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1장 형제들아 속지 말라
제2부 야고보서 장별 개요와 개관
야고보서 1-5장을 행함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기 위하여 5가지 유형의 하지 말라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박해받아 흩어져서 살게 된 힘든 상황에 놓여 있으나 서로 사랑함으로써 뭉쳐져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별 | 주제 |
1 | 형제들아 속지 말라 |
2 | 형제들아 차별하지 말라 |
3 | 형제들아 말실수하지 말라 |
4 | 형제들아 비방하지 말라 |
5 |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
1장 형제들아 속지 말라
1장 개요
✙✙✙ 1장 구절
야고보서 1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는 16절입니다.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 1장 주제
야고보서를 행함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1:22)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고(2:22)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된다는(1:25)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2:14)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형제들에게 이러한 행함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위하여 행함에 대한 다섯 가지의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1장은 속지 말라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여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므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형제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형제들아 속지 말라가 됩니다.
✙✙✙ 1장 구조
야고보서 1장은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그릇된 판단과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면 말씀이 성취되지 못해 좋은 것을 얻지 못하게 되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야 하는데 여러 가지 시험을 참아내서 인내로 온전히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에 속아 시험을 참지 못하고 분노하게 되면 관계가 깨져 서로 힘들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됩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아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므로 말씀을 행하여서 속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1장에서는 속지 말라는 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1장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은 열두 지파에게 문안 인사하노라, 2-15절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16-27절은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 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1절은 열두 지파를 향한 인사말입니다. 야고보가 자신에 대한 신분을 밝히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 인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인 2-15절은 자신에게 속지 않기 위하여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2-4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므로 그렇게 하여 인내를 온전히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5-8절은 시험을 이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므로 그러한 지혜를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9-11절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대상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시험을 잘 참아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5절은 시험을 잘 참아야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인 16-27절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16-18절은 속지 않도록 먼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19-21절은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22-25절은 행함에 대한 것으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들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26-27절도 속지 말라는 것인데 경건에 대한 것입니다. 속지 않고 참된 경건을 하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하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야 하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 |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
2-15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16-27 |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 |
1:1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1장의 주제는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절 단락은 열두 지파를 향한 인사말입니다.
야고보가 자신에 대한 신분을 밝히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 인사하고 있습니다.
● 1:1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는 먼저 자신의 신분이 종(δοῦλος, 둘로스: 노예, 종)인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 지파(φυλαῖς, 퓔라이스)는 φυλή(퓔레)의 복수입니다. φυλή(퓔레)는 φύω(퓌오: 낳다, 생기다, 산출하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φυλή(퓔레)는 “씨족, 지파”를 의미하며 “인종, 국민, 백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파에는 열두 지파가 있는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마 19:28, 눅 22:30, 계 21:12).
이러한 열두 지파는 형제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지파가 씨족이라는 뜻이 있으며 그리고 형제들이라고(1:2, 16, 19, 2:1, 5, 14, 3:1, 10, 12, 4:11, 5:7, 9, 10, 12, 19) 호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모든 형제는 한 하나님 아버지를 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혈족공동체요 한 형제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한 가족이므로 야고보는 한 가족으로 여기고 형제 우애의 친근감으로 권면하고 있으며 수신자들도 서로 한 가족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성령님으로 거듭나서 한 하나님 아버지의 한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한 피를 받아 어린 양의 한 생명책에 기록된(계 21:27) 영적인 형제를 더 각별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신자를 열두 지파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형제간의 피를 나눈 우애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의 수신자인 형제공동체는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두 지파는 유대인 형제공동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 출신의 이방인 형제공동체도 포함합니다(갈 3:6-9, 26-29, 롬 9:24, 3:29-31, 4:9-25).
이처럼 열두 지파는 형제공동체를 의미하므로 야고보서의 수신 대상은 모든 형제공동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공동체란 교회당 내에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당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사회든 그 어디든 형제로서 만나는 곳곳마다 형제공동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하므로 형제공동체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 어느 때든 형제로서 서로 대할 때 이루어지게 되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교회의 머리와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형제들의 모임과 만남이 형제공동체라는 것입니다.
