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보다 더 큰 은혜 (창 6:5~12)
국내 최고령 목회자인 방지일 원로목사가 올해 100세를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사의 산증인이신 방지일 목사님은 "모든 과거를 회고해 보면 파란이 많았어요. 그러나 그 파란 때마다 누가 지켜줬느냐, 하나님께서 날 지켜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갈 3:11)고 했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가 떨어지면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도에게 늘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향하여 그의 얼굴을 드시고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민 6: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아멘.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친 백성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최초의 족장인 야곱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을 건너가기 전에 심히 두렵고 답답해서 안절부절했습니다. 형인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을 때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형이 온다는 것은 필경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오는 것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혼자 강가에 남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창세기 32장 9절입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제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죽기 살기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극적으로 형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입으면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됩니다. 창세기 33장 11절을 보면 야곱이 에서에게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스라엘 자손을 볼 때 자기 백성보다 더 강하고 번성하기에 대적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학대하고 엄한 노동을 시키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계속 불어나 온 땅에 가득해졌습니다. 그러자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해서 아이를 낳을 때 남자 아기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더 이상 씨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위기 상황에 처해있든지 자신의 친 백성을 사랑하사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분문에 나오는 노아를 보아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지구를 뒤덮어버리는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세계를 죽음에 몰아넣는 전쟁이나 전염병과 같은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친 백성인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밥’ 힘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밥뿐만 아니라 은혜의 힘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까요?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인해 오염되고 부패했지만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한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는 그 시대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완전한’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밈’입니다. ‘완전한, 흠없는’이란 뜻이지만 ‘건전한’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NIV, NASV 등)을 보면 '비난할 여지가 없는(blameless)'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노아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뛰어난 의인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의인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건전하고 비난할 것이 없는 의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노아가 완벽한 의인이었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도 이러한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고전 15:10). 그는 언약의 후손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는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였다(히 11:7)”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도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전 7:20). 그러므로 노아가 죄가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의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의인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시 51:5) 한 사람도 의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노아를 보고 의인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한 것은 완벽하게 온전한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상처투성이요 허물투성이입니다. 용서받아야 할 존재요 돌보심을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롬 3:24).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예수님은 한 사람도 부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눅 5:32)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었던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인이 되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노아나 우리 성도나 어떤 선행과 공로로 세상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은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적인 삶을 좇다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낮에는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도와 묵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알코올중독자 치유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의 몸과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제직을 내놓고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행함으로 하나님께 공덕을 쌓으려는 인간의 공로주의와 수행주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은혜의 복음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은혜를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을 보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수행할 때도 은혜를 입어 감당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그러기에 자신이 그런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이므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힘입기를 바랍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히 4:16).
성경책 마지막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은혜를 계속 입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실제로 지금까지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매우 큰 은혜입니다. 온 지구를 뒤덮어버린 홍수보다도 더 큰 은혜입니다. 지구를 홍수물로 몽땅 뒤덮은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많은 물이 넘치고 덮쳐서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겨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니까 노아가 탄 배가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홍수물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온 세계를 모두 잠기게 만들었던 홍수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홍수 속에서 살아남게 하십니다. 물질만능의 홍수, 전쟁과 질병의 홍수, 실업과 경제의 홍수, 불신앙의 홍수, 걱정근심의 홍수 등 각양각색의 홍수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무섭게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이란 홍수도 거뜬히 넘어가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홍수보다 더 큰 이 은혜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써도 다 쓰지 못할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살아납니다. 각종 홍수 가운데서도 살아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해주고 살려줍니다. 영원히 구원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홍수를 넘는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넘치도록 받으시길 바랍니다.
[2010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24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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