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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강해/주일설교

[종려주일] (마 21:1-9)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하신 예수님

by 이서영 목사 2016. 3. 20.

[종려주일] ✙✙✙ (마 21:1-9)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하신 예수님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부활절 앞 1주일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에서 예수님의 구원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식은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지만 방식이 달랐습니다. 호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겸손의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영원불멸의 왕, 이스라엘 나라의 해방시켜 줄 왕을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옆에 다 큰 나귀가 함께 있었지만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스로 가장 낮추신 것입니다. 말을 타고 위엄을 뽐내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작아 보이는 어린 나귀를 타는 겸손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보좌에 앉으러 가는 방식이 아니라 치욕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러가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왕이시고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그 모든 것을 하실 수도 있지만 스스로 겸손하게 마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순순히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으러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1장 4절과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아멘.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들이 가서 나귀와 어린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두 마리 가운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왕이시지만 겸손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아멘.

 

그런데 곧 이어 나오는 9장 10절 말씀을 보면 말을 끊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아멘.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말이 끊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의지해서는 해결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의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힘이 있어보여도 하나님을 제쳐놓고 말을 의지해서는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화가 닥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말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사야 2장 6절과 7절 말씀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에 대한 것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31장 1절 말씀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말을 의지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곧 이어 2절과 3절 말씀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처럼 말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패망을 불러오는 것이 됩니다. 말이 도움을 줄 것 같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 입니다. 겸손과 교만은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시지만 겸손하면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말을 의지하려는 사람, 말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좋지 못하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말을 의지하는 자의 최후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일어난 일인데 출애굽기 14장 23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이렇게 막강해보이던 말과 마차와 마병들이 몽땅 바다 속에 수몰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다윗에게 싸움을 걸어왔다가 패망하게 된 것을 사무엘하 10장 17절과 18절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안타깝지만 솔로몬 왕 역시 말년에 갈수록 패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을 많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에게 왕의 제도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신명기 17장 14-20절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아멘.

 

그런데 솔로몬 왕은 말년에 어떻게 했습니까? 거꾸로 살았습니다. 이방여자와 은금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말도 사들여 왔습니다. 이방 여자를 데려온 것을 말하고 있는 열왕기상 11장 바로 앞장을 보면 애굽에서 말을 사들여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6-29절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들여왔으니 왕의 상인들이 값주고 산 것이며, 애굽에서 들여온 병거는 한 대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한 필에 백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에게 그것들을 되팔기도 하였더라.”

 

솔로몬은 이처럼 많은 말을 들여왔습니다. 그 많은 말을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 것입니다. 말만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말을 전담하는 병사도 있어야 하고, 말에게 먹일 사료와 마굿간 등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마병의 성과 병거의 성까지 만든 것입니다.

 

열왕기상 9장 19절 말씀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가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말을 끊어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해주십니까?

 

말이 좋긴 좋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큰 무기입니다. 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십니다. 잠언 21장 31절 말씀입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아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호세아 1장 7절 말씀에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때 말과 같이 웅장한 방식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어린 나귀 새끼와 같은 겸손의 방식으로 구원해주십니다.

 

예수님은 형편이 없어 보이는 나귀 새끼를 타고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대적들을 이기셨습니다. 원수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인류의 대적인 원수마귀를 누가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나약해 보이는 겸손으로 이기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어린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왕의 사역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지옥과 사망과 저주와 악과 고통과 악한 영으로부터 벗겨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고 왕의 보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겸손하게 죽으러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인 내가 내 품위에도 맞지 않는 나귀 새끼를 타다니. 나는 나귀 새끼 타는 것이 싫다’라고 말을 타기를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싫다고, 치욕 당하는 것이 싫다고, 채찍에 맞는 것이 싫다고, 침 뱉기기 싫다고, 뺨 맞는 것도 싫다고 거부하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이 모든 것을 온 마음과 몸으로 받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악과 저주와 사망과 악한 영과 잘못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겸손하게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의 방식이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죽을 때 우리를 통해 모든 곳곳마다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게 죽으면 어느 모임이든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별로 없고 다 대접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겸손하게 죽은 사람이 많으면 잘 돌아갑니다. 서로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어떤 모임이든 자신을 희생하고 시간과 물질을 들여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화기애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을 의지하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고 다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연약한 자를 무시하지도 않으시고 멸시천대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고 찾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그런 자세로 겸손하게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약하신 분들,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 어렵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 소외받고 연약한 분들을 업신여기지도 않아야 하고 외면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이나 경제력이나 지위나 권력이나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가졌으나 마치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이처럼 내가 겸손하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연약해 보이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있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위풍당당해 보이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입니까? 겸손하심으로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처럼 나도 겸손하게 섬김으로 죽은 나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21장 9절의 말씀처럼 찬송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아멘.

 

그러므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겸손하게 섬기시는 예수님을 더욱 더 높여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겸손하게 섬기시는 예수님처럼 서로 서로 겸손하게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우리를 통해 겸손하게 섬기시는 예수님께서 더욱 더 찬송을 받으시게 되는 뜻깊은 종려주일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s://cafe.daum.net/truegooddisciples/IPZB/386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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