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갈 5:13-15)
내일은 8·15 광복절입니다. 그 지긋지긋한 일제 치하에서 독립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독도 문제로 또다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성환 외교부장관이 1954년에 일본에 보낸 외교서한을 공개하면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한다.”
이것을 볼 때 독립했다고 해서 저절로 계속 자유와 평화를 누린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계속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유와 평화는 지키는 나라와 민족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십시다.
한 번 여쭈어보겠습니다. 나라가 해방만 되면 만사가 오케이입니까? 아닙니다. 해방 이후의 과제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헌법의 목적과 규정대로 성실하게 지켜나갈 제헌 국회도 선출했습니다. 이것을 온 나라가 귀하게 여기고 지난 7월에 제헌절을 국경일로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청소년 통일미래 글로벌 리더십 캠프’ 발대식에 참석하셔서, “통일한국은 성숙한 ‘자유민주복지국가’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현 장관은 “8000만 인구를 가진 통일한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견국가가 될 것이며, 밖으로는 지역안정과 국제평화 질서에 기여하는 ‘비핵평화국가’, 정치·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선진일류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미래 통일 한반도의 튼튼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통일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8·15 광복절을 맞이한 우리 교회와 성도는 어떤 자유와 평화를 얻었으며, 그 자유와 평화를 어떻게 해야 잘 지키고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은 많은 것에 억눌려 있어서 자유와 평화가 없었습니다. 마귀의 쇠사슬에 묶여 마귀의 종노릇했습니다. 결국 마귀가 속이고 유혹하는 대로 가다가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한편으로는 마귀가 주는 쾌락 속에서 방황하면서 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엔 자유가 없었고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영원히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괴로움도 즐비합니다. 생고(生苦), 심고(心苦), 인고(人苦), 체고(體苦), 영고(靈苦) 등의 고통이 있습니다. 생고는 ‘생활고’인데 사는 게 고생스럽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대로 고생합니다. 심고는 마음의 고생을 말합니다. 마음이 고생하면 우울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인고는 사람의 고생을 말합니다. 사람끼리 서로 다투니까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체고는 신체의 고생을 말합니다. 질병이 들고 아파서 괴로워하면서 고생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고생은 영고입니다. 영고는 영혼이 고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고생하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쇠사슬을 풀어버리셔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항공모함이 아무리 강력해도 닻줄에 묶여 있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나운 사자라 해도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 힘을 펴지 못합니다. 강한 것만 묶이고 약한 것은 묶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약한 강아지도 묶이면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풀어놓으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사람도 풀어놓으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도 자유와 평화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자유와 평화도 죄악과 죽음과 저주와 마귀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잘 산다고, 힘이 있다고, 이 자유와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마귀가 주는 견디기 힘든 여러 가지 악한 것에 묶여 살고 있을 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마귀의 쇠사슬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죄악과 저주와 멸망과 죽음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가난과 괴로움과 질병의 쇠사슬로부터도 풀어주셨습니다. 시기와 불화와 분쟁과 미움의 쇠사슬로부터도 시원하게 풀어주셨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교회에 오면 자유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저것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매인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줍니다. 교회에 다니면 답답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께 매이고 교회에 매인 삶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성도는 주일에 산으로, 들로, 직장으로, 학원으로 가지 못하고 마치 교회라는 새장 안에 갇혀 사는 새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추신수 야구선수가 야구장 안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박지성 축구선수가 축구장 안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박태환 수영선수가 수영장 안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그곳이 답답하다고 뛰쳐나오면 오히려 선수로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땀을 흘리면서 연습하고 경기하면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성도도 예수님 안에 자유와 평화가 있고, 교회 안에 자유와 평화가 있고, 빛나는 인생이 있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자유와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까? 누구를 만나야 자유와 평화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참된 자유와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현재보다 더 좋아져야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참된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사 61:1, 눅 4:18) 자유와 평화가 있는 사람이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를 얻으면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따라 해보세요. “주여, 나에게도 이 자유와 평화를 주소서!”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자유와 평화가 있다고 해도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와 평화가 없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와 평화가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인품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많은 재산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참된 자유와 평화가 없다면 오히려 그것에 묶여 삽니다. 종노릇합니다.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일평생 묶여 끌려 다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평화가 없다면 이처럼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유와 평화를 동서고금,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십니다. 시편 146편 7절은 그것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아멘.
