떠나고 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이상적인 사람을 만나서 정착해도

그것이 끝까지 계속되지 않는다.

금방 싫증나고 만다.

 

그 이상의 꿈은 깨어지는 것을 늘 맛본다.

그러면 또 실망하고 절망하고

다시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면

끌어들이는 마음의 공허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또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충만이는 반석이가 이렇게도 심취할 줄은 몰랐다.

괜히 친구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내심 불안해했는데

이렇게 깊이 빠지는 것을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러나 커피가 자꾸만 식어가고 있는데

반석이가 커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어서

커피를 권했다.

 

반석아, 커피 좀 먹으면서 읽어라.”

  

반석이는 고맙게 생각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여전히 계속해서 읽을 뿐이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굶주리고 버림받은 마음으로 인해서

불신과 두려움과 상한 마음을 갖고

이 세상과 사람을 의뢰하고 살아 간다.

 

그 속에서 지치고,

학대와 멸시를 받은 소경된 갇힌 영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종교다.

 

수가성의 여인에게 오신 것처럼 마음이 상한 자,

고통당하는 자, 소외당하는 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포로 되어 있는 자,

어둠에 결박되고 묶여있는 자를

치유하고 풀어서 자유하게 하기 위해

그 누구가 아닌 바로 에게 오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바로 그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상처받은 아픔만 가슴에 품고

아프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한과 상처를

주님께 꺼내어 놓고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예수님을 만날 때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이 순간 주님이 당신 옆에 계신다( 3:20).

조용히 당신의 가슴과 등에 손을 대시고

  

‘얘,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네 아픔을 고치려고 채우려고 세상에서 찾지 말아라.

내가 너를 치료하고 너를 새롭게 하여 쓰리라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만나시길 바란다.”

 

반석이는 읽고 있을 수만 없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서 전인적인 치유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할까?’

많이 고민해왔다.

 

이제는 자신이 발버둥을 치면서

행복을 가져보려고 치유해보려고 했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주님께 맡겨보기로 했다.

 

반석이는 자기 자신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반석이는 조용히 기도한 후에

치유하는 방법과 치유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계속 읽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커피는 이미 다 마셔버렸고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기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충만아, 우리 과일주스 한 잔씩 더 마시지 않을래?”

 

충만이도 미안했던지 좋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여기 사과주스 두 잔요!”

 

,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반석이는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큰 감화 감동이 되었기에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셨으며

주님의 몸이 채찍에 맞음으로 담당한 상처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에 연약함과 질병까지도 담당하셨다.

 

인간 스스로 짊어질 수 없음을 아시고

주님이 짊어지셨다.

주님의 구원은

죄의 육체적 결과로 나타난 고통,

연약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속에서도 자유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구원과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기억하고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닌

바로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나로 인해서 피 흘리신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나에게 적용할 때 구원만이 아니라

강력한 치유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세상의 것,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갇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슬이 되어 자신을 결박하고 있으면

치유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깊은 치유도 받지 못한다.

 

죄의 근원은 사단이며

십자가로 인해 자유하게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죽이고 끊었지만

상하고 연약한 마음이 그대로면

다시 속임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함을

영적인 강건함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상함의 주체인 나 자신까지도 완전히 죽여야 한다.

즉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곧 내 고집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상하고 병든 부분이 십자가를 통해 죽게 된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연합함으로 죽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죽음을 통해서

진정으로 살 수가 있다( 2:20).”

 

왜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

왜 능력이 나에게 미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면 적용하는 단계에 문제가 있었는지

돌아보도록 하자.

 

아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에 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은

머리에 속한 것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론과 지식은 아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쌓여진 벽을 뚫고 들어올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를 불러주신 것이 실제적인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불신이 있다면

하나님도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적용해야 하는 것도 알지만

할 수가 없으므로 답답해하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상처가 자신을 얽매고 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도 많다.

왜 안 되는 것인가?”

 

확실한 치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씀이란 약이 치료의 약이 아니라

수면제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치유자이신 성령님께 치유 받으면

치유의 영이 흘러 들어가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내주하신 성령이

자신 안에서 나타남을 통해 계속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원뿌리를 제거하고 나면

그날 받은 상처는 혼자서 충분히 치유 받을 수 있다.

