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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기쁨을 뿌려주시는 하나님 (시 97:10-12)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기쁨을 뿌려주시는 하나님 (시 97:10-12)

 

박태환 선수가 대한민국 수영 역사상 첫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때 기쁨은 전 국민이 열광할 정도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박태환과 함께 올림픽 국가대표단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돌아오자 꽃으로 장식한 자동차에 태우고 환영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대부분 카퍼레이드를 할 때 길가의 높은 빌딩에서 색종이를 뿌리면서 환영합니다. 색종이가 반짝 반짝 빛나면서 내려오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뿌리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기쁨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늘에서 귀한 것을 내려주십니다. 기쁨을 내려주십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주는 것보다 더 크고 귀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하고 받는 우리의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함께 크게 기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얼굴을 찡그리는 종교가 아니라 활짝 웃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큰 기쁨도 있습니다.

 

1. 기쁨의 이유 (10절)

 

기쁨이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값진 결과를 거두었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박태환 선수는 깊은 아픔과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대창중학교 3학년생으로 어린 나이였지만 실력이 뛰어나 국가대표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긴장해서 부정 출발했다가 수영도 못해보고 실격 당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를 악물고 다시 도전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수영 역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충격과 역경을 딛고 얻었기에 더욱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기쁨도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태를 기억할 때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오히려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그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쌓아놓은 돌 앞에 잘 살게 해 달라고 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엉뚱한 피조물을 신으로 삼고 의지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헛된 것에 눌려 살다가 죽어서도 영원히 헛된 것에 파묻혀 삽니다.

 

구원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는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면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불에 살짝 데여도 얼마나 뜨겁고 따갑습니까? 그런데 지옥불은 꺼지지 않는 유황불입니다. 그 불못에서 활활 타는 불에 온 몸이 영원히 데인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때문에 지옥불의 온도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하도 찜질방에 가서 면역이 돼서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찜질방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하루하루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하니 지옥은 정말 갈 곳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지옥에는 절대로 가지 마시고 꼭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지옥은 불만 타지 않습니다. 지옥에는 온갖 저주와 악과 고통과 허물도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시편 97편은 여러 가지 지옥의 모습 가운데 ‘수치’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에 나오는 7절을 보면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허무한 것으로”의 또 다른 뜻은 “우상으로”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이미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쁨보다는 늘 불안에 쫓깁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헛된 신상입니다. 우상에게 빌고 나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우상에게 재물을 바치고 나면 더 잘 살게 되리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그 우상 때문에 모두 다 수치를 당합니다. 일순간의 수치도 당하지만 영원히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부쉬)’는 ‘부끄러워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믿고 의지하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섬기던 그 헛된 우상으로부터 수치를 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장 29절에 그 수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수치는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하고, 수치를 당하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우상 숭배하고 배교하는 사람의 종말에 대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말했습니다.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 1:13).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수치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그러므로 이 옷을 입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여러 가지 모습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씻은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가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증거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벧전 2:6).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하게 증거합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

 

본문 10절을 보면,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6편 10절에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했습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아멘. 요엘 선지자는 2장 26절에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을 말했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아멘.   

 

이처럼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는 성도는 수치 대신에 기쁨 가운데 삽니다. 시편 5편 11절을 보면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기뻐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수치를 당하는 지옥에서 벗어나 영원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이 귀한 것이요 기뻐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우상숭배자의 운명과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허무한 우상을 의지하면 기쁨 대신에 수치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수치 대신에 기쁨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기쁘게 사는 쪽을 선택하실 줄로 믿습니다.

 

2. 기쁨의 시간 (11절)

 

11절에 “뿌리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환영 퍼레이드할 때처럼 하늘에서 뿌리는 동작을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자라’인데 “씨를 뿌리다(sow)”라는 뜻입니다. 좀 넌센스 같지만 “씨를 뿌리니까 자라더라”고 외우면 쉽게 외울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늘에서 뿌리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씨를 뿌리는 동작을 말합니다. 씨를 심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뿌리고”는 지금 뿌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뿌려진 것을 말합니다. 모티어(J.A. Motyer)는 IVP 성경주석에서 “~을 위해 뿌려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곡식을 수확할 것에 대비하여 그들을 위해 심겨졌다”라는 뜻이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뿌려진(is sow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미 기쁨이 뿌려져 있기에 때에 맞춰 뿌려진 기쁨을 하나씩 거두어들인다는 뜻입니다.

 

시편 126편 5절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기쁨의 씨를 뿌려놓으셨습니다. 우리 마음 밭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자라나면 기쁨을 거둡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거두고, 더 나아가 영원한 천국에서도 거둡니다. 우리의 수고가 수고로 끝나고, 우리의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때가 되면 기쁨을 거둡니다.

 

사도행전 8장 8절을 보면 복음이 들어가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충만해지면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만 이 기쁨을 누리지 않습니다. 좀 더 멀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이 땅에서는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영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잘 말해줍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눈물이 없다, 사망이 없다, 애통하는 것이 없다, 곡하는 것이 없다, 아픈 것이 없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 한 마디로 무엇을 말합니까? 슬픔이 다 지나갔다, 다시 말해 기쁘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본문 11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다시 싹을 내는 법이다. 겨울에 뿌려진 씨처럼 그 씨는 비록 오랜 기간 땅에 묻혀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기쁨은 뿌려져 있기에 언젠가는 때가 되면 반드시 기쁨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순간에도 이 기쁨이 우리 속에 심겨져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기쁨을 거두면서 살아가실 줄로 믿습니다.

 

3. 기쁨의 반응 (12절)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복된 소식입니다. 왜 복된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께서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을 구하셔서 기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결과적으로 보면 우울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합하여 기쁜 소식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명기 7장 7절과 8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택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속마음을 내보였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우리를 향해 기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심어주셨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기쁘게 하십니다. 예배 가운데 그렇게 하셔서 예배가 기쁘게 하십니다. 가정 가운데 부어주셔서 가정이 기쁘게 하십니다. 일 가운데 부어주셔서 일을 기쁘게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타고난 사람일까요? 타고난 사람보다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일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못 당합니다. 기쁘게 일하는 사람을 못 당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기쁜 일이 많아지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뿌려주신 기쁨이 가득해지면 나타나는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환경과 관계없이 마음이 기뻐집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98편 7절과 8절에서 말합니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파도가 춤을 추고 나무가 손뼉을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물이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기뻐합니다.

 

이 기쁨이 가득해지면 자신이 기뻐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터져 나오고 뿜어져 나와서 하나님을 향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기쁨을 뿌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렇게 주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얻는 모든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기쁨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감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하박국 3장 17절과 18절이 이러한 반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아멘.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4절에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멘. “주 안에서”를 강조한 것은 기쁨을 뿌려주시는 하나님 안에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당하는 고난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뿌려지고 심겨진 기쁨은 지금 여기서 그리고 영원히 지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영원한 기쁨을 수확하게 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은 두려움과 수치 속에서 살게 되지만 예수님의 완벽한 통치를 받는 모든 성도는 영원히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위로해주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그러므로 우리가 얻는 모든 기쁨은 기쁨을 뿌려주시는 “주 안에서” 얻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기쁨을 뿌려주셔서 기쁨을 심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함께 크게 기뻐하는 마음으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79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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