본문 13절 상반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제를 보면 과거 수동형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의미는 성도는 이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이 자유와 평화를 주시려고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마치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꼼짝 못하도록 하셔서 아들의 자유를 회수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아들을 징계하는 대신에 아들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사야 53장 4절에서 6절은 이 사실을 잘 예언해주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악으로부터의 자유, 죽음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 각종 저주로부터의 자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잘못된 습관과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시기와 다툼과 미움으로부터 자유 등의 모든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서 죄와 죽음이 떠나가고, 질병이 떠나가고, 가난이 떠나가고, 근심걱정과 고통이 떠나가고, 마귀가 떠나가고, 잘못된 습관과 생각이 떠나가고, 시기와 다툼과 미움이 떠나갑니다. 이러한 참된 자유와 평화가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유와 평화를 잘 지키고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진정한 독립은 자유와 평화를 지킬 때 계속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요? 자유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 양심의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9조에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했습니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신체의 자유도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도 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라고 밝히면서 종교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 자유는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고 평화를 깹니다. 저 유명한 키케로(Cicero)는『공화국론(De Republica)』에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지나친 자유는 국민과 개인을 엄청난 노예 신세로 인도한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묶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를 남용하면 안 됩니다. 나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매여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권리에도 의무가 뒤따릅니다. 본문 13절 하반절을 보면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잘 지키고 잘 누리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우리가 가진 자유로 마음대로 남용해서 이웃을 근심시키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웃을 기쁘게’(롬 15:2) 하는 데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 자유를 조심해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9장 19절에서는 스스로 종으로서의 자유를 택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우리는 자유를 얻은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영적으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이처럼 생각과 마음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면 자유와 평화가 없습니다. 자신의 온갖 생각과 마음으로부터의 쇠사슬로부터 묶여 지냅니다.
사람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면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질서가 깨지고 평화가 깨지고 세월이 갈수록 사는 게 오히려 힘들어집니다. 인간의 사상과 학문과 생각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으면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 말씀 기준으로 살면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들이 자유를 주고(요 8:36), 진리가 자유를 주기(요 8:32) 때문입니다.
어떤 판단을 할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 판단 기준에 따라 묶입니다. 인간 본성의 종으로 묶여 살거나 예수님과 말씀의 종으로 묶여 삽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묶여 살아야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성경이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냐?” 선택에 따라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못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속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집이 넓다고, 차 안이 넓다고, 땅이 넓다고 생각과 마음까지 넓어집니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가 없으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사로잡혀 삽니다. 아무리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넓은 공간이라 해도 자신의 좁은 마음 안에 “꽁꽁” 묶여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참자유인과 참평화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환경과 사람을 초월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풀려납니다. 자신의 사고에서 풀려납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을 통해 가르쳐주신 성경의 교훈을 따르게 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아멘.
이렇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곳곳마다 심령마다 참된 자유와 평화가 임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 마음은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증오심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합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깁니다. 서로 참아주고 서로 친절하게 따뜻하게 대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미워하고 물어뜯고 싸우다가 피차 멸망하는 일에서(본문 15절) 벗어납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복잡하고 괴로운 쇠사슬에서 풀려나게 하셨고, 우리가 그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이 도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온갖 차갑고 무거운 쇠사슬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생활고에서, 마음 고생에서, 사람 고생에서, 신체의 고생에서, 영혼의 고생에서, 그리고 죄악과 저주와 죽음과 마귀의 쇠사슬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이 자유와 평화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진정한 영적 독립은 자유와 평화를 두려운 마음으로 지키는 사람의 것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인간과 초인간(Mans and Superman)』이란 책에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자유와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 함께 자유와 평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올해 2011년 8·15 경축사는 ‘함께 사는 따뜻한 사회’를 강조합니다. 영적인 광복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몸과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머물지 마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이웃을 기쁘게 하는 곳까지 나아가십시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의 종이 되어 서로 섬기면 서로 미워하고 물어뜯고 싸우다가 피차 멸망하는 일에서 벗어나고 자유와 평화를 더 잘 누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 참된 자유와 평화가 이웃과 가정과 온 나라와 세계까지 더 널리 더 따뜻하게 퍼져나갈 것입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2 담임목사 이서영]
'성경적강해 >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 (신 27:1-30:20) (0) | 2015.07.17 |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갈 5:18-26) (0) | 2015.07.17 |
인생살이에 단맛을 더해주소서! (시편 19:7-14) (0) | 2015.07.17 |
기쁨을 뿌려주시는 하나님 (시 97:10-12) (0) | 2015.07.17 |
행하시는 하나님 (빌 2:12,13) (0) | 2015.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