하나님과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즉 큐티하거나 기도하면서 아팠던 부분을 내어놓고

치유하는 시간을 작은 것부터 적용해나갈 때

큰 것으로 옮겨갈 수 있으며

매일매일 삶 가운데 치유가 일어나게 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용서와 새 생명을 주심으로

상한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죄와 수치감, 열등감, 버림받은 마음을

허물어줌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과 사단에 종살이하던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나의 영이

아버지였던 그분을 다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자유와 사랑과 인정함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고

자유함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다 흩어졌다.

하지만 예수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으셨다.

 

그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곁에서 멀어져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것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는 사랑과 은혜를 채움으로 인해

세상에서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으로 인해 체험을 받고 난 후에는

진정으로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 넉넉함이 생겨나며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치유 받음으로 인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이후에는 열매가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내적치유에 관심이 있고

이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성도들은

배워서 하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자신이 치유 받아야 한다.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의 사건을 여러분 가슴 속에 받아들이고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인식할 때

치유가 일어나며 강력하게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반석이는 진실로 치유 받아 새롭게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이

자기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맡기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충만이도 어느새 함께 기도드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가

머리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주님과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

그야말로 성경의 약속 그대로 새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사모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치유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사과주스를 가져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정감어린 목소리로 웨이터가 사과주스 두 잔을

가져와서 권하였다.

 

반석이와 충만이는 한 모금씩 마셨다.

 

좀 늦었지만 읽던 것을 끝까지 읽고 갔으면 하는데

충만이의 생각은 어때?”

 

, 그렇게 해도 좋아.

내 걱정은 말고 너무 귀한 내용이니까

시간이 걸려도 깊이 읽는 게 좋아.”

 

정말 두 친구는

서로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좋은 친구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려할 줄 아는 귀한 친구 사이인 것이다.

 

반석이는 기쁜 마음으로 계속해서 읽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거듭남을 체험하고 은사를 체험했는데

성장되지 않는 것은

상처받은 마음과 옛사람에게 묶여 노예생활하기 때문이다.

 

상처로 인한 쓴뿌리가 남아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개발되지 못하고

지속되어지지 않으며 소멸시키는 경우가 많다.

 

구원받은 후 신앙성장을 위해 노력한다.

좋은 성도가 되기 위해 노력은 하는데,

성령 체험, 뜨거움도 있는데

주위에 사람들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볼 때는

내적 성장과 인격의 변화는 따라가지 못한다.

 

은혜와 용서가 있는 성경공부 속에 영적 성장이 있다.

사람들은 행함과 조건을 통해서

이루어나가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균형 잡힌 성장이 필요하다.”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을 용서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예수를 만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할 때

새로 태어나는 아기와 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적 아이와 같은데,

영적 아이인 우리가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어른 행세를 하고 있다.

 

영적 아이가 성숙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건

바로 은혜와 용서를 통해 내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할 때

영적인 면보다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다.

이는 즉 머리만 커지는 성장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속 깊이 새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적인 성숙보다는 외적인 성장에 가깝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사람들은 상처의 곪은 부분을 보이기 싫어

자신을 아름답게 겸손한 척 포장하고 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마음을

그대로 갖고 나오기를 원하신다.

 

내적치유는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프고 더럽고 추한 부분들을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치유하시며 어루만져 주시는 과정이다.”

 

특히 치유란

병든 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병든 나는 죽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 생명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옛 모습이 죽어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치유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장점들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상한 마음으로 인한 열등감과 질투심 때문에

직장에서도 강박관념을 갖게 되고,

일중독에 빠지고 만다.

 

이런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지치게 되고,

결국엔 마음과 육신에 모두 병을 불러오게 된다.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열심히 하고,

많은 것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제쳐두고

자신의 의를 위해 자신의 성격 때문에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교회 성도들에게 목회자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뛰다 보면

어느 날 시험에 들게 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우리의 가식적인 행위가

상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열매가 없다면

그건 주님을 바라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바라보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의 일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녀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버리면서도

교회 일에만 매달리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작은 일에 상처받고 시험에 들게 된다.

