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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삿 4:1-24)

by 이서영 목사 2015. 7. 17.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삿 4:1-24)

 

사사기에는 독특한 구조가 있습니다.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을 행하다가 심판을 받고 그러다가 부르짖으면 사사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또! 또! 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또! 또! 또! 용서해주시고 사사를 보내주셔서 구원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오늘 눈여겨볼 말씀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3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철 병거를 가진 야빈 왕에게 이십 년 동안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곧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십 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계속 심히 학대받았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그때서야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랍비돗의 아내인 여선지자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보내주셔서 야빈 왕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시켜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야빈 왕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힘이 없어 눌려 지냈는데 이제는 반대로 눌러 아예 진멸시켰습니다.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놀라운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였으나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데 어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실제로 생존하시는 분이십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게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허공에 대고 넋두리한 것이 아니라, 혼자 속으로 독백한 것도 아니라, 어떤 존재를 향하여 간절히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는데 어디를 향해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들은 우상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살아계시기에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이 일찍부터 체험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체험담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전해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큰 체험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출애굽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출애굽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요셉이 있던 당시와 같이 계속 번영하였더라면 굳이 출애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무총리인 요셉이 죽고, 애굽 왕도 바뀌자 고된 노동을 하는 노예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이 상달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시켜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서 25절이 그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바가 없으시지만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아니라 생생하게 생존해 있는 자기를 알아주니까 좋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말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이미 부모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부모인 자기를 알아주니까 기특해서 구하는 것을 기쁘게 줍니다.

 

시편 34편 15절과 17절을 보면 의인들이 부르짖으면 들어주시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사람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할렐루야!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잘살 수 있고,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잘살 수 없고, 잘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7장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온갖 좋지 않은 모든 일을 당하고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보다 한술 더 떴습니다. 어떻게요? 돌아오긴 하였지만, 구하긴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럴듯한 힘이 센 곳으로 달려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7장 10절에 이어 1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혜를 가진 겸손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기에 그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레미야 33장 2절과 3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생존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곤고한 가운데 부르짖는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울 때 살아계신 그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건짐을 받고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생생하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짖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드보라 사사 이전에 세 명의 사사가 있었습니다. 갈렙의 사위인 옷니엘, 왼손잡이인 에훗,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인 삼갈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았을 때는 나라가 평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이스라엘은 악을 행하여 심판의 결과로 주위 나라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사사가 있을 때는 나라가 평온하였지만 그들이 죽으면 신전통치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즉 다시 말해 훤히 보는 앞에서, 다 알고 있는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1절에서 4절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아시고 개인의 역사도 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생각과 마음과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을 훤하게 아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모르니까 하나님도 모르겠지.’ 아닙니다. 사람은 속여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은 속이지 못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그 모든 것을 역시 잘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6절에서 10절을 보면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회당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역시 그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젓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을 감아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우리의 반복된 악에도 불구하고 또 용서해주시고 또다시 건져주십니다.

 

살아 계신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변론하자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아멘.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에서 회개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고 돌아오면 죄를 눈 씻고 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6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그렇게 하면 이미 깨끗하게 용서하였기에 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띤 토론회를 하고 청문회를 해봐도, 끈질기게 추적해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죄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을 구해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짓누르고 있던 그 고통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부르짖게 만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고통은 축복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인해 회개하고 돌이키면 평온한 천국이 옵니다. 돌이켜 부르짖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여 건짐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시편 145편 17절에서 19절에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아멘.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악행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이켜 부르짖으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참으로 너그러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자녀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지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주시는 부모님처럼 너그럽게 대해주십니다. 물론 악을 그대로 두고 악을 그대로 행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줍니다.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데 계속 따지고 벌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지만 돌이켜 부르짖었을 때 건짐을 받고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의 너그러우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 부르짖읍시다. 그리하여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그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골치가 아픈 문제들을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해결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부모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여러 가지 능력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를 때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자녀인 성도들의 문제를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을 해결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악을 행하여 심히 학대를 받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었을 때 건져주셨습니다. 악을 행하였을 때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습니다(2). 그래서 이스라엘은 철 병거로 무장한 야빈 왕에게 이십 년 동안이나 심히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었을 때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야빈 왕이 믿고 있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손에 파셨습니다(9).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군대 장관이 가냘픈 한 여인의 손에 장군의 생애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였을 때는 이방나라에 파셨지만 돌이켜 부르짖었을 때는 그 이방 나라를 이스라엘의 손에 파신 것입니다.

 

또한 야빈 왕이 강력한 무기인 철 병거 구백 대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굴복시키고 심히 학대하였습니다(3). 그러자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자 반대로 야빈 왕이 굴복하였습니다(23). 시스라 장군의 온 군대가 죽고, 시스라 장군 혼자만 겨우 도망쳤습니다(16). 그리하여 야빈 왕은 굴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눌려서 마침내 진멸을 당하였습니다(24).

 

그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던 철 병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철 병거의 바퀴 축에는 전차낫이 달려 있어 이것을 몰고 보병군대로 돌진하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벤허에 나오는 유명한 전차결투 장면을 보면 상상이 갈 것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철 병거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5절에서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행하시자 그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큰소리쳤던 그 철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철 병거를 믿고, 힘을 믿고 사는 사람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매튜 헨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군사력에 대해 상당히 자신만만했던 그는 이제 자신의 발만을 그것도 조금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철 병거와 막강한 군대를 모두 잃고 여인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땅에는 사십 년 동안이나 평온하게 되었습니다(5:31). 우리가 믿고 있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구원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오늘날에는 사사가 아니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지옥의 문제도 해결해주십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으로부터 시달리고 신음하는 문제도 해결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과 삶의 문제까지도 해결해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지옥과 생지옥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평온한 천국을 가져다주시고, 이 땅 위에도 천국의 삶을 가져다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어 해결을 받았습니다. 압제로부터, 학대로부터, 고통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해결책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우리 역시 그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으면 우리 역시 우리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따라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자.”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계시고, 우리가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시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심히 학대받고 있는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픈 모든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해결받으시고 평온하시기 바랍니다.

 

 

[2011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90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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