⚫ 흩어져(διασπορᾷ, 디아스포라)는 “분산, 흩어진 유대인, 흩어진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하므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는 “흩어진 유대인 열두 지파들에게”라는 의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흩어진 유대인 형제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나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흩어진 모든 형제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은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박해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상황에서 흩어지게 된 것을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는 흩어진 나그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객지에서 생활하는 것만 하더라도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박해상황을 잘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화평하게 살아가게 하고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형제들이 박해상황에서 서로 흩어지지 말고 서로 사랑하므로 내부 결속을 다지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감당해내도록 여러 가지 시험을 온전히 인내하면서(1:4) 길이 참으라고(5:7-11)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1:22-25) 말로만 하지(2:15-16) 않고 실제로 쓸 것을 주어서(1:27) 사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을 주어서 관계적인 것들과 경제적인 것들을 실제로 해결해주는 행함이 있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박해를 받아 지리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형제들이 더 이상 관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흩어져서 살지 않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관계적으로 흩어져서 심적으로 마음 아프게 살지 않고 경제적으로 흩어져 고통스럽게 살지 않도록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박해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으나 야고보서에서 제시해주고 있는 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1:2-15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1장의 주제는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2-15절 단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2-15절은 자신에게 속지 않기 위하여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측면에서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되면 자기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므로 그렇게 하여 인내를 온전히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5-8절은 시험을 이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므로 그러한 지혜를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9-11절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대상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시험을 잘 참아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5절은 시험을 잘 참아야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 1:2-4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느니라
2-4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므로 그렇게 하여 인내를 온전히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인내하여야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고 여러 가지 시험을 헤쳐 나가고 온전히 참을 수 있으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말씀에 따라 살려면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자기 감정과 자기 생각에 속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참고 인내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언어와 재물과 건강과 관련하여 서로 사랑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는 1절에 문안 인사를 한 이후에 2절을 시작하면서 먼저 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이러한 표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1:2, 2:1, 14, 3:1, 10, 12, 5:12,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1:16, 19, 2:5), 형제들아(4:11, 5:9, 10), 그러므로 형제들아(5:7).
그리고 낮은 형제는(1:9), 형제나 자매가(2:15), 형제를 비방하는(4:11), 형제를 판단하는(4:11)이라고 하였고, 네 몸(2:8), 지체(4:1)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야고보서에 많이 등장하는 형제들아를 신약성경에서 검색해보면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20회나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야고보서인데 15회입니다. 비율로 보면 고린도전서는 16개 장이고 야고보서는 5개 장이므로 야고보서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형제의 입장에서 그만큼 형제로서의 애틋함을 가지고 친밀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애를 가지고 권면하였다는 것은 야고보서의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져 살고 있지만 야고보가 형제들아라고 호칭한 것은 나와 너희들은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나와 각각 한 형제인 너희들 각자도 서로 간에 한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 형제들 간에 언어와 재물과 건강과 신앙에 있어서 서로 잘 지내보자고 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여러 가지(ποικίλοις, 포이킬로이스)는 ποικίλος(포이킬로스: 여러 가지의, 다양한, 여러 가지 종류의)의 복수입니다.
⚫ 시험(πειρασμοῖς, 페이라스모이스)은 복수로 “시험들, 유혹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여러 가지 시험은 여러 가지 유형의 시험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박해자로부터 받게 되는 시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상황 아래에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시험과 경제적인 면에서 받게 되는 등의 시험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당하(περιπέσητε, 페리페세테)는 περιπίπτω(페리핍토: 주위에 떨어지다, 만나다)의 과거 능동태 복수입니다.
⚫ 거든(ὅταν, 호탄)은 “-하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시험들을 만났을 때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입니다.