 

직장 일이나 교회의 일을 할 때

지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경우

그건 마음 가운데 굶주린 마음,

즉 치유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일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해야지,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치유 받게 되면

열등감이 사라져서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

 

또 세상에서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던 완벽주의자도

치유를 받게 되면 경쟁심과 욕심을 버리게 된다.

 

헛점이 드러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옛사람이 치유과정을 거쳐 새사람이 되어

어떤 헛점이 드러나도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이나 소심함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일이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정감으로 인해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인해

쉬지 않고 무시로 기도하게 되며

환경을 초월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반석이는 치유의 효과가 이렇게 큰 지를 미처 몰랐다.

이제야 내적치유로 쓴뿌리가 제거되어야

행복이 찾아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예전엔 복음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가

이처럼 강력하고도 능력이 있는 줄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이 엄청난 역사가 반석이 자신에게도

실제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회복과 치유에 대한 내용도

계속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었다.

  

내 영혼이 성장해서

육적인 것을 누르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진짜 영권이 강한 사람은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육을 죽일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권이 강하다는 건

귀신만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은혜와 용서를 베풀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에 의해 강건케 되어야

육의 본성을 누르고 영이 승리할 수 있다.

속사람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이 강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내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기분 나쁜 일이 있을지라도

환경 속에 고난이나 어떠한 역경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는 사람이

바로 영권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 생활 속에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생활 속에 치우치면

절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사단은 어려운 환경이나 고난,

기분 나쁜 어떤 일을 통해서 우리 영을 흔든다.

 

그러므로 거기서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육의 마음을 잡고 있으므로

사단이 영적 싸움을 해나가는 것이다.

 

자기 생활 속에서 이기지 못하면

절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우리 안에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육적인 생각과 혈기를 동원해서

싸움에 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육을 대적해서 영이 강해져서 승리할 수 있어야

영적 성장이 가능하다.

 

진정 싸움에서 이기는 자라야 용서의 단계를 밟게 된다.”

  

그러면 왜 이토록 용서가 어려운가?

우리의 의식 속에는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용서가 잘 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내적 세계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영이 예수님을 만나야만 용서를 이룰 수 있다.

의식적인 세계에서만 예수를 만나면 안 된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예수를 만나야 한다.

 

아픔이 있는 곳,

나 자신도 모르는 어두운 내면의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그곳에 성령의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 4:2).”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미 용서했는데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치유를 받고 나서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미움,

고통, 두려움, 증오, 분노, 불신은

용서하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사단은 그것을 묶어서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고 괴롭힌다.

하나님은 용서해도 내가 나를 가두고 묶고 있다.

 

용서받은 만큼 용서하고 용납하게 된다( 4:31~32).

깊은 내면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오래되면

한으로 자손들에게까지 물려주게 되고

육체적, 감정적으로 상하게 되어

심각한 질병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분노의 대상을 용서로서 풀어줄 때

자신도 자유함을 얻고 질병에서 놓임받는다.

 

용서는

깊은 내면의 치유를 향해 내딛은 마지막 마무리단계다.”

 

반석이와 충만이는

용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 안 되는 이유도 이야기했다.

  

그런 후에 마음속 깊이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서

자기 자신들부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자고

서로 권면하였다.

 

두 사람의 오늘의 만남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을 것이다.

 

서로 행복에 대해 고민하였고

 행복을 지금 함께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이미 치유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석이는

계속해서 읽어나가기를 원했다.

이제는 용서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 읽어나갔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를 분노와 한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쓴뿌리

(분노, , 앙심, 복수심, 미움, 원망)

가지고 있는 것은

상대와 자신에게 사단의 활동무대를 제시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자유함, 축복, 평강을 묶어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과거의 기억과 상처로 인해 현재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갉아 먹는 결과로 불행한 삶을 산다.

 

나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상대방의 잘못한 일을 잘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일은 그대로 잘못한 상태로 있지만

다만 사랑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사람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어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상대를 풀어서

자유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의 결박에서 자유하게 되어

치유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이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장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며

권리이고 선택이고 용기이다.

 

심한 상처를 받았으므로 많은 갈등을 하게 되고

괴롭기 때문에 대단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의식 속에서 치유를 통해서도

이 부분이 서서히 열려지고

묶인 사슬에서 놓임을 받게 된다.

