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구원하는 산 믿음 (약 2:14-26)
옛날 어떤 나라의 임금이 훌륭한 학자를 궁궐로 초대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까?” 학자가 대답했습니다.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착한 일만 하는 것입니다.” 왕은 대답이 다소 싱겁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지 않습니까?” 학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백 살 먹은 노인도 실제로는 지키기 힘든 것입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그리스도인일까요? 산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그저 지식으로만 알지 않습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하늘에만 머물러 있게도 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성경 말씀을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지상천국의 삶을 충분히 누리면서 삽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기쁘게 즐겁게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매력이 돋보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 이 산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마트폰을 값을 치르고 샀다고 해서 통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고 값비싼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어도 개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온 세상을 누리면서 사용할 수 있는 멋진 스마트폰이라 해도 그 좋은 유익을 하나도 누리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을 통신사에 개통해야 비로소 기지국과 교신이 되어 필요할 때마다 즉시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개통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이 수시로 기지국과 접속을 합니다. 이렇게 개통이 되어 잘 교신이 될 때 스마트폰의 진가는 발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귀한 피로 비싼 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그 자체로는 천국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이 개통되면 기지국과 계속 접속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계속 접속할 때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잘 듣고 잘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천국에서 오는 메시지가 내 안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능력과 축복과 삶이 삶 속에 실제로 하나씩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구원이 됩니다. 이것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고 나를 구원해주는 산 믿음이 됩니다.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만 한다고 해서 천국의 풍성한 삶이 저절로 내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삶을 살려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훨씬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성경이 책장 속에 꽂혀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 가운데서 역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적용되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정오의 대낮같이 가면 갈수록 주 안에서 점점 더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잘되는 비결은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죽은 믿음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산 믿음 산 신앙으로 살면 그대로 유익한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게 됩니다. 믿음은 순종할 때 점점 더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믿고 있는 그대로 순종해 나가면 점점 더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해줍니다. 그 믿음이 영생을 얻되 자기 자신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산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머리로 알기만 하는 공허한 죽은 신앙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하늘에만 보관하지 않았습니다. 꺼내서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장점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산 믿음대로 산 열매를 거두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쩌면 이 땅에서의 삶이 더 투쟁적입니다. 미래의 온전한 천국에 가면 쉽게 믿고 쉽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믿는 것도 힘들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도 힘듭니다. 훼방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본능과 악한 마귀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게 하고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생각과 마음을 흔들어 놓아서 성경 말씀도 그대로 지키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산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기준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성경 말씀을 믿고 말씀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산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타락하고 변질된 본성과 마귀의 온갖 훼방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고집과 기준이 꺾였기에 주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꺾인 반면에 천국의 풍성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세로 실제로 성경 말씀 그대로 순종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로 공허하게 버려두지 않고 실제로 삶 사운데 하나하나 그대로 적용하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있는 그대로를 믿고 행하는 산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그리하여 산 믿음이 주는 실제적인 지상천국의 축복과 능력의 산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면서 살아가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나를 이전보다 훨씬 더 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잘되는 믿음은 산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죽은 결과를 거둡니다. 죽은 씨앗을 심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열매는 당연히 없습니다. 심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믿음을 심으시길 바랍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겨우 미래의 천국에 턱걸이할 뿐입니다. 축복이 별로 없고 상급도 별로 없습니다. 결과가 시원찮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습니다. 능히 자기의 풍성한 삶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산 믿음이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거둘게 많아집니다. 죽은 믿음을 가지고는 잘 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잘 되겠지’하면서 기다려도 좋은 날이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힘든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산 믿음은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몸이 따라주고 물질이 따라주고 시간이 따라주고 희생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세상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가지를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이웃 형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정작 쓸 것은 주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살아라.” “따뜻하게 지내라”. “시원하게 지내라.” 이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죽어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교회 간에도, 성도 간에도. 이웃 간에도, 친인척 간에도, 국가 간에도 실제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어서 아무 유익이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헛것입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칭찬들을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증거가 됩니다. 자기의 풍성한 삶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건강과 명예와 물질의 축복도 생각만큼 쌓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구원하지 못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줄 것이 참 많습니다. 톨스토이가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걸인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한 푼만 주십시오.” 톨스토이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걸인은 사랑의 손길을 느끼고는 감격했습니다. 돈을 주면서도 냉대 멸시해서 천대 받아왔는데 많은 돈을 받은 것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서 못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줄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보면 있습니다. 줄려는 마음만 가지면 눈에 띠입니다. 금과 은이 없으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 이름을 전해줄 수도 있습니다. 톨스토이처럼 따뜻한 말과 마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관심과 기도로 후원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도움을 주면서 말해야 합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더라도 말로만 하면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오히려 큰 상처를 입힙니다. 실제로 도움을 주지 않는 이상 가능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그 어디든 해주지도 못하면서 아니면 해주지도 않으면서 감 놔라 배 놔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 할 줄 몰라서 못합니까? 