시험에 지고 시험에 눌려서 시험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이기지도 못하여서 답답해하고 슬퍼하고 우울하게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기쁘게 여겨야 하는가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시험들을 만나게 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 온전히(Πᾶσαν, 파산)는 πᾶς(파스: 모든, 온갖, 어떤 것이든지 모두, 온갖 종류의)의 대격이므로 “모든 것을”이라는 뜻입니다.
온갖 종류의 모든 시험들을 기쁨으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는 2절처럼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이유는 3절과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이는···줄(ὅτι, 호티)은 “-하는 것, -때문에, 왜냐하면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 시련(δοκίμιον, 도키미온)은 “시험, 시련”의 뜻입니다. 시험을 받아 인정 받게 된 것을 의미하고 시험을 통해 연단 받게 된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믿음으로 시험을 통해 생긴 연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는 3절에 이유를 언급한 이후에 4절에 그러한 인내를 더욱 더 온전히 이루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 원어성경을 보면 ἔργον(에르곤: 일을, 행위를, 행동을)과 접속사인 δὲ(데: 그러나, 그리고, 게다가, 더구나, 지금)를 볼 수 있습니다.
2-3절의 상황에서 더 나아가 거기에 더해서 인내로 온전한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접속사인 이는…하려 함이라(ἵνα, 히나: -하기 위하여, -하도록)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느냐 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내로 온전한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한 것은 온전하고 완전하여져서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서에는 시험과 인내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언급하고 마치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1장에 여러 가지 시험을(2), 믿음의 시련이(3), 인내를(3), 인내를(4), 시험을(12), 시련을(12), 시험을(13), 시험을(13), 시험을(13), 시험하지(13), 시험을(14)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면서 5장에 길이 참으라(7), 길이 참아(7), 길이 참고(8), 오래 참음의(10), 인내하는 자를(11), 욥의 인내를(11)이라고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아 제대로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흩어져서 힘들고 어렵게 사는 상황이므로 인내는 그만큼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험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다툰다면 관계가 악화 되고 경제적으로도 서로 잘 협력하지 않아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속은 것이 됩니다. 분노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보다는 자기의 감정이 우선이 되다 보니 자기의 감정에 그만 속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날 때 말씀에 따라 잘 인내하고 잘 참으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에 따라 인내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속게 되기 때문입니다.
● 1:5-8 지혜를 구하라
5-8절은 시험을 이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므로 그러한 지혜를 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고 말씀에 따라 살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기준이 아니라 언어생활과 경제생활 등에 있어 자기 기준에 속지 않으려면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지혜를 구하여 지혜가 있어야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고 여러 가지 시험을 헤쳐 나가고 온전히 인내할 수 있으므로 지혜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시험을 이겨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2-15절 단락의 문맥에 맞추어서 생각해보면 5-8절에서 구하라고 하는 지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데 필요한 지혜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언급하고 있는 지혜를 살펴보면 1장 5절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3장 13절에는 지혜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15절에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지혜, 17절에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땅 위의 지혜가 아니라 화평을 가져다주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하나가 다투지 않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박해로 흩어져서 살고 있는 상황이므로 안정되지 못하고 생활이 척박하고 마음이 각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자칫하면 다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잘 참고 인내하여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부족하게 되면 이렇게 서로 다투게 되므로 하나님께 구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 후히(ἁπλῶς, 하플로스)는 “솔직하게, 성실하게, 전심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NASB 영어성경 등은 generously(아낌없이, 후하게, 관대하게, 풍부하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결핍한 상태라면 모든 형제에게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 지혜를 아낌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여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에 대한 지혜와 시험을 참고 이겨내기 위한 인내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기에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6절은 지혜를 하나님께 구함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방법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 조금도…말라(μηδὲν, 메덴)의 원어원형은 μηδείς(메데이스)인데 “아무 것도 아닌, 아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아무 것도 의심하면서 구하지 말고 굳게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형제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를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구하여야 하는데 의심하면서 구하는 자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이어서 7절과 8절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7절은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지 아니하고 의심하면서 구하는 형제는 무엇이든지 주님께 얻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 생각하지(οἰέσθω, 오이에스도)는 οἴομαι(오이오마이: 상상하다, 생각하다, 기대하다)의 명령법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도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어떤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형제는 주님께 얻을 것을 상상조차도 하지 말고 기대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의심하는 형제는 무엇을 구하든지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형제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는 형제는 두 마음을 품고 사는 형제입니다. 그런 형제는 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 두 마음을 품어(δίψυχος, 딮쉬코스)는 “두 마음을 품은, 망설이는”의 뜻이 있습니다.