 

상처받은 그때 부정적인 면만 바라보지 말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상황 속에서

반드시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상태, 감정, 분노 등이

나 자신을 향해서만 아니라

그 사람의 상처로 인한 과장된 것이 아닌가를 찾아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또한 자신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혹시 상처받은 아픔으로 인해서 상대의 행동에

더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성숙한 어른아이인 것은 아닌가?

이해의 부족함이 아닌가?

등을 찾아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내면에 적용시켜

용서의 따뜻한 길로 나아가자.”

 

용서자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온유함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용서의 일이었다.

 

모세는 어려운 가운데서 성장되도록 많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 없이 성장하지 않았다.

 

그가 한 단계 한 단계 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를 성장시키셨다.

 

용서의 단계를 통해 우리는 성장해간다.

새 생명을 얻었다면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용서받은 체험 없이는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다.

육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했다는 진정한 용서가

깊은 내면에 체험되어지면

나를 용납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으로 채움받고

이러한 채움이 용서를 통해 생명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계속 영적으로 성장해 나간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들을 용서하셨다.

우리 자신은 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과 연합하여 용서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시고 가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갈 때

그 일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기독교는 바로 용서의 종교인 것이다.”

 

반석이가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눈을 감았다.

이제 거의 다 읽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읽으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읽기만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 할지라도

내가 먹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고 믿고 행하는 그 만큼의 복이

임하게 되는 줄을 잘 알기 때문에 읽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묵상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있었지만

뻔히 알아도 잘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이젠 사랑의 하나님께서

친히 만져주심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한 글도 계속 읽어 나갔다.

 

구원과 치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치유를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구원받고 치유 받을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불러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구원을 받게 하셨으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영이 세상의 것에 억압되어 상한 영으로 있으면

낙심하고 절망한 우리의 영을 보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시며

치료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성경에 나타난 치유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

내 속의 깊은 곳에 있는 상한 마음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런 과정속에서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치유를 받고 난 후에도

매일매일 치유를 받아야 한다.

 

상처를 받으면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함으로 치유를 받는데,

치유의 시간이

처음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묶고 있는 부분들을 말씀을 통해서 꺼내어 놓고

기도해 나갈 때 묶고 있는 것에서 끊어지고,

자유함을 얻게 된다.”

  

반석이는 마지막으로

치유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읽어 나갔다.

 

첫째, 상처를 싸매어주시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한다( 6:1).

  

둘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여야

한다(요일 4:10,  5:8).

  

셋째, 성경 말씀 속에서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큰 치유의 힘은 기도( 16:24).

 

그러므로 조별모임을 통해 서로

적용한 부분을 나누고 중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내적치유를 하고나서 기도모임을 결성하면 좋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든 기도모임을 갖고,

아픔을 털어놓고 함께 기도하다보면

서로 공감하는 부분을 찾게 되고,

그 과정속에서 치유가 일어나게 된다.

 

모임을 통해 마음을 열게 되지만

구체적으로 치유가 이뤄지는 건 기도다.

이를 치료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인간은 절대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예배나

찬양 가운데서도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성령에 의한 치유적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무의식의 깊은 곳의 아픔들을 성령님께서

끄집어내어 치유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

 

다섯째,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을 때 다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순수하게

믿을 때 나 자신도 상대방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여섯째,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때 치유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일대일 대화를 통해 기도를 통해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온유와 용서는

영적 치유를 바르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용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 힘입을 때 가능하다.

 

치유 받은 사람은 온유와 용서의 성품을 갖게 된다.

용서가 없이는 절대로 온유와 사랑이 나갈 수 없다.

온유함과 용서함이 없는 삶은 치유가 완전히 된 것이 아니다.

 

내가 용서받은 치유의 경험 없이는

육적으로 심리적으로 온유와 용서가 될 수 없다.”

 

반석이는 치유되어서

이런 용서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지속적인 치유를 받을 수가 있는지

궁금해서 충만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충만이는 “읽고 있는 그 다음에 곧바로 나오니까

계속해서 읽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반석이는

조금 남아 있던 사과주스를 모두 마시고는 읽어 내려갔다.

