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으로 (룻 1:1-22)
페르시아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서 지배받던 때입니다. 그 당시에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지키고 있는 유명한 축제가 생겨났습니다. 부림절입니다. 이틀간 공휴일로 보내면서 에스더서를 낭독합니다.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도 합니다. 얼굴에 분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칼싸움도 합니다. 하만의 귀를 상징하는 삼각형 과자를 먹기도 합니다.
부림절은 이스라엘이 하만의 음모로부터 극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유다인이 몰살을 당하게 되자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인들이 크게 애통하고 금식하면서 울며 부르짖었습니다(에 4:3). 그러자 하만과 하만의 열 아들과 유다인을 미워하고 치려고 했던 자들이 오히려 죽었습니다(9:14-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게 되었습니다(8:16).
왕궁에서 존귀한 자가 되고 각 지방에 명성이 퍼진 모르드개가 한 규례를 만들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림절의 시작입니다. 에스더 9장 22절입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우리 믿는 성도의 삶도 바로 이 부림절과 같은 삶입니다. 우리의 삶도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이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에 가서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 22절을 보면 보리 추수하는 때에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가 며느리로 맞이한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되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1절과 마지막 22절을 비교해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의 측면에서 보면 엘리멜렉은 없고 대신에 그의 아내인 나오미가 등장합니다. 엘리멜렉의 두 아들 역시 나타나지 않고 대신에 며느리가 나타납니다. 장소의 측면에서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그리고 다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것을 보여줍니다. 농사의 측면에서 보면 흉년이 든 것과 추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의 시대로, 빈곤한 지역에서 풍부한 지역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세 가지 질문부터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왜 모압지방에 가서 살지 말아야했는가? 흉년이 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추수하고 있었는가?
먼저 엘리멜렉이 살던 시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엘리멜렉이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본문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엘리멜렉 가족이 살던 그 시대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사사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왕이 있기 전에 사사들이 활동하던 사사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대는 사사시대가 맞긴 하지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씀은 사사가 직접 통치하고 있던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사가 직접 통치하였다면 그 땅에 흉년이 들거나 정세가 불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가 직접 통치할 때는 그 땅이 평온하였습니다. 사사기 2장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그러나 2장 15절을 보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볼 때 그 당시 시대는 사사시대가 맞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가 직접 통치하던 때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사가 있을 때에는 흉년이 아니라 평온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옷니엘 사사가 있었을 때 사십 년이나 평온하였습니다(삿 3:11), 그러나 옷니엘이 죽고 나자 열여덟 해를 모압 왕에게 억눌려 살았습니다(3:14). 그러다가 여호와께 부르짖자 에훗이란 사사가 등장하여 모압을 굴복시키자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3:30).
그런데 이스라엘이 또다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번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기자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받았습니다(4:1-3). 이스라엘이 다시 돌이켜 부르짖자 이번에는 드보라 사사가 나타나 진멸시키자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5:31). 이것을 볼 때 사사시대라 해도 사사에게 직접 통치를 받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평화로운 복된 통치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시대가 사사시대이지만 사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풍성한 은혜와 축복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받지 않으면 흉년을 당하고 슬픔을 당합니다. 사사기를 끝마치면서 남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룻기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역사적인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시대 사람들은 왕이 없었으므로 각자가 생각하기에 좋은 대로 판단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평온한 삶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옳다고 여기고 살아왔는데 그 결과는 원하지 않는 삶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이신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거부하고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사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통해 신정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없을 때에는 신정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평온과 흉년이란 반대의 결과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여호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가 이끌어주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복된 신정통치가 이루어지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통치를 수행해줄 우리의 사사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나라에서나 그 어디든 영적인 지도자가 꼭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해석하고 영적으로 이끌어줄 영적인 지도자의 통치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와 기독교계는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세워주시고 사용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그 조직 안에 있으면 그 조직은 복되고 평안하고 풍요하게 됩니다. 아니 단순히 있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들의 통치를 잘 따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풍요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망이 희망으로, 빈곤이 풍요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영적인 지도자를 잘 따름으로 사사가 없는 혼란하고 캄캄한 암흑시대에 마침표를 찍어서 흉년이 떠나가고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엘리멜렉이 모압에서 살게 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엘리멜렉이 왜 모압지방으로 떠났을까요? 본문 2절에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 한 가족이 모두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가서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떠난 이유는 단순합니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흉년이 들면 굶어죽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릿고개를 노년층은 구구 절절히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젊은 세대는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쌀이 남아도는데 어떻게 보리가 모자라서 굶어 죽는단 말인가? 라면이라도 먹으면 될 텐데.’ 설명해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접 체험하거나 아니면 그런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자신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아야 합니다. 흉년은 무서운 재앙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이 흉년을 당해 떠났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당연히 가장으로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있어야 할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받을 때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나 성경 말씀의 깨달음이나 영적인 사람이나 환경 등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직접 일일이 말씀하시지도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분별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반응한다면 얼마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잘 받을 수 있습니다.
판단하고 이끌어줄 왕과 사사가 없이 인간적인 판단을 하면 흉년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왕이신 예수님과 사사가 되는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때론 사명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을 상징합니다. 이곳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므로 믿음의 조상답게 약속의 땅에 머물면서 흉년을 잘 참아냈을까요? 창세기 12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큰 복을 받고 보여주신 땅에서 제단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애굽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거기서 큰 재앙을 당할 뻔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사랑하는 아내가 애굽 왕의 여자가 될 뻔했습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기근이 왔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창세기 26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땅에 있으면 함께 있으면서 땅도 주고 자손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고 이삭 때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애굽에는 가지 않았지만 블레셋 그랄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돌보아주시지 않으셨다면 역시 큰 재앙을 당할 뻔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다가 블레셋 백성 가운데 한 사람과 동침하게 할 뻔했습니다.
