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수 23:3-11)
“국군의 날(R.O.K. Armed Forces Day)은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을 기념하며, 국군의 위용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정한 기념일로 매년 10월 1일입니다. 과거의 육군의 날(10월 2일)·공군의 날(10월 1일)·해군의 날(10월 11일)을 하나로 합쳐 1956년에 제정하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동부전선에서 육군 제3사단이 앞장서 38선을 돌파, 진격한 날인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이날이 되면 사열·시범 전투 등 각종 행사를 국민들 앞에서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위키 백과사전]
2011년 올해는 제63회입니다. 2011년은 또한 6·25전쟁 61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국군을 창설한 년도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입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식간에 남한 땅은 공산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국군이 힘써서 막아주었기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참여해서 북한군과 중국군과 소련군의 연합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유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유롭고 평화와 번영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 땅이지만 불과 61년 전에는 이 평화로운 땅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마저 동원되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재산도 잃고 가족도 잃었습니다. 국군은 있는 힘을 다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적군의 탱크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전사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어서 남한 땅을 빼앗기고 빼앗기다가 모두 빼앗기고 대구에서 진주에 이르는 국군의 최후방어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정부를 비롯해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이 나라는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언제 모두 점령을 당해 공산화될지 몰랐습니다. 이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일어나 합심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한국기독신문의 오혜진 기자는 2010년 5월 22일에 그 당시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부산은 ‘피난처’ 뿐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발판과도 같았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6.25 직후 부산 초량교회에서 가진 기도회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초량교회에서 가진 기도회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였다. 또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애통의 기도였다. 이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올해 6·25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부산지역 교회의 영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그 기도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2007년 6월 13일자 부산성시화신문을 보면 김은진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50년 7월 2일(주일). 이승만 대통령은 6.25가 일어난 지 정확히 1주일 만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이때 부산 초량교회(현. 김대훈 목사)에서는 6.25 전란에 따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열리면서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많은 기독교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한국과 한국민을 위해 기도했다. 1950년 6월25일 오후 3시 뉴욕 유엔본부(서울 시간 6월 26일 오전 4시)에서 6.25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뉴욕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상임 이사국은 미. 영. 불. 중. 소련 등 5개국이고, 비상임 이사국은 쿠바. 에쿠아돌.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등 6개국 도합 11개국이 안보리 이사국이었다.
특기할 것은 유엔안보리가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열린 탓에 각국 대표들은 거의 본국의 훈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안보리가 소집되어 소련과 중국 대표가 반대를 하면 한국전 참전은 안보리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어느 한 나라라도 반대를 하면 그 안건은 심의나 표결을 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유엔 참전이라는 대한민국 운명을 좌우할 유엔안보리회의에 우리의 원수이자 참전 반대국으로 투표하게 될 것이 분명한 저 두 적성국 대표를 하나님께서는 아예 참석치 못하도록 손을 쓰셨다.
중국 대표는 이날 차를 타고 회의장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고, 엔진이 고장 나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고, 한편 소련대사는 전날 저녁 늦게까지 파티에서 과음을 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나 병원신세를 지느라 도저히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반대국 대표들의 불참으로 극적으로 유엔군의 한국 참전 결정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초량교회에서 드린 구국기도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사 안보리의 한국 참전이 절대 다수결로 통과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고 풍전등화의 위난에서 구원코자 미리 이렇게 손을 써놓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스탈린이 김일성의 연락을 받고 말리크가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면 유엔참전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이 나라가 이렇게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번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목숨을 던져 싸운 우리나라의 국군과 16개국의 UN연합군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국군과 연합군의 힘이 컸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이들을 앞서서 이끌고 싸워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더라면 국군과 연합군이라 해도 부산에서조차 점점 더 밀려서 이 땅의 운명이 어떻게 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께서 나서서 싸워주셔서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전쟁의 포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돌봐주셔서 다시 일어난 나라입니다. 사무엘 상 17장 47절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스가랴 14장 3절에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본문 3절과 9절은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것을 말해줍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싸워 주셔서 북한군들의 연합군을 물리쳐주신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을 반환하는 식을 할 때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영도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돌려드립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 시민들은 공산군의 압살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인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으며 ‘대한민국을 되찾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홍관희 박사의 안보전략 연구소]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 성도들도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날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 전쟁을 보면 불화살을 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도 그러한 전쟁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대적인 마귀가 불화살을 비처럼 쏘아댈 때 막아낼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은 이것을 생생하게 말해줍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요한계시록 19장 19절 역시 영적 전쟁을 말해줍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인 것은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 17장 47절을 봉독해드리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영적 전쟁을 우리가 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번번이 패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과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그 계략과 힘을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앞서서 해주시고 계시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싸우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십니다. 