⚫ 일(ὁδοῖς, 호도이스)은 복수로 “길들, 생활방식들”이라는 뜻입니다.
⚫ 정함이 없는(ἀκατάστατος, 아카타스타토스)은 “불안정한, 변덕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하기 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의심하는 형제는 믿지 않고 망설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심하는 형제는 지혜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만 아니라 마음이 불안정하므로 자신의 다른 온갖 종류의 모든 생활방식들도 불안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속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하므로 다른 모든 생활방식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1:9-11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는 자랑하라
9-11절은 자신에게 속지 말고 말씀에 따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대상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수신자에 대한 언급이자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경제적인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빈부귀천에 관계가 없이 서로 반목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시험을 잘 참아내면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는 인내로 자괴감과 멸시천대와 부한 형제에 대한 반감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는 인내로 재물을 풀어 가난한 형제를 돌보아주어 재물에 대한 욕심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입니다.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4장 16절을 보면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9절과 10절에서는 자랑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 낮은(ταπεινὸς, 타페이노스)은 “낮은, 비천한, 겸손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낮은 지위가 비천한 형제를 의미하나 부한 형제와 대비하면 가난한 형제를 가리킵니다.
가난한 처지에 있으므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가난하여 업신여김을 받는(2:6) 비천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진 것이 없어 보이나 마음이 가난한 형제가 소유하게 되는 복을 누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해주셨다는(2:5)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고후 6:10) 한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낮은 형제는 자기가 가진 재산의 크기로 자랑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크기 때문에 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한 것을 자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야고보는 낮은 형제만 자랑하라고 하지 않고 부한 형제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랑거리는 재산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의 낮아짐입니다.
⚫ 낮아짐(ταπεινώσει, 타페이노세이)은 ταπείνωσις(타페이노시스: 굴욕, 비하, 겸비, 비천, 낮음)의 여격입니다.
⚫ 지나감(παρελεύσεται, 파렐류세타이)은 παρέρχομαι(파렐코마이: 지나가다, 통과하다, 사라지다)의 동사 직설법 미래형입니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낮아짐이 의미하는 것은 가졌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재물로 어려운 형제들을 보살펴주는 것이 낮아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여야 하는 이유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자기 자신도 사라져 버리고 애써 모은 자기의 재물도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앞서 10절에 부한 형제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11절에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를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부한 형제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 불어(σὺν, 쉰)는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없어지나니(ἀπώλετο, 아폴레토)는 ἀπόλλυμι(아폴뤼미: 멸망시키다, 잃어버리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입니다.
⚫ 행하는 일(πορείαις, 포레이아이스)은 πορεία(포레이아: 여행, 맡은 일, 사업)의 여격 복수입니다.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뜨거운 바람마저 함께 불어닥치면 풀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타들어 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바짝 말라서 시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꽃이 떨어져서 아름답던 꽃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도 아름답게 매우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그렇게 쇠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도 말라서 시든 꽃처럼 한때 흥왕하던 자신의 사업들이 점점 쇠퇴하여 결국에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많은 재물로 자랑하지 말고 자기의 재물로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는 등으로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이러한 방식으로 자랑하게 되면 재물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재물에 속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쇠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1-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온전하려고 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갔다고 하였습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자기 재물에 속아서 근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말씀대로 행하면 낮은 형제나 부한 형제나 모두가 재물에 대한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의 크기에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재물의 시험에 대한 인내가 되는 것입니다.
