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의 신성한 일 (마 9:35)
오늘날 일자리를 얻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자리 박람회나 사회적 기업 등을 통해 여성 일자리, 청년 일자리, 노인 일자리 등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자리를 만드는 이유는 경제 문제를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일하는 보람과 기쁨도 주기 때문입니다.
칼라일(Carlyle)이 쓴『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라는 책을 보면 일자리의 행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은 복이 있다(Blessed is he who has found his work).” 잠언 3장 22절에도 일자리의 즐거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멘.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이처럼 복이 있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직장인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잡 코리아(www.jobkorea.co.kr)가 직장인 남녀 884명을 대상으로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치 있는 일’이라 대답한 응답자가 전체의 82%를 차지했습니다.
직장인들은 일에 대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았느냐하면 ‘급여’에서 찾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의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는 질문에 ‘급여’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59%를 차지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일의 만족 43%, 목표 달성19%, 배움 18%, 조직에 기여도 11%, 팀워크 10%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직장인들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부분은 급여, 즉 돈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인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Gai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then Give all you c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한 말인데 “벌수 있는 한 벌어라, 저축할 수 있는 한 저축하라, 나눠줄 수 있는 한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 “Gain, Save, Give”인데 “벌어라, 저축하라, 나눠주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멋있게 돈을 벌고 멋있게 돈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일꾼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일이 가치가 있습니다. 이 일은 가치가 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신성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성한 그 일은 어떤 일일까요? 그 일은 영혼의 일거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일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본문을 합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때 ‘두루 다니사’의 시제를 보면 ‘두루 다니다(페리아고)’의 미완료형입니다. 헬라어 시제로 미완료형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반복해서 계속 진행해오고 있는 동작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과거 진행형(be동사 과거형+~ing)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NASB 영어 성경을 보면 ‘was go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루 다니사’라는 말씀은 “두루 다니고 계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고 계셨습니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과거부터 반복해서 계속 두루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할 일 없이 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일하시면서 두루 다니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두루 다니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세 가지의 신성한 일을 하시면서 두루 다니고 계셨습니다. 이 일이 바로 우리 영혼의 일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3대 사역인 세 가지의 신성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두루 다니사’라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보면 헬라어로 동사와 형용사 역할을 하는 현재분사가 3개 등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한 일 세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며’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고 계셨는데 무엇을 하시면서 다니셨는가하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다니셨고,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다니셨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면서 다니셨습니다.
첫 번째 신성한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물불 안 가리는 사람입니다. 넌센스 퀴즈입니다만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119 구조대원입니다. 그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영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신성한 일은 마치 119 구조대의 역할과 같습니다. 불에서 건져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19 구조대는 세상 불에서 끄집어내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신성한 일은 지옥 불에서 끄집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을 끄집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자신의 온 몸을 던져서 건져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도 불에서 끌어내라고 했습니다(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도 천국 복음을 전파해서 지옥 불에서 끄집어 내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119 구조대처럼 천국 복음을 전파해서 이웃에게 붙은 지옥 불을 열심히 꺼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을 끈다고 성령의 불은 끄면 안 됩니다(살전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기도의 불도 끄면 안 됩니다(레 6:13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그러나 지옥 불이 붙는 것은 꺼야 합니다.
두 번째 신성한 일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신성한 일은 마치 학교와 같습니다. 학교에서 인성과 예절교육을 시키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가르칩니다. 성장과 성숙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잘 가르치고 잘 배울 때 세상을 잘 경영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인격 훈련은 뒷전이고, 기능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영적인 학교인 주일학교가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학교처럼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 하나님의 자녀를 교육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망은 주일학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성한 일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구원의 길과 생명의 길과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 번째 신성한 일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입니다. 이 신성한 일은 마치 병원과 같습니다. 병원은 몸과 생각과 정신이 아픈 사람을 치료합니다. 생명을 구조만 하면 되겠습니까? 구했으면 치료해주고 삶을 살도록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구조된 이후의 삶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병원인 교회도 생명을 구원하되 더 풍성한 삶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몸과 정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영혼까지 치료해줍니다. 또한 삶과 환경과 복지까지도 돌보아줍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모든 약한 것과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셔서 건강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죄인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은 죄인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처벌합니다. 감옥에 분리시킵니다. 학교에도, 직장에도 설 곳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문턱을 높이고 수준을 높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쳐서 골라냅니다. 수준별로 가려냅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약하고 힘 없고 죄 있는 사람은 설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인이 와서 의인이 되는 곳입니다. 문턱을 낮춥니다. 시험을 쳐서 교인이 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수준과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다보면 서로 시험에 들 일이 생깁니다. 서로 분쟁도 생깁니다. 약하고 병들고 힘 없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치료받고, 새로워지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모습이 정상입니다. 성자만 모이고 거룩하기만 한 교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차츰차츰 건강하게 자라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놀라운 사랑의 피로 이 모든 것을 용광로처럼 녹여주셨습니다. 마귀에게 눌린 자를 치료해주시고, 병든 몸과 마음도 치료해주시고, 죄인을 용서도 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치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면서 치료해주신 예수님처럼 서로 이해하고, 서로 참아주고, 서로 기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과 눈길로 서로 용서해주고, 서로 축복해주고, 서로 너그럽게 대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해 참아주시지 않고 용서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참 좋으신 예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해주시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은혜를 입은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주고, 고쳐주십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한 세 가지 일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끝나고 중단되어버린 일이 아닙니다. 미완료형입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보면 완료되는 일이지만 넓게 보면 완료되는 일이 반복해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한 세 가지 일이 그 당시에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런 일을 해오셨을까요? 본문 앞에 나오는 4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성한 일을 이미 하시고 계셨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본문은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루 다니사’의 시제를 보면 역시 미완료형입니다. 반복해서 계속 신성한 세 가지 일을 해오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시제가 미완료형이라면 이보다 앞서 일해 오셨다는 말씀인데 언제부터 일까요? 4장 17절을 보면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다음에 본격적으로 일하셨습니다. 그것을 4장 17절이 말해줍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비로소(아르코마이)’ 즉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요?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해서 계속 진행되어 이후의 일이 4장 23절에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인 9장 35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그럴까요? 그것은 시제가 미완료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완료, 즉 과거로부터 반복해서 계속 행동을 해오고 있는 동작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고 계셨는데 신성한 세 가지 일을 하시면서 두루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 동작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으신 이후로 일을 시작하셔서 부활 승천 전까지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36절) 반복해서 계속 이 일을 하셨습니다.
미완료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지금도 반복해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완료형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출발해서 현재까지 반복해서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한 세 가지 일을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반복해서 계속 진행하고 계십니다. 어떻게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사도와 같은 직분자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 사실을 잘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진 사도 베드로와 열한 사도, 성령 충만해진 스데반과 빌립 집사 등을 통해 신성한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28장에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감금당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였습니다. 왜 영접했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28장 30절의 ‘영접하고’의 시제는 ‘영접하다(아포데코마이)’의 미완료형입니다. 그래서 NASB 영어 성경에서도 ‘was welcom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접하고 끝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사도 바울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이어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골 1:18) 자신의 몸인 교회와 직분자들과 성도들에게 그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길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신성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ACT 29’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28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을 통해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미완료형의 묘미입니다. 그 당시로 끝나고 중단되어버린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한 세 가지 일이 예수님으로 끝나고, 사도와 같은 직분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앞으로도 반복해서 계속 이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이미 끝나고 중단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주어졌고 진행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신성한 세 가지 일이 성령님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전파하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 고치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뜨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신성한 세 가지 일에 이전보다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77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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