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를 품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품은
김진숙 동방사회복지회장
"오늘도 믿음으로 살자, 바르게 살자. 감사하며 살자, 겸손히 살자, 근검절약하자, 명리를 멀리하자"(고암 김득황). 입양아의 대모 동방사회복지회 김진숙 회장을 만났다. 평생 근검걸약하며 고아와 과부를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품었던 고 김득황 이사장의 유지를 따라 동방사회복지회를 섬기고 있는 김진숙 회장은 아버지가 생전에 자녀들에게 친필로 전해주신 말씀이 적혀 있는 액자를 보여 주었다.
동방사회복지회 설립자인 김득황 장로
아버지 김득황 박사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다. 내무부 차장과 해외개발공사 사장을 지냈고, 궁정감리교회에서 32살에 장로로 임직을 맡았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공직을 끝낸 1972년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선택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당시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해외 외원기관에서 한국을 돕기를 원했고,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에 인품이 훌륭하고 믿을 만한 그와 연결이 됐다. 고아를 돌보았고, 28개 한센병 환자말을의 교역자들을 지원했으며, 이북 해안게 접적지역에 있는 농어촌교회 목회자 250명도 후원한 사람이 아버지 김득황 박사였다. 이 땅에 고아들이 많은 걸 보았던 그는 '그래도 이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라는 게 좋을 것 아닌가? 생각하고 해외입양을 선택했다.
이 땅에서 키울 수 없어 해외 입양을 보내기는 하지만 마음은 늘 편하지 않았다. 입양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새벽기도회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새벽 4시가 되면 입양보낸 아이 가정을 위해 매일 기도의 자리로 나갔다. 아이가 해외 출국할 때는 항상 아이를 안고 축복기도를 했다. 눈물 많은 기도의 삶을 살았던 그의 생전 기도 레퍼토리는 "이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였다. 입양 후 한국을 방문한 틴에이저들에게 잊지 않은 당부도 있다. "술 담배는 하지 말고, 부모님 은퇴 후에는 꼭 용돈을 보내드리고, 자주 찾아뵈라"는 말씀이었다.
애국자였던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내무부 차관까지 지냈으면 호화롭게 살만도 하지만 한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자택을 방문했을 때, 허름하고 낡은 소파를 보고는 놀래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던 김진숙 회장은 훌륭한 아버지를 뒀다고 실감하지 못했지만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고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고 고백했다.
동방의 모든 시설에서 예배 후에는 반드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지시했던 김득황 박사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문학박사로서 16권의 저서도 집필했고, 그 중 한국사상사와 한국종교사가 대표적인 저서다. 만주어도 능통해서 만주어 사전을 만들었다. 짧지 않은 여정은 94살에 은퇴하고, 97살이었던 지난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몸 담았던 동방사회복지회
김진숙 회장이 28살이었던 1972년. 동방사회복지회 설립초기 갑자기 직원이 그만두는 바람에 '잠깐 와서 도와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몇 년 섬기게 되면서 초창기 힘들었던 경험도 함께 나눴다. 그러다가 1993년 동방재활원 원장으로 가게 됐다. 그는 가족 중에 2명이 교통사고를 경험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따뜻한 부산에서 요양하며 지내는 동안 힘들었던 재활과정을 도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들이 기적과 같은 응답으로 돌아왔다. 장애인을 위해 살기로 했는데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눈물 없이 감당할 수 없는 사역
재활원 사역은 너무 힘들었다. 다시는 평택 안 간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훈련이요, 섭리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김진숙 회장은 동방사회복지회 설립 초창기 불신감이 팽배했던 터라 사회복지하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많았다. 외원으로 사회복지를 하면서 회의에 빠져들었다. 많이 힘들었고,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다시는 사회복지 안하겠다고 남편 직장 따라 진해로 교육받으러 내려갈 때만해도 다시는 안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이 이끌고 계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셨다. 자신은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마음도 강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아픔도 있었고, 쉽세 상처를 잘 받는 소유자였지만 언제나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서는 겸손히 '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많이 힘들었던 만큼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는 고백도 했다.
이웃사랑 실천 우리 모두의 몫
사회복지사에게 사회복지는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건이 열악하고, 국내입양에 대해서는 국가지원 조차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동방사회복지회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규모가 커진 만큼 그간의 눈물은 얼마나 많았을까? 또 얼마나 많은 재원이 필요로 할까? 생각해주지 못할망정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도 자제할 줄 모른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큰 전환점이 이뤄졌던 해이다. 그 해를 기점으로 입양도 늘었고, 장애아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래도 많이 입양을 하는 편이다. 김진숙 회장은 살아있는 간증이 많아 여전도회나 교회행사 때 불러주는 것도 이 기관을 돕는 일이다. 물론 직접적인 입양이 아니더라도 후원을 한다거나, 자원봉사자로 돕는 일도 있다. 특히 평택의 재활시설에는 돕는 시설이 많이 필요하다. 물론 사전에 자원봉사에 대해서도 상담이 필요로 한다. 잘못 접근했다가는 상처만 주고 올 수도 있기 때문.
아름다운 행보
김진숙 회장은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필리핀에 한국남성과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싶고, 북한이 통일이 되면 수많은 어린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기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포부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김득황 설립자의 고향땅인 평북의주에 아동복지 시설을 세워 큰 역할을 수행했으면 좋겠다는 김진숙 회장. 이 땅에 아름다운 족적을 남겼던 아버지 김득황 박사에 이은 아름다운 행보를 기대해 본다.
동방사회복지회에서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동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일로 복지 사업을 시작한 동방사회복지회는 아동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회복지사와의 사아담을 통해 아동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복지혜택을 제공한다. 친부모가 키우지 못하는 영아들을 위하여 일시보호소, 만3세까지 양육하여 주는 영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입양을 기다리는 아동들이 가정에서 사랑으로 자랄 수 있도록 가정위탁보호를 하고 있으며,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줄 가족을 찾아주는 입양사업 등 복지사업을 하고 있다.
(요약 편집처: 월간고신 생명나무 2012년 9월호 "미소" 구본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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