우리는 힘들어도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에 있어야 하고, 학생은 학교에 있어야 하고, 가족은 가정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인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떠나면 안 됩니다. 흉년이 들어도 살기가 힘들고 공부하기가 힘들고 신앙생활이 힘들어도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흉년이 들어서 끝장인 것 같아도 그 자리는 축복과 은혜와 약속의 땅입니다. 계속 기근이 드는 곳이 아닙니다. 일시적입니다.
엘리멜렉이 흉년이 들어 떠나버렸던 베들레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계속 흉년이 들어서 그곳에 사는 수많은 유다인들이 모두 굶어죽었습니까? 아닙니다. 1장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버린 엘리멜렉에게는 어떤 일이 닥쳤습니까? 가족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엘리멜렉 자신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살려고 떠났다가 죽어버렸습니다. ‘병약’(마흘론)과 ‘낭비’(킬론)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고 재산도 낭비해버렸습니다.
우리도 흔히 흉년이 들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가정, 더 좋은 나라, 심지어 더 좋은 교회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있는 자리가 복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떠나서 다른 세상을 만나고, 떠나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떠나서 다른 교회를 여기저기 옮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던 일이 터질 수 있습니다. 가족이 죽는 것은 물론 다른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더 일어났습니까? 여호와께서 금지한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합니다(1:4). 그 많던 풍족한 재물이 텅 비게 됩니다(1:21). 마음이 심히 괴롭게 됩니다(1:20).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1:13). 흉년이 들었다고 좀 힘들고 어렵다고 떠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고 베들레헴을 떠나면 원하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일이 꼬이고 힘이 든다고 무조건 벗어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흉년이 들더라도 손쉽게 떠나는 것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룻이 “붙좇았더라”(1:14)고 했습니다. 우리도 강력한 접착제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붙어 있고, 직장과 학교에 붙어 있고, 나라에도 붙어 있고, 교회에도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블레셋에도 모압에도 내려가면 안 됩니다. 신앙을 지키고 사명을 지키고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이 희망으로, 빈곤이 풍요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모압에 가려던 생각을 깨끗이 버리시고 베들레헴에 머무셔서 영육 간에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생명의 양식을 충만하게 얻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추수하고 있었을까요? 본문 19절에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을까요? 모압 땅이 좋았다면 아마 그곳에서 편안하게 눌러 붙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도 잃고 재산도 잃고 마음마저 괴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떠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생각 때문에 되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어떻게 해서 되돌아왔을까요? 나오미가 되돌아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스스로 되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풍족했을 때는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오미가 되돌아오게 된 것은 살기 힘든 모압 땅에서 고국으로부터 날아온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흉년이 든 줄 알았던 베들레헴에 여호와께서 돌보아주셔서 흉년이 그치고 양식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이 기쁜 소식을 듣고는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통해 구원해주십니다. 자기 백성을 돌보는 방식이 있는데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는 방식으로 돌보아주십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요 10:10)라는 생명의 복음을 듣기도 하면서 들려주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듣고 돌이키면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한때의 실수와 잘못으로 괴로워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통해 계속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모압 땅에서 슬픔을 당한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길로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와서 기쁨을 누립니다. 모압 땅의 ‘마라’(괴로움)가 베들레헴에 오니까 ‘나오미’(희락)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기쁜 소식만 듣고 되돌아왔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일도 있었습니다. 전도하여 기쁜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교회로 올까요? 아닙니다. 쉽게 받아들이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큰 일이 터져야만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오미도 그런 일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불러 달라”(1:20)고 하였습니다. 나를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나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 결과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기”(1:20)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잘못 떠난 결과로 여호와께서는 비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징벌하셨고 여호와께서 괴롭게 하셨습니다(1:21).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엄하게 꾸짖고 벌주시고 괴롭히고 망하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님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돌보아주시고 붙잡아주시고 계십니다. 돌보아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과 은혜로 복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돌보셨고 이삭을 돌보신 여호와께서 나오미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비록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재산도 잃었지만 귀한 사람과 재산을 다시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고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룻이란 귀한 며느리를 얻었고,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란 인품이 좋은 재력가를 얻었고, 그를 통해 재산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기쁜 소식을 주셔서 되돌아오게 하시고, 벗어날 때는 쳐서라도 되돌아오게 하셔서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에서 떠났을 때 우리를 괴롭혀서라도 되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는 모압에 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답답해하고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돌보고계십니다. 생명의 양식이 풍부한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오게 하십니다. 더 좋은 사람을 얻게 하시고 재산도 되찾아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왕 아래에 있어야 평온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평강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망이 희망으로, 빈곤이 풍요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잘 받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함께 하시는 영적인 지도자의 지도를 잘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조금 힘들다고 모압 땅으로 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베들레헴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라가 될 수도 있고 나오미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흉년이 들어 사는 것이 힘들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괴로워도 잘 참아내고 자리를 끝까지 지키십시다. 그러면 이제까지 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돌보아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도 잘 돌보아주시고 우리의 자리도 크게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망이 희망으로, 빈곤이 풍요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어 흉년은 멀리 떠나가버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 가운데 거두어들이는 추수는 풍성할 것입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92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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