여러 가지 사정이 어려워서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하면 도움이 되지 않고 힘만 빼게 만듭니다. 그럴 땐 무언가 할 수 있도록 실제로 도움을 주면서 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기죽지 않으려고 할 수 있으면 많이 배우고 가지려고 합니다. 자랑하려고 많이 가지려고 애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어주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힘써 벌어서 힘써 저축하고, 힘써 저축한 것을 힘써 나눠주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산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준다고 가난해집니까? 오히려 부유하게 됩니다. 잠언 11장 25절은 말합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잘 살 게 만드는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악착같이 빼앗듯이 모으면 잘 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25절 바로 앞의 24절이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하면 자기가 윤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주면 자기가 성공하게 됩니다. 주는 것이 어리석어 보입니다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기준이 꺾이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다른 사람을 부유하고 윤택하게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 믿음이 그 행함이 자기의 풍성한 삶을 구원해줍니다. 그러나 아껴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오히려 가난하게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부자가 되어서 자신을 구원하는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몹시 힘듭니다. 지금 복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니 딴소리 제발 그만하시고 복을 받는 비결이나 가르쳐주세요.”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이 비결입니다. 성경 말씀이 비결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이제껏 자신의 판단으로 살아오셨다면 이젠 바꾸시기 바랍니다. 내가 꺾여야 복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실제로 나를 전적으로 다스려 달라고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는 자격증을 따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땁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격증을 딴 다음에 실제로 그 자격증을 써먹는 것은 그 자격에 걸맞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격증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말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까? 아니면 행함으로 얻습니까? 이 두 가지 믿음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도 하고 행함으로 의롭다함도 받아야 합니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 믿음이 산 믿음이 되어 아들도 살리고 자신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좋은 말씀인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구원하고 나를 잘되게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행함과 함께 온전해졌습니다. 균형이 잡힌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벗’이라는 엄청난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산 믿음을 심었으므로 산 열매를 풍성하게 거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구원하는 산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믿음입니다. 육으로 살면 육으로부터 육의 열매를 거두고 영으로 살면 영으로부터 영의 열매를 거둡니다. 마가복음 마지막 16장 17절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는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도 말하고 뱀을 집어 올리기도 하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에게 이러한 신비로운 표적만 나타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더 귀한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행하심으로 선행하는 표시가 뒤따릅니다.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산 믿음은 행함으로 그 증거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더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표적을 많이 행해도 성경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천국의 풍성한 삶속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이 땅에서도 실현되고 있는 지상천국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천국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할 때 천국이 옵니다. 육신의 삶에서 돌이켜 영적으로 살 때 은혜와 축복이 되찾아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의무는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가까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막 1:15).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여, 나의 삶을 바꾸어 주소서. 내 생각과 내 감정과 마음과 고집과 판단기준을 꺾어주소서. 나를 변화시켜 주소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세수합니다. 더러워진 손발도 깨끗이 씻습니다. 한 주간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듣고 오셨습니까? 그곳에 가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하던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얼마나 많은 언론이나 환경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몸담고 지내면서 이런 말 저런 말 들은 것을 교회에 와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내 영혼을 파괴하는 말을 들은 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주의 보혈과 주의 성령과 주의 말씀으로 씻어내야 합니다.
육신의 삶과 생각에서 손을 씻고 영의 생각과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나를 잘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세상은 좋은 것도 주지만 대부분 잘못된 정보와 부정적인 정보를 많이 줍니다. 기독교에 대한 말, 교회에 대한 말, 목사에 대한 말, 성도에 대한 말 속에 온갖 좋지 않은 부정적인 말을 들려줍니다. 마귀가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와 교회와 목사와 성도에 대해 시험이 들게 만들어 믿음이 떨어지도록 만듭니다. 성경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주일성수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영혼을 지키는 날입니다. 그러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놓치고 험하고 부정적인 세상에 나가 신앙생활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오산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하고, 나아와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살아납니다. 산 믿음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착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의지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 때문에 은혜를 잘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은혜의 통로를 꽉 막기 때문입니다.
옥토밭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의지하는 마음밭입니다. 그 마음밭에 은혜의 소낙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러한 마음밭은 또한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과 고집과 판단기준과 같이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내려놓을수록 좋습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오직 주님 은혜!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높아진 생각과 기준과 마음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고래심줄같이 단단한 힘은 망망대해를 헤엄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서는 통할지는 몰라도 은혜의 바다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고래 힘줄과 같은 자신감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데는 부적당합니다.
자기의 몸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할 때 은혜의 바다에 둥둥 떠서 마음껏 헤엄쳐 다닐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사모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줘도 받지 않으니 다 흘려보내버립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 때 주님의 기이한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산 믿음으로 산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왜곡된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성경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책임져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내 방식은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방식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이전보다 훨씬 점점 더 잘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구원하는 산 믿음은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이 산 믿음은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은 다음에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믿음입니다. 천국을 소유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인 성경 말씀을 삶 속에서 행하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를 드려서 나를 다스려주시고 그 주님의 은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이 믿음을 가지고 살다보면 이 산 믿음이 자기를 잘되게 하고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구원하는 산 믿음을 가지셔서 이 구원의 유익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156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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