● 1:12-15 시험을 참는 형제는 복이 있나니
12-15절은 시험을 잘 참아야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12-15절은 시험의 출처를 밝혀주면서 속지 말아야 할 주체에 대한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험의 출처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자기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게 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욕심에 속지 않아야 시험을 받지 않게 됩니다. 말씀에 따라 시험을 잘 참고 견디어내야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게 되고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기준대로 참지 못하게 되면 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생활이나 경제생활 등에 있어 참고 견디면 마침내 복을 받게 됩니다.
시험은 언어와 재물에 대한 시험이 있습니다.
자기 기준과 자기 욕심에 따라 말을 내뱉고 재물을 모은다면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낳게 됩니다. 자신을 잘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면 속지 않게 되는데 특별히 자기의 언어와 재물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참음이 필요합니다. 언어에 조심하고 재물을 아껴 쓰고 돕는 데는 아낌없이 써야 하는 것입니다.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2절을 시작하면서 먼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어성경의 순서를 보면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 복이 있나니)가 첫 부분에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복이 있는지를 이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험을(πειρασμόν, 페이라스몬) 참는 형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 참는(ὑπομένει, 휘포메네이)은 “머물다, 기다리다, 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 시련을 견디어(δόκιμος, 도키모스)는 “시험받은, 인정된,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입니다.
경거망동해서 참지 못하고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굳세게 머물면서 참아내는 형제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낸 형제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받고 인정을 받은 형제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박해상황에서 박해자로부터 받게 되는 시험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험을 잘 이기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문맥과 1장의 문맥과 이번 단락의 범위에서 보면 박해상황 아래의 형제들 내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언어생활이나 경제생활 등에서 만나게 되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잘 참으면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언어생활과 절제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경제생활 등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게 되고 오히려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에게 유익하게 되고 자기 욕심 때문에 서로 죽이고 빼앗아서 사망을 가져다주는(1:15) 것이 아니라 서로 살맛이 나게 하여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3절은 시험의 출처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험을 받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신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13절을 시작하면서 시험을 받을 때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말지니(Μηδεὶς, 메데이스)의 원어원형은 μηδείς(메데이스)인데 “아무 것도 아닌, 아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고,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 께(ἀπὸ, 아포)는 “에서, -에서부터”라는 뜻입니다.
시험을 받게 될 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가 하면 어떤 말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시험을 받게 된다고 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을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는 이유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하나님께서 시험하지 아니하시는데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시험의 출처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 눈여겨볼 용어는 각 사람이(ἕκαστος, 헥카스토스: 각각의, 각자의)와 자기(ἰδίας, 이디아스: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속한 것)입니다.
시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나 각 사람이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출처가 하나님이시거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받게 되니까 시험을 자초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언어든 재물이든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시험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의 출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속아서 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5절은 시험의 결과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욕심에 끌려 속아서 시험을 받게 되면 뒤따르게 되는 결과입니다.
속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면 속게 되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 장성한즉(ἀποτελεσθεῖσα, 아포텔레스데이사)은 ἀποτελέω(아포텔레오: 행하다, 이행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의 동분사 과거 수동태입니다.
원어성경 처음에 나오는 εἶτα(에이타: 다음에, 이후에)도 감안해 보면 욕심에 붙잡히게 되면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게 되면 사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에 속아서 죄를 행하게 되면 죄를 지어서 성취하면 그만큼의 죽음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의 결과는 욕심을 내다가 죄를 이행한 만큼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자기 욕심에 속아서 사망을 낳지 않기 위해서는 속지 않아야 합니다.