조명등이 약간은 어두워서 눈이 침침해졌지만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기쁨이 더 컸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의 치유는 계속적인 것이다.

계속되는 치유와 성령의 충만한 영적상태를 유지해서

다시는 세상의 종살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치유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다.

치유 받은 사역자로

다른 자들에게 나아가서 갇힌 자들을 풀어줘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내가 완전히 해방되어야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 명예, 욕심에서 해방되어야 치유사역을 할 수 있다.

 

항상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영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한다.

 

가정에서 적용하면

남편과 자녀의 치유도 일어날 것이다.”

 

내적치유에 관심이 있고

이 사역을 하고자하는 사람들과 성도들은

사역하려고 먼저 뛰어들 것이 아니고

자신의 치유가 먼저 체험돼야 하고 치유되어야 한다.

 

병든 가정에서 자란 어른아이들의 공통점은

병든 마음으로 자신의 문제는 놓아둔 채로

다른 사람을 돌보려 한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지

기도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 뛰어들면 서로 상처받는다.

열매가 없다.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역자 자신도 계속 치유 받으며

사역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보여지기 시작한다.

또한 치유 받은 자도

마음의 눈을 넓게 열고 자신과 모든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아야 한다( 9:20~21).

 

독선과 아집고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늘 익숙하게 생각했던 습관,

관습, 생각, 가치관 등등에서 탈출해야 하고

변화의 충격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 묶인 사슬을 끊어 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보는 시각을 매일 새롭게 조정하고

문제를 똑바로 보고 문제의 사건,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적치유는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것이며

불순종과 불신이 제거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깊이 만나게 되면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

 

내적 치유는

영적 싸움이기에 우리가 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상처를 풀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도록 해야 된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 받고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치유는

계속적으로 드러내고 치유 받고

드러내고 치유 받아야 한다.”

 

완벽한 치유는 없다.

급하게 받고자 서두는 내면의 치유는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걸어가야 한다.

 

우리의 깊은 내면을 치유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치유과정에서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다.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것은 뒷걸음질한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키우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하고 나약한 모습이 되는 것을

사단은 기다린다(벧전 5:7~9).

 

과거에 묶여 있지 말고 올무에서 벗어나

현재의 행복을 누리며 살자.”

 

드디어 끝까지 읽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 읽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 없었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에

강하게 도전받은 것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만이에게 책을 아예 빌려달라고 했다.

 

반복해서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치유 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행복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자신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충만이는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빌려줄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고,

사람의 지혜의 말에 있지 않고

성령님과 능력과 큰 확신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인정하였다.

 

그들은 이론과 실제, 곧 은혜와 지식(벧후 3:18),

진리와 은혜( 1:14) 등을 골고루 갖춰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행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 모두

경건의 능력으로 경건의 모양을 갖춘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즉 말로만의 사랑이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참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손님, 문 닫을 시간인데요.”

 

웨이터가 여기저기 급히 다니면서 말했다.

 

벌써 새롬 커피숍의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네.”

 

둘은 함께 웃으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귀한 시간을

가졌던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해했다.

  

이러한 것도 작은 행복일 것이다.

 

그렇지만 보다 큰 행복,

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 곧 참 행복은

오늘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 있었다.

 

충만이가 먼저 간단하게 말했다.

 

참 행복은 복음의 능력으로,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계획하심과,

오직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의 충만함과 실제적인 역사하심과,

 

말씀과 기도와 찬양, 사랑과 용서 등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체험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모든 관계가

즉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일 거야.”

  

반석이도 화답하면서 말했다.

 

맞아.

능력과 성령님과 큰 확신 등으로

이렇게 치유 받고 구원받은 행복한 사람들은

거듭나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일 거야.

 

즉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 선한 일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할 수가 있겠지?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고,

이웃에게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일 거야.

 

그 사랑은

곧 서로 용서하고, 서로 관용하며,

서로 돕고, 서로 섬기고, 서로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격려와 위로를 하고,

서로 먼저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충만이는 반석이의 말을 음미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였다.

 

그때 시편 1 1절에서 2절에 나오는 말씀이 떠올랐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한

 

 시편 1 3절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형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충만이는 확신했다.   

