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 (갈 2:16, 3:13, 5:18) [교리성경강해 2020.6.14. 참좋은제자들교회 이서영 목사]
●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교리적인 측면을 가미하여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성경강해한 영상입니다.
● 영상과 원고는 제가 쓴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가운데 인용한 것입니다.
● 유튜브: 로고스성경연구소 https://youtu.be/PfxcbMJx0os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 (갈 2:16, 3:13, 5:18)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교리적인 측면을 가미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를 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께서 율법을 성취해 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을 교리적인 측면을 가미하여 갈라디아서 1장과 2장과 3장과 5장을 중심으로 해서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서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구조와 특징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 가운데 구조부터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모든 내용은 제가 쓴 『한눈에 보는 갈라디아서』 (이서영) 가운데 인용해서 파워포인트로 만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에서 제시해 본다면 자유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깨닫게 해 주고 그러한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일반적인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러하므로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을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의 멍에를 씌워 종으로 삼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율법의 멍에를 벗겨서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라디아서에서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언급해 주고 있다고 본다면 갈라디아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 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이 주는 자유에 관한 것과,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 주시는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이 주는 자유에 관한 것과,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 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이 주는 자유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서 1-2장은 이신칭의의 복음이 주는 자유와 관련된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3-4장은 이기속율의 복음이 주는 자유와 관련된 내용이고 5-6장은 이성성율의 복음이 주는 자유와 관련된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1장은 다른 복음, 2장은 이신칭의의 복음, 3장은 이기속율의 복음, 4장은 이기속율의 명분, 5장은 이성성율의 복음, 6장은 이성성율의 실행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갈라디아서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에 대해 일깨워 주기 위해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해결하려는 것은 종의 멍에를 쓰게 되므로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종의 멍에를 씌우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이행성의(以行成義)의 다른 복음에 대해 단호하게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라디아서에서 세 가지 유형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과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를 씌우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멍에를 벗겨 주고 자유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행성의(以行成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이와 같으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 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에서 신(信)은 믿음(信)을 의미하고, 칭(稱)은 칭함(稱)을 의미하고, 의(義)는 의롭다(義)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신칭의를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 주셔서 자유하게 해 주는 이기속율(以基贖律)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기속율(以基贖律)에서 기(基)는 기독(基督: 그리스도)을 의미하고, 속(贖)은 속량(贖良)을 의미하고, 율(律)은 율법(律法)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에서 종 노릇을 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셔서 자유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에 의해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할 수 있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성성율(以聖成律)에서 성(聖)은 성령(聖靈)을 의미하고, 성(成)은 성취(成就)를 의미하고, 율(律)은 율법(律法)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잘 지키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해 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 주시기 때문에(롬 8:1-4)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자유를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의 행위라는 멍에를 씌워 종으로 삼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종에서 벗어나게 해서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 아래에 묶어 두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율법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이행성의(以行成義)의 다른 복음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를 가져다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과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에 대해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서를 보면 자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의미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이시다는(롬 1:2-4) 것을 말해 주고 있다면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언급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다른 복음과 대비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를 깨닫게 해주고 그러한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갈라디아서의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다른 복음이 주는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하시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이 씌운 종의 멍에인 율법의 행위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셨다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갈라디아서의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에 들어가면서 다른 복음에 대한 것을 먼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다른 복음이 있고 율법에서 자유는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다른 복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복음은 율법의 대표격인 할례를 통해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력하게 변증하는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아보면 이행성의(以行成義) 즉 율법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장 6-10절을 보면 이러한 다른 복음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저주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고한 것은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발신자의 입장에서 우리나 천사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1:8)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에는 수신자의 입장에서 너희가 받은(1:9)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과 9절의 받을지어다의 원어원형은 ἔστω(에스토)인데 “너는 -이 되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은 저주가 되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저주가 되어버린다는 의미이므로 얼마나 크고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다른 복음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적극 전하여야 하나 다른 복음은 꿈속에서도 전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결코 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오늘 첫번째 주제인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이행성의의 다른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다른 복음과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논증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각각 2장과 3장과 5장에 볼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입니다.
