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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자료/신앙간증

[박도호(존 마이클 배튜) 교수] 개혁된 고신교회는 항상 개혁해 가야 합니다

by 이서영 목사 2018. 12. 7.

[박도호(존 마이클 배튜) 교수] 개혁된 고신교회는 항상 개혁해 가야 합니다

   김흥식 고신역사연구소 연구원

 

 

김흥식 연구원: 안녕하세요? 외교사절을 인터뷰하게 되어 좋습니다.

박도호 교수: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의 정식 이름은 '존 마이클 배튜(John Michael Batteau)'입니다. 저는 올해로 만 66세입니다. 제 아내는 아름다운 네덜란드인 마그릿 소네펠트입니다. 저에게는 장성한 네 자녀가 있습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입양한 딸 수지도 있습니다. 아직 미혼이지요. 입양할 당시 수지는 소아마비가 있었습니다. 거동하는 것이 불편했지요.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독립적으로 운전도 하고, 일도 잘 합니다. 저는 세 명의 어린 손자들도 있습니다.

 

 

김 연구원: 교수님의 유년시절을 듣고 싶습니다.

박 교수: 저는 미국인으로서 1946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부친은 하버드대학의 기계공학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서부터 저희 집을 방문하는 다양한 유명 인사들을 보면서 자랐지만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들이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부럽지도 않았거든요.

 

제가 다닌 미국의 성공회는 영국 성공회의 분과였고 매우 자유로웠습니다(liberal). 성경적이지 않았지요. 아직도 여전히 대부분 자유롭습니다. 물론 동성애도 허용하고요. 이 교회에 다니던 저는 희생적인 죽으심과 놀라우신 부활로써 나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고 망가진 피조세계를 구속하는 구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의 종교적 사상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세상이 더 좋은 곳으로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세계관은 실존주의 취향을 갖고 있는 인본주의였지요.

 

 

김 연구원: 어떻게 회심하고 신앙을 갖게 되셨나요?

박 교수: 1964년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영미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그때 룸메이트와 함께 요한복음을 배우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순복음 교회를 다니면서 은사운동을 했어요. 한동안 그 친구를 따라 은사주의 운동에 참석해 방언도 하고, 치유사역도 했습니다. 사람들도 마구 쓰러졌어요. 저도 이 운동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신앙인줄 착각했지요. 그런데 많은 기적들이 신빙성이 없었어요. 암을 치료받았다고 한 여인은 결국 죽었었고, 방언들은 각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역시 그랬지요. 은사주의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혀 균형적이지 않았어요. 단적으로 그들은 저에게 "인간적인 지식은 사탄적인 것이기에 배울 필요가 없으니 하버드대학을 그만두고 나오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같은 해인 1964년 가을, 장로교인이었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목사님이 하버드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명석한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이 후에 그의 명서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1968)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통해서 저는 정통 기독교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지양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제가 아직도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성경을 전적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되었지요. 이 강의를 계기로 저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를 알게 되면서 사탄에 대해서도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되었어요.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할 때에는 사탄에 대해 많이 치우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개혁주의를 통해서 은사주의를 극복한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일일이 성경본문과 비교하면서 읽었습니다. 그가 남긴 많은 주석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은 신앙이고, 바른 기독교 진리이며, 보다 성경적이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기록하기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신학의 기본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김 연구원: 한국, 고려신학교에 오시기 전에는 어떠하셨나요?

박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다닌 후, 돈을 벌기 위해 아이비엠(IBM)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3년간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중 화란의 라브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라브리는 쉐퍼가 있었던 곳인데, 기독교 연구기관입니다. 특히 저는 라브리를 좋아하는데, 그곳에서 제 아내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만나고 두 달 만에 혼인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거쳐서 깜뻔의 자유개혁교회의 신학대학교에 수학했습니다. 자유대학은 사상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깜뻔의 신학교를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77년 깜뻔으로 오게 되고 신학석사(Drs.)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깜뻔에서 학위를 마치시고 고려신학교로 오셨군요.

