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전 13:1-7)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말세의 징조가 있습니다. 요즈음 많이 듣는 말이 “말세다, 말세”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말세라고 하시는지요. 성경에서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4). 이처럼 사랑이 잘못되면 말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필수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도 사랑이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기적인 부자도 권력가도 그 귀한 왕자도 공주도 사랑이 빠지면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잘 아시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정의를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성경은 고전 13장입니다. 그 가운데 4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정의 가운데 맨 처음에 등장하는 정의는 ‘오래 참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도 ‘참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말세의 징조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비참한 말세를 당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행복과 기쁨을 누립니다. 말세의 징조는 자랑하지만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말세의 징조는 교만하나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말세의 징조는 비방하지만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말세의 징조는 조급하지만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 사랑을 누가 하였습니까? 부모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보고 똥·오줌을 못 가린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걷지 않는다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야단치기는커녕 잠잠히 사랑하면서 오래 기다려줍니다. 자라날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그런데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이 사랑을 잘 베푸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정말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실까요? 부모님을 떠올려보거나 부모가 되어 아이를 길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를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기 때문에 콧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부모님보다 더 크게 기뻐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생명과 더 풍성함을 위해 단호하게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둘도 없이 아끼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속을 썩이고 귀찮게 구는 아들이라서 아버지 곁에서 세상으로 보내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토록 옆에 두고 싶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과 10절은 그 애틋하고 기이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사랑을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길이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사도 바울 역시 증거하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시고 길이 참아주셔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서 한 방에 끝냈다면 우리 가운데 아직도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누가 몸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구약의 율법대로 했으면 돌에 맞아죽거나 손발이 잘리거나 눈이 뽑혔을 것입니다. 날마다 초상을 치르거나 반신불구가 되어 교회에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 15). 그러한 성품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고 온 몸이 멀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오래 참아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면 어떤 사람을 떠올리십니까? 신비로운 능력을 행하는 사람일까요? 그런 은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오래 참음이라고 말해줍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표시를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능력보다도 가장 먼저 모든 것을 참는 것이 바로 사도가 된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고 아끼는 디모데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참는 것이 사도의 표시요, 참는 것이 주님의 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더 확장하면 참는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오셨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몰라주고 오히려 강도처럼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나서서 말고의 귀를 검으로 베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1장은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잠언 25장 15절을 보면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성질부터 부리고 난동을 부리면 일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점잖고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은 자신의 뜻을 이룹니다. 잠언 12장 16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억울한 모욕을 받으셨지만 잠잠하셨습니다.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래 참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2절은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더 나아가 히브리서 6장 15절은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려면 오래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5절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사랑하시렵니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은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로새서 3장 12절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겉옷이든 속옷이든 하나라도 덜 입고 다니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오래 참음의 옷을 입지 않고 다니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하게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은 이렇게 권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그런데 무조건 오래 참기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오래 참아주기만 할 뿐 가르침과 교육마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참아주는 가운데 가르쳐야 합니다. 교육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에서 교육을 포기하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래 참아주는 가운데 잘 가르쳐야 하고 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 양성도 잘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에 사도 바울은 아끼는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디모데에게 권면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인간 사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래 참음의 지혜요 능력이요 사랑입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8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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