이 가운데 2장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볼 수 있습니다.
2장 11-21절에서는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 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복음을 논증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논증하기 위해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 그러한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한 효력을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신칭의가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11-14절에서는 바울이 외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게바를 책망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율법의 행위를 중시하는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이방인들을 떠나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지 말도록 한 규정이 생각났기에 얼른 먹는 것을 중단하고 나가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장 15절을 보면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과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을 정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 15:2).
이러한 것을 보면 죄인인 이방인과 함께 식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방인들과 함께 계속 식사하지 않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음식 때문에 비판을 받을 일이 아닌 데도 법조문을 지키는 할례자의 눈치를 보다가 책망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여는 중요한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이신칭의에 대한 복음을 보다 분명하게 논증하기 위해 이러한 장면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 주는 이신칭의에 대한 정의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고 한 것은 율법을 행하는 유대인이든 행하지 않는 이방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이신칭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모두가 의롭게 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16절 끝부분에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신칭의가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두 번째 나오는 의롭게 되는 것은(δικαιοῦται, 디카이우타이)의 원어원형은 δικαιόω(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현재 수동형이므로 “의롭게 되다”라는 뜻이 됩니다.
16절에 나오는 이러한 어원을 가지는 의롭게 되는 것은과 의롭다 함을 얻으와 의롭다 함을 얻을은 모두 수동형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자유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 바울 일행은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16)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획기적인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이신칭의의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행위라는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주제로 이기속율의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이행성의의 다른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볼 수 있습니다.
1-14절은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의 저주로부터 속량(贖良)해 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14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질문을 강력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 아브라함을 통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기속율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기속율이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장을 시작하면서 1-5절은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인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꾀임에 빠져 되돌아가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기에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강력한 어조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시작하면서 곧바로 어리석도다(3:1)라는 말을 하였으며 곧이어 어리석으냐(3:3)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4절에서는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고 할 정도로 율법의 행위로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3장을 시작하면서 1-5절에서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 강력하게 피력한 이후에 6-9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예로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을 받게 된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로워지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논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10-12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저주라는 강력한 용어를 쓰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하므로 11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었는데 13-1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 주시는 것을 이기속율(以基贖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기속율(以基贖律)이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고 자유를 주셨는데(5:1)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셔서 그러한 자유를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나오는 속량하셨으니의 원어원형은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인데 “구속하다, 속량하다”라는 뜻입니다. 속전을 주고 노예를 구해내는 것에 적용이 가능한 말이었습니다.
앞의 단락에서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13절 후반부를 보면 신명기 21장 23절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고 있는데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끔찍한 저주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한 사람 분량의 저주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큰데 우리 모든 사람의 어마어마한 저주를 그 누가 자원해서 받으려고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13절의 위하여의 원어원형은 ὑπέρ(휘페르)인데 “-을 위하여, 대신하여”라는 뜻입니다.
속격을 수반하게 되면 대표하거나 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신에, 대신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13절은 속격을 수반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온갖 여러 가지 저주를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갈라디아서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행위로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2:21)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해주신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첫 부분에 나오는 이는(ἵνα, 히나: -하기 위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절의 미치게 하고의 원어원형은 γίνομαι(기노마이)인데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된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되는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끝에 나오는 하려 함이라(ἵνα, 히나: -하기 위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받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14절에 약속하신 것은 성령(행 2:33)이십니다.
이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요 3:5-8) 되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엡 1:13) 됩니다.
이렇게 될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인 성령으로 행하게(갈 5:16-18)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다루게 될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을 암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러하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된다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처럼 놀랍고도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인 우리에게도 전해 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삼위 하나님께 영원무궁하도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 주제로 이성성율의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이행성의의 다른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에 대한 정의를 볼 수 있습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5장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속량해 주신 그리스도께서(3:13, 4:5)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자유롭게 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율법이 주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 위해 다른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5-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가 효력이 없고 믿음 뿐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인 할례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든 무할례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힘을 발휘하고 효력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속량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역사를 통해 받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베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할례를 해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율법의 행위를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로 얽어 매려는 거짓 형제들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어 던져버려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16-2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으로 산다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6-18절에서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시고(3:13) 아들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4:5). 그리하여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3:14).