시험의 출처나 속지 말아야 할 주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자기 자신의 욕심에 속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16-27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1장의 주제는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6-27절 단락은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16-27절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6-18절은 속지 않도록 먼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19-21절은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22-25절은 행함에 대한 것으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들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26-27절도 속지 말라는 것인데 경건에 대한 것입니다. 속지 않고 참된 경건을 하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하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야 하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1:16-18 아버지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느니라
16-18절은 속지 않도록 먼저 믿음의 대상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고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속지 않도록 영원히 속이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살도록 해주셔서 땅 위의 것에 속지 않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앞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라고 한 이후에 사랑한다는 말을 추가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한 표현은 이전보다 특별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에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라(Μὴ, 메: 아니, -하지 않도록)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라고 하였는가 하면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 속지(πλανᾶσθε, 플라나스데)는 πλανάω(플라나오: 길을 잃게 하다, 속이다, 빗나가다, 방황하다)의 동사 명령법 수동태입니다.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속게 되면 길을 잃게 되고 빗나가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가야 할 곳은 가지 못하게 되고 얻어야 할 것은 얻지 못하게 되고 헛수고만 하고 헛고생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권면한 것입니다. 초긴장해서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속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믿음의 대상부터 명확하게 하여야 속지 않게 됩니다.
거짓의 아비로서 속이는 사탄이나 우상과 땅 위의 것과 심지어 자기 자신을 믿으면 속게 되고 속으면 죽게 되고 빼앗기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17절은 이러한 것에 속지 않도록 속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속이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부터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역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좋은 은사와 모든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 은사(δόσις, 도시스)는 “주는 것,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δίδωμι(디도미: 주다, 하사하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 선물(δώρημα, 도레마)은 “선물, 하사품, 수여”라는 뜻입니다. δωρέομαι(도레오마이: 주다, 선사하다, 수여하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준다는 의미를 가진 용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좋고 온전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존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빛들의(φώτων, 포톤)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어둠에 속한 자들의 어둠의 아버지인 사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여서 결국에는 죽이고 빼앗아 가는 사탄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귀하고 좋고 온전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17절을 보면 변함(παραλλαγή, 파랄라게: 변화, 변동)과 회전(τροπή, 트로페: 회전)과 그림자(ἀποσκίασμα, 아포아스키아스마: 그림자, 어두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변하는 일도 없으시고 어두움의 일인 속이는 일도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속이지 아니하시고 신실하시기에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따라 행하면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 단락의 의미에서 보면 진리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땅 위의 것에 속지 않게 되고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기에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속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히 속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18절은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역의 측면에서 계속해서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 그(αὐτοῦ, 아우투)는 αὐτός(아우토스: 자신, 바로 그, 그는, 그녀는, 그것)의 소유격으로 “자신의”라는 뜻입니다.
⚫ 피조물 중에(κτισμάτων, 크티스마톤)는 κτίσμα(크티스마: 창조된 것, 창조물)의 소유격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창조물 가운데”라는 의미가 됩니다.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창조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주가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을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야 우리 자신을 포함한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하였습니다.
⚫ 자기의 뜻을 따라(βουλεθεὶς, 불레데이스)의 원어원형은 βούλομαι(불로마이)인데 “바라다, 원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심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낳아주셨으므로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영원히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먹고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함이 없으시고 속이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행하게 되면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렇게 낳아주신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계 14:4)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에서 우리라고 하는 용어는 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낳아준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야고보는 같은 형제들이므로 특별히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낳아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분이 아버지이시므로 그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속지 않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1:19-21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16-18절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고 19-21절은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앞서 16절에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하였는데 19절에서도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한 것은 1장 16절과 19절, 그리고 2장 5절입니다.
그만큼 강조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말에 대한 것과 성내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말과 재물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고 성내게 되면 관계가 깨지고 서로 불편하게 살아야 하므로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을 내면 말만 아니라 행동도 하게 됩니다. 언성이 높아지면 폭언이나 막말을 하게 되고 심지어 폭행까지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성내면서 하는 말을 더디 하고 그리하여 성을 더디 내야 하는 것입니다.