 

충만이와 반석이는

오늘 의미 있는 저녁을 보냈다.

 

서로의 대화와 글들을 통해서

행복이란 주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받고

어느새 하나씩 치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인도하심을 볼 수 있었던 시냇가 공원,

 

살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던 맛나 식당,

 

그리고 우리를 늘 새롭게 빚어 주셔서 새사람으로 살게 해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게 하는 새롬 커피숍,

 

이러한 것이 오늘 저녁을 더욱 의미 있게 장식해 주었다.

 

이것뿐만 아니다.

 

반석 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듯한

반석이와의 만남,

 

성령 충만으로 새롭게 됨을 상징하는 듯한

충만이와의 만남이 더욱 의미 있는 저녁이 되게 했다.

 

새롬 커피숍을 나서는 그들은

그야말로 새롭게 되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그들이 새로워졌기에 세상이 새로워 보였던 것이다.

행복,

 

그들이 함께 찾아보았던 그 행복,

이젠 두 사람 모두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충만아, 정말 오늘 저녁 고맙다.”

 

아니야, 반석이 네가 더 고맙다.”

 

두 친구는 서로 고마워하면서 감사하였다.

 

우리 이 다음에 만나면 많이 달라져 있을 거야.

그렇지 않겠니?”

 

그래, 그건 정말 그럴 거야.”

 

그들은 서로의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면서

함께 지하철 막차를 타러 갔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한 목소리로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고백을 주 하나님께 드렸다.

 

충만이와 반석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공원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

서로 손을 잡고 합심하여 기도드렸다.

 

반석이가 두 사람을 대표하여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치료하시는 주 하나님 아버지!”

 

억압받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함께 기도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그동안 묶여 있었던 것에서

풀려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시고

치유받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주셔서,

실제적인 주 예수님의 만남과 성령님의 임하심을 통해서

치유 받도록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용서해주신 저희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하였지만

저희들 자신의 그릇된 고집과 욕심과 상처 때문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성경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에 순교하지 못하고

저희들의 자아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선하신 계획들을

어그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의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미쁘시므로

고백한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셨으니

이 시간 깨끗하게 용서하여 주소서.”

 

지금 이 순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저희들의 심령 속에

참 빛 되신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이 빛 가운데 살게 해주소서.

 

구주 예수님, 속히 오셔서 구원하소서.

저희들을 만나주소서. 치유하여 주소서.

믿음의 능력과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소서.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게 하시고

실제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주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 받게 하소서.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의 성경 말씀과

오늘 나누고 읽은 모든 글들과 이야기들이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말게 하소서.

 

운동력이 있고 양날이 선 검보다 예리한

주님의 생명의 말씀들이

약속대로 성령님과 더불어 살아서 운동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영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서

실제로 치유를 받게 하여 주소서.

 

치유 받아 새사람 되어

열매 맺고 영광 돌리면서 살게 하소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과 열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저희들은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주 하나님께서만

치유하시고 회복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오직 성령님의 만져주심을 바라며

저희들의 모든 것을 이 시간 드립니다.

  

맡길 때 맡아주셔서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대로

저희들을 받아주시고 다듬어주시고 고쳐주셔서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 주소서.”

 

흑암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단의 권세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하게 살며

권능으로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저희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저희들은 연약하여 잘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희들이 살아나서

저희들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살아나고,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과 세계 열방이 살아나게 하소서.

 

모든 영광과 찬송과 권세와 주권을

주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반석이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충만이도 아멘, 아멘, 아멘하면서 한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뜨겁게 기도드렸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동과 위로와 통회와 기쁨이 차고 넘쳤다.

 

주님께서 그들의 소원대로

만나주시고 치유하여 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33:29).

 

성경대로 주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대적자들을 굴복시키시고 풀어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성경대로 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돕는 방패와 영광의 칼이 되셔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두 행복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런 후에 사랑으로

서로의 손을 더욱 더 꼭 잡고는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우린 정말 행복한 그리스도인이야.”

 

 

 

[ⓒ 2023 로고스성경연구소 https://logosbibleinstitute.tistory.com 소장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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