고귀한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밤낮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자기 자신 때문에 투쟁하는 싸움일까요? 고귀한 싸움은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싸움입니다. 프랑스에는 4대 위인이 있다고 합니다. 루이 14세, 나폴레옹, 잔 다르크, 드골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싸움을 잘했고, 사람을 많이 죽였고, 독재를 잘 했습니다. 이런 것이 무슨 위인이 될 조건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위인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렇게 했기에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기 때문에 싸우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대대로 싸우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싸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사람들이 온갖 약을 올리고,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도 예수님은 그들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잠잠한 양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시고 마귀와 싸우고 저주와 죄악과 허물과 연약함과 싸워서 이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이 모든 싸움은 우리를 위한 싸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목숨을 장렬하게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싸워주셨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마음을 다해 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기 자신 때문에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싸우신 것은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와 복지를 위해 싸워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좀 사랑해주면 안 되겠니?”라고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조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샤마르’인데 ‘중시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잘 보존해나가자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3, 10),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좀 사랑해주면 안 되겠니?” 이 음성이 우리의 마음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싸우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위해 오늘도 지금도 싸우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일당천의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본문 10절은 말합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많은 사람과 많은 무기를 가지고 싸우지 않게 하십니다. 그렇게 싸우면 하나님께서 싸우신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당천을 하게 하신 이유를 10절에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당천의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수많은 연합군과 전쟁할 때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은 삼백 명으로 상대하게 하셨습니다. 무기도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이었습니다. 아이들 전쟁놀이도 아니고 실제 전쟁인데, 그것도 수많은 연합군 군사와 맞서 있는 전쟁인데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보기 좋게 통쾌하게 승리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누가 이기게 하였습니까? 기드온이 이기게 했습니까? 척 보아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당천의 방식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삼손이 혼자서 몇 명을 상대했지요? 하나님의 영이 갑자기 임하자 나귀 턱뼈를 가지고도 천 명을 죽였습니다(삿 15:14-16).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하고 많이 가지려고 하는 지혜와 지식과 돈과 권력과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사용해주셨습니다. 모세 역시 왕궁의 모든 권력과 힘과 지혜와 지식과 보물을 가졌을 때는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 있을 때 불러주셔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사용하셔서 전쟁하십니다. 계속해서 26절부터 28절을 보면 그것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힘을 길러야만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힘을 기르고, 지식의 힘, 권력의 힘, 돈의 힘, 조직의 힘을 기릅니다. 당연히 이러한 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있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앞에서 싸워주시는 하나님’(5,9)을 우리의 전쟁터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초라해보여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나이가 많아 늙어 힘이 없는 모세의 손에 잡혀 있던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듯이, 사도 바울이 쓰던 하찮은 손수건과 앞치마가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고 마귀까지 쫓아내듯이(행 19:12) 우리가 가진 연약한 그 무엇도 승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 쓰임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싸우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위해 오늘도 지금도 싸우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야 할까요? 하나님의 전쟁 방식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무기입니까? 그 견고한 만리장성과 같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우리가 앞장서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시고 우리가 뒤따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전쟁 방법대로 싸우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점령할 때 매복하는 방법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수 8:1,2). 그래서 이겼습니다.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방식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육신으로 싸울 수도 없고 싸워봤자 패배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적 전쟁이기에 영적인 갑옷을 입고 영적인 무기를 들고 싸우라고 합니다(엡 6:11-17). 전쟁에서 무방비상태로 나가면 죽기에 딱 알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영적 전쟁의 포화 속에서 무엇을 가지고 싸우러 나가시렵니까?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생명과 나라를 위해 고귀한 싸움을 싸우고, 영적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서면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가 나서면 싸우기 벅찹니다. 영적 전쟁은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일당천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무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큰 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다 확실한 일당천으로 통쾌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힘으로 힘써 싸워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9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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