박 교수: 그렇습니다. 1979년 깜뻔에서 학위를 마쳤는데, 저에게 한국에서 가르치겠느냐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고 말했지요.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매우 놀랐지요. 이후에 저희는 이 일에 대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누군가를 원하고 있고, 내가 자격이 된다면 비록 내가 아무런 계획과 지식이 없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저는 네덜란드 교회의 파송을 받고 대학 동료 고재수(Niek H. Gooties)와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1970년 이래로 고신교회는 네덜란드 교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단으로부터 한국의 고려신학교로 신학을 가르치러 가라는 요구를 받게 된 것입니다.

 

 

김 연구원: 고려신학교에서 전성기를 보내셨지요?

박 교수: 1908-88년, 우리는 당시 부산에 있었던 고신교회(단)에 속한 고려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고재수 교수는 89년까지 가르침). 고려신학교에 왔을 때, 한국식 이름이 필요하다고 하여 이근삼 박사님께서 '박도호'라고 붙여주셨습니다. '고재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학교의 선배 교수는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이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저는 만 8년간 부산의 고려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통역과 함께 영어로 진행하였는데, 후에는 한국어로 가르쳤습니다. 교의학 과목 중에서도 성령론, 기독론, 그리고 종말론과 같은 과목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고려신학교에는 외국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인도와 대만에서 온 학생들이었지요. 이들에게는 영어로 가르쳤습니다. 또한 복음병원에서는 영어로 설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복음병원에 영어 예배가 있었지요. 한국어를 조금 배웠습니다만, 현재는 안타깝게도 대부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 연구원: 네덜란드 자유개혁교회의 상황은 어떤가요?

박 교수: 통계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내덜란드 인구는 1650만 명 가량입니다. 그중에 가장 비율이 높은 교회는 가톨릭이며, 450만 명 정도입니다. 이들은 주로 라인강 남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 중 5퍼센트 정도인 9만 명만 성당에 갑니다. 그들의 다수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처럼 일 년에 몇 차례만 참석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180만 명 가량의 기독교인이 있는데, 이 중 절반인 90만 명이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이 중 30만 명의 교인만 개혁주의 교회에 가입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전체 개신교 인구 가운데 60% 가량은 성경적이지만 나머지 40%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사역자의 경우는 반대로 60퍼센트 가량이 자유롭습니다. 전체 개신교 인구와는 반대이지요.

 

우리 교회(단)은 앞에서 말씀드린 30만 명의 개혁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아이를 포함헤서 약 12만 3천여 명 가량 됩니다. 이는 유럽 안의 정통 개혁주의 진영에서 가장 큰 교단입니다. 아펠도른신학교가 속해있는 화란개혁교회는 7만 5천 명 정도인데, 두 교단이 하나 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우리 자유개혁교회는 290여개의 지역 교회와 300여 명의 교역자, 50여 명의 은퇴 교역자가 있는데,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매년 약 백 명씩 줄어들지요. 복음주의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 교회에는 알미니스트와 재세레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 연구원: 고신교단과 신학교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박 교수: 1980년대부터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은 성장을 경험하면서 교회도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교권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커지고 교세가 커졌지만 개교회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교단과 신학교도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 교회만 최고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교회의 하나 됨을 생각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선교적인 관점도 필요하지요.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인된 성직자들이 있어서 어디서나 활동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고신교회(단)는 반드시 성경적 가르침을 견지하고 신실한 신학교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신교단과 신학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신학교는 학문적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낮아지면 안 됩니다. 학문적 성취도 이루어가야 하지요, 유해무, 신득일 교수로부터 고신교회가 개혁주의보다는 복음주의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교리문답을 통해서 고백적인 일치를 회복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품과 삶과 윤리적인 면도 개혁해 가야 합니다. 신앙의 개혁은 교회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해가야 하고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혁된 고신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가야 합니다.

           

 

(요약 편집처: 2012년 10월 27일 기독교보 "역사의 현장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14, 박도호 교수와의 대화) 

 

출처 : 참좋은제자들교회
글쓴이 : 참좋은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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