이러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와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6절처럼 성령에 따라 행하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고 18절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게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되는 것을 이성성율(以聖成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은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갈 4:4, 요 12:49) 약속하신 성령을(갈 3:14, 행 2:33)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 주셔서(요 15:26, 14:26)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으나 성령에 의해서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성성율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이 그러합니다.
36장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장 27절: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 영인 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할 수 있게 해 주겠으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주고 이기속율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속량해 주고 이성성율의 복음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율법을 실제로 성취해 나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성율이 복음이라고 하여도 현세에서는 아무도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되어(이신칭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속량해 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해 주셔서(이기속율)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을 바탕으로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완전한 이성성율을 이룰 수 없어도 최선을 다해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써도 역부족인 것은 사실입니다. 천국이 아닌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주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록 이성성율의 복음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굳이 왜 이성성율의 복음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까?
이러한 것이 지상과제요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성율의 복음은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그림의 떡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음이 될 수 있으려면 실제로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아시고(요일 3:20, 요 16:30, 21;17)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마음과 생각을 아시고(시 139:2, 눅 5:22)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해주시는(전 12:14)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계 22:12, 고전 3:8, 14, 히 11:6) 때문입니다.
순종에 대한 복과 불순종에 대한 화가 있기(신 28:1-68)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달려 있고(신 30:11-20) 우리의 행복이 달려 있기(신 10:13)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마 22:37-4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기(전 12:13)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걸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전도가 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도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근본이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근본적으로 좋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관계가 좋아지게 되는데 대신(하나님)관계와 대인(이웃)관계와 대아(자신)관계와 대환(환경)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만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게 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셔서 속죄해 주시므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선물로 주셔서 때가 되자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이신칭의의 복음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셔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해 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이신칭의의 복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속량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해 주시고 성령을 받게 해 주시고 양자로 삼아 주신 것에 대해 범사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은 다릅니다. 속량해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할 일이 없는 것은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바로 이러한 이성성율의 복음이 성취되는 여부와 성취도에 의해 결판이 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셔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연약해서 율법을 이룰 수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게 해 주시고 율법을 성취해 나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의 복음에 관한 것을 로마서 8장 1-4절에 명확하게 잘 정리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장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장 4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남은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가운데 힘써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성성율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왜 이성성율의 복음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성성율의 복음이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셔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므로 실제로 의로워지는 역사가 크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물론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완벽하게 성취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완전하지는 못하나 지상천국을 이루어 나갈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듭나게 되고(요 3:5-8, 딛 3:5)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고(고전 12:3)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롬 8:14-16).
그리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사 11:2)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겔 36:27, 갈 5:16, 18) 됩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과 사람의 본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성령 충만한 모습의 가장 큰 특징이고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고(요 15:26, 행 1:8) 전도를 할 수 있게 되고(고전 2:4) 말씀을 깨닫고 가르칠 수 있게 되고(눅 12:12, 요 14:26)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행 4:31).
지혜가 임해서 일을 잘하게 되고(출 35:31, 단 5:14, 사 11:2) 능력이 있게 됩니다(슥 4:6, 고전 12:10).
열매를 맺게 되고(갈 5:22-23) 여러 가지 은사도 받게 됩니다(고전 12:4-11). 가난한 자를 돕게 되기도(2:43-45, 4:32-37) 합니다.
거룩하게 되고(벧전 1:2) 악한 영을 쫓아내게 되고(마 12:28, 행 10:38)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행 10:38).