⚫ 마다(πᾶς, 파스)는 “모든, 온갖, 온갖 종류의, 각각의 모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반대의 뜻을 가진 용어를 볼 수 있는데 속히(ταχὺς, 타퀴스: 빠른, 신속한)와 더디(βραδὺς, 브라뒤스: 더딘, 느린)입니다.
이러하므로 사람마다라는 뜻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의 문맥으로 보면 모든 형제를 의미합니다.
빠르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있고 느리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에 대한 것인데 말을 들을 때는 빠르게 듣고 말할 때는 천천히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거꾸로 하면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복이 아니라 화를 당하게 됩니다.
말할 때 참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들을 때도 참지 못하고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거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쏘아대면 상처를 주고 관계가 깨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에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듣기는 빠르게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낼 때도 성을 천천히 내라고 하였습니다.
분노해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켜 깊이 상처를 주고 죄를 짓지 않도록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을 천천히 내다보면 성을 내려다가도 성이 가라앉게 되고 성을 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유하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성을 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을 내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면 됩니다.
속히 해야 할 것과 더디 해야 할 것을 거꾸로 적용하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리고 1장 2-4절 말씀처럼 인내하고, 5-8절 말씀처럼 지혜를 가지고, 12-15절 말씀처럼 참으면 됩니다.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라(γὰρ, 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를 감안해서 보면 19절에서 성을 더디 내라고 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형제가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이루지(ἐργάζεται, 에르가제타이)의 원어원형은 ἐργάζομαι(에르가조마이)인데 “일하다, 창조하다, 생산하다”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성을 내면 형제와의 관계가 깨지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을 내게 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도 못하게 되고 말씀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속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성을 더디 내야 한다는 것인데 곧 성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잘못된 것은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악(κακίας, 카키아스)은 “나쁨, 나쁜 것, 악”을 뜻합니다.
⚫ 내버리고(ἀποθέμενοι, 아포데메노이)의 원어원형은 ἀποτίθημι(아포티데미)인데 “벗어버리다, 버리다, 집어넣다”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나쁜 것은 간직하지 말고 옷을 벗어버리듯이 깨끗하게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성내는 것은(19-20)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 가운데 하나에 해당합니다.
이러하므로 성을 내지 않게 되면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우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이러하므로 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마음에 심어진(ἔμφυτον, 엠퓌톤)은 “뿌리박힌, 심어진”의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뿌리박혀진 말씀은 이미 평소에 설교와 성경공부와 묵상과 암송 등을 통해 심어진 말씀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말씀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마음에 많이 담겨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게 된 상태로(18) 출발해서 계속해서 말씀으로 채워지게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1장 19절의 성냄과 대조되는 의미이며, 3장 13절의 온유함도 같은 용어인데 3장 14절의 독한 시기와 다툼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언어로 다투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툼은 말씀을 겸손하게 온유한 심정으로 받아들여서 심겨진 말씀에 따라 행하게 되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먹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심어지고 새겨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만 잘 행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소유하는 상태로 만족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책꽂이에 보관해두고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이 실제로 작동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소유하려고만 하면 속게 됩니다. 소유한 것을 사용해야 속지 않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소유하려고만 하지 말고 소유한 것을 사용하여 속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교만해서 자신을 높이지 않고 자기 기준대로 살지 않고 겸손하게 온유하게 심겨진 말씀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을 속히 하지 말고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성내고 싶은 대로 성을 다 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에 해당하는 다투는 말과 성내는 것을 성경 말씀으로 온유함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의미하는 구원은 말씀을 행함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러하므로 영혼을 능히 구원하게 되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행하게 되면 능히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아 자기 자신의 잘못된 것으로부터 속지 않게 되고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투다가 나빠졌던 관계가 좋아지게 되고 쪼들리던 경제도 덩달아 좋아지게 되고 건강도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 1:22-25 말씀을 듣지만 말고 행하는 형제가 되라
22-25절은 행함에 대한 것으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들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19-21절에서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온유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22-25절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인 상태는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여 말씀을 실천하는 형제는 그렇게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되라는 것과 되지 말라는 두 가지 유형의 명령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유형의 형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하는 형제들과 듣는 형제들입니다.
