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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위로해주시는 하나님 (사 57:15-18)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위로해주시는 하나님 (사 57:15-18)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유다 왕국에서 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그 당시 상황과 바벨론 포로기간과 그 이후에 있어날 사건들에 관해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을 쓴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헨리에타 미어즈는 “예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예언서가 전체 성경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계획을 나타내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켐벨 몰간은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를 위한 메시지, 장차 있을 일에 대한 메시지, 우리 시대를 위한 생생한 메시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한 시대의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쓴 이사야서의 핵심 주제는 심판과 구원입니다. 이사야서는 66권인데 마치 신구약 성경을 요약해 놓은 것 같습니다. 신구약 성경책은 모두 몇 권입니까? 우리는 “39는 27”이라고 구구단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입니다. 이사야서도 이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39장이고 두 번째 부분은 27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 나오는 39장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구약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27장은 회복에 대한 메시지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에 초점이 모아진 신약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이 가운데 위로의 책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사야 40-55장은 하나님의 임박한 구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추방을 당한 자들에 대한 위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53장 5절과 6절인데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예수님께서 찔리시고, 상처받으시고, 멍드신 것은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56장과 57장을 계속해서 보면 의와 악을 대비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셔서 돌아올 수 있도록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7장 18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러한 특징을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알야숩’이란 아들이 있는데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7:3)는 뜻입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에서 아들의 이름이 뜻하는 상징은(8:18) 예루살렘을 공격한 수리아와 북쪽 이스라엘의 연합군 가운데 일부만 그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7:4-9). 적군이 패전해서 패잔병이 되어 일부만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종결된 이후로는 이스라엘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0장 20절과 21절에서 말해줍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아멘.

 

그 메시지는 그 당시 상황과 그 이후 상황에서 그치지 않고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1장 5절은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악에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남은 자로 만들어 품에 안아주신 것입니다.

 

이단은 이런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의 상징 숫자인 144,000명에 들어가려고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144,000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12×12×1,000=144,000입니다. 앞의 12는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하고, 뒤의 12는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하고, 1,000은 무한숫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구원을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단은 이러한 위로는커녕 짐이 됩니다. 자신도 몸부림 쳐야 하지만 다른 교회에 들어가 혈안이 되어 빼앗아 채우려고 합니다. 거기에 무슨 위로가 있고 평강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짐을 대신 져주신 위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주셔서 무조건 선택하여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는 것을 그들은 불행하게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말씀은 다른 선지자의 예언에 비해 가장 많은 분량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서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사야서는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가장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복음적인 선지자’ 또는 ‘다섯 번째 복음서 기록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부분을 예언하였기에 4복음서 다음의 5복음서로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는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받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이사야서에서 만큼 인용된 책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를 깨닫게 하고 의무를 이행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환난 가운데 위로를 얻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사야가 살았을 때는 산헤립의 침공이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이때를 위해 기록해 둔 격려의 글 속에서 복음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처음 부분은 죄에 대한 책망과 임박한 심판을 알리는 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은 위로의 말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위로하셨듯이 오늘날에도 성령님과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귀한 위로를 받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위로가 위로다워지려면 죄를 깊이 깨달을 때 더 큰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55장 3절을 통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들어서 살아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7절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아멘.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을까요?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본문 앞에 나오는 57장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그들이 어디로 갔느냐하면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골짜기에서 주운 매끄러운 돌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잘 몫을 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우상에게 정성을 다해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실까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여라.” 아닙니다. 10절을 보면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헛되고 거짓된 우상을 통해 위로를 얻고 행복을 찾기 위해 피곤해하면서도 먼 길을 마다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 가고 있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직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를 외면하고 우상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길이든 어떤 길이든 달려간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자신의 눈을 가려서 멀게 만든 것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도, 메시야도, 자신의 행복한 인생길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더 친하게 지낼 신들이 필요했습니다. 까다롭게 참견하는 신이 아니라 자신들을 편안하게 대해줄 신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 신으로 우상은 적격이었습니다. 매끄러운 돌로 만든 우상이 “내게로 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영혼이 살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이 말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만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라고 말도 하지 않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3절을 통해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우상을 그렇게도 잘 섬겼으니 환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그 우상에게 찾아가 사정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무인 그 우상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우상이 너를 구원하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바람에 날려 가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인 자기를 믿고 의뢰하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매튜 헨리는 “그들은 세상에서 교회의 특권을 누리며 결국에는 천국의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 영육간에 복을 받고 금생과 내생에서도 복을 받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바람에 불려가기는커녕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시 1:3-4).

 

우상과 하나님, 어느 쪽이 참 신일까요? 어느 쪽을 믿고 따라가야 할까요?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잘 했더라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아니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까지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성은 그 뿌리가 만만찮습니다.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탐심이란 우상의 힘은 대단히 위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간곡하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죽여야 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가만두면 언제 어느새 탐심이 자라나서 탐심이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탐심이  하나님보다 보다 더 큰 결정권을 가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심이 있으면 마음에 위로를 받기가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지 못하고 탐심이란 우상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우상은 구원도 위로해주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매튜 헨리는 탐심에 대해 말하면서 “탐심으로 말미암아 돈을 신처럼 섬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탐심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에 돈을 아낌없이 바쳤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신처럼 섬기지만 우상을 섬기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바친다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어서 “탐심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매우 진노하게 하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치셨고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탐심을 책망하셨으며 그들이 탐닉하고 갈구하던 바로 그 대상들을 통해 그들을 징벌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탐심이란 우상은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의 그 마음을 나타내주십니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하나님께서 못 본체 하시면 우리 인생은 그 순간에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마귀에게 어떻게 당할지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끔찍합니다. 그런데 탐심을 마음에 품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버리면 그런 일을 언제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탐심에 물들어 있고 마음이 완고하기 그지없는 우리 인생은 화를 자초하고 심판을 자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우리 인간에게 역사해주시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개혁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돈이란 탐심에서 벗어나게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자신의 우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크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십니다. 탐심이란 강력한 우상을 이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기로 결심하십니다. 본문 16절에서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책망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로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신의 길로, 탐심이란 우상에게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위로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고쳐주십니다. 본문 18절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아멘. 매튜 헨리는 “내가 그의 길을 보니 그가 결코 제 스스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돌이키리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켰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이렇게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5절에서는 그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아멘. 여기에 덧붙여 하신 말씀이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아멘.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사람과 보다 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큰 위로를 받고 위로다운 위로를 더 많이 받으려면 마음이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은 8복을 말씀하시면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겸손하고 아파하는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런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떤 선지자입니까? 40장 1절과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는 위로의 선지자입니다. 위로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이 위로의 선지자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귀한 위로를 많이 받으셔서 마음에 평안이 더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85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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