이외에도 열거하지 않은 것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 되고 성령을 통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속량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러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기에(요 19:30, 계 21:6) 오늘날에는 이루어 놓으신 것을 성령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해 나가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에 변화가 있게 되어 성품이 좋아지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고 예배자로 살게 되고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셨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엡 5:18) 한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수록 충만하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만하게 받는 비결은 간구하면 받게 되고(눅 11:13) 회개할 때 받게 되고(행 2:38) 말씀에 순종할 때 받게 되고(행 5:32) 안수할 때 받게(행 8:17, 9:17, 19:6) 됩니다.
16절을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였고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16절의 성령을 따라(πνεμ́ατι, 프뉴마티)는 πνεῦμα(프뉴마: 성령)의 여격이므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하여”(by the Spirit) 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행하라의 원어원형은 περιπατέω(페리파테오)인데 “돌아다니다, 걷다,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인데 육신에 의해서가(고전 3:3)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16절의 욕심을의 원어원형은 ἐπιθυμία(에피뒤미아)인데 “충동, 욕망, 갈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루지의 원어원형은 τελέω(텔레오)인데 “끝내다, 끝나다, 완성하다, 성취하다, 수행하다”라는 뜻입니다.
16절의 아니하리라의 원어원형은 οὐ μή(우 메)인데 “결코 –아니다, 확실히 조금도 -않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성령으로 행하면 육체의 욕망이 결코 성취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의 대적함으로의 원어원형은 ἀντίκειμαι(안티케이마이)인데 “반대하다, 대적하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성령께서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않게 된다고 하고서는 왜 서로 대적함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서로 간에 많은 혼선과 충돌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은 대로 행하여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부작용이 클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서로 반대편에 서도록 하게 해 주셔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가시와 같은 것이 있고 우리가 마음을 먹은 대로 할 수도 없고 뜻대로 되지도 않게 되므로 오히려 겸손하게 성령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도록 우리가 원하는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무조건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될수록 자신이 마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 행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꼬박꼬박 말을 잘 듣는 종처럼 여기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하는 종처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려가 있으므로 긴장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7절 이후에 나오는 18절을 보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이어 성령을 따르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따를 때 17절의 주의사항을 잘 지켜서 그러한 자세로 성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성령의는 16절의 성령을 따라(πνεμ́ατι, 프뉴마티)와 동일합니다. πνεῦμα(프뉴마: 성령)의 여격이므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하여”(by the Spirit) 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인도하시는(ἄγεσθε, 아게스데)은 ἄγω(아고: 인도하다, 데리고 오다, 이끌다)의 현재 수동형이므로 “인도받다, 인도받게 되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게 된다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고(3:13)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신 것이(4:5)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되고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되는 것을 이성성율(以聖成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성율(以聖成律)이 이와 같으므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탁상공론(卓上空論)에 그치거나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세 가지 주제를 총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에는 이행성의의 다른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이신칭의의 복음과 이기속율의 복음과 이성성율의 복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자유를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율법의 저주와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얻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과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信)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얻게 해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그리스도(基督)께서 율법(律法)으로부터 속량(贖良)해주신 이기속율(以基贖律)의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게 해주는 이성성율(以聖成律)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반대되는 다른 복음이 있는데 이행성의(以行成義)의 복음이 있습니다.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이러하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받게 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벗어나게 해 주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당연히 율법의 저주를 받은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다른 복음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이 부족하다고 해서 잘못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전하게 되면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저주를 받게 된 거짓 형제들처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아니 이미 율법의 종으로 묶여 있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연약해서 사람의 행위로는 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속량해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하도록 해 주신 것이 무용지물이 되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자유를 주신 세 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되살리고 적극 활용하여서 율법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율법의 종 노릇할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율법의 행위와 율법의 저주와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서 율법을 성취하도록 해 주신 것이 우리의 삶과 사역 가운데 실제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러한 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탁상공론(卓上空論)에 그치거나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존재하지 않고 복음으로 다가와서 우리의 현실 가운데 실제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서 자유를 주고 율법을 성취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복음이 우리의 삶과 사역 가운데 실제로 복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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