⚫ 행하는 자가(ποιηταὶ, 포이에타이)는 ποιητής(포이에테스: 행하는 자, 수행자, 실행자, 시인)의 복수이므로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 듣기(ἀκροαταὶ, 아크로아타이)는 ἀκροατής(아크로아테스: 듣는 자)의 복수이므로 “듣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행하는 형제들은 말씀을 실제로 행하는 자이고 듣는 형제들은 자신을 속이고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오직 듣는 형제들이 되어 자기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되라는 것과 되지 말라는 것을 잘 구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하는 형제들은 되고 듣는 형제들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말씀을 행하는 형제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3절은 22절에 이어서 듣는 형제는 어떤 형제인지 비유로 언급하면서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 생긴(γενέσεως, 게네세오스)의 원어원형은 γένεσις(게네시스: 기원, 출생, 삶”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γίνομαι(기노마이: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ὅτι(호티: -하는 것, -때문에, 왜냐하면 –때문이다)도 감안해서 보면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형제가 된다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형제가 된다면 거울로 자기의 타고난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거울로 자기 얼굴을 수도 없이 많이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4절은 말씀을 듣는 형제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본 이후에 하는 행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듣기만 하는 형제는 마치 거울을 본 이후에 떠나가면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즉시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이후에 수도 없이 보아온 자기 얼굴을 명확하게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의 자기 얼굴도 거울을 보고 난 이후에 돌아서고 나면 잘 모릅니다.
⚫ 잊어버리거니와(ἐπελάθετο, 에펠라데토)는 ἐπιλανθάνομαι(에필란다노마이)인데 “잊다, 잊어버리다, 등한시하다, 간과하다, 무관심하다”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형제는 거울로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았으나 거울에서 떠나가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형제는 말씀을 보기만 하고 성경책을 덮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말씀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려서 말씀을 잘 행하지 못하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형제에 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5절은 말씀을 행하는 형제와 그러한 형제가 받는 복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말씀을 듣는 형제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형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형제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ἀλλά(알라: 그러나, 또한, 도리어)를 감안해서 보면 듣는 형제는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행하는 형제는 그 반대로 말씀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 실(ἔργου, 에르구)은 ἔργον(에르곤: 일, 행위, 행동)의 속격 단수입니다.
⚫ 천하는 자니(ποιητὴς, 포이에테스)는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해서 보면 “행위를 행하는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행위를 행하는 자라는 것은 말씀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하는 자에 대한 언급이 이번 단락에만 세 번이나 나옵니다(1:22 행하는 자가, 1:23 행하지, 1:25 실천하는 자니). 그만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형제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을 들여다본 이후에 즉시 잊어버리는 듣는 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형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는 형제입니다.
이러한 형제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고(1:21) 있는 형제인 것입니다.
⚫ 있는(παραμείνας, 파라메이나스)은 παραμένω(파라메노: 남아 있다, 머무르다, 계속 머물러 있다)의 동분사 과거형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행하는 형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여다보는 자는 실천하는 형제 곧 행하는 형제인데 말씀을 본 이후에 뒤돌아서서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계속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머문다는 것은 연구만 하고 읽기만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행함이라는 주제는 야고보서의 핵심 가운데 핵심입니다.
오늘날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라도 그 모든 것도 바뀌어야 하는데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사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자신에게 속게 되니까 변화가 잘 안 됩니다. 열매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변하고 개인, 나라, 가정, 사회, 학교, 직장이 변화하려면 성경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읽고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것과 행함이 분리되면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1장 22절은 야고보서의 주제 구절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유익이 없으므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적용해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고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결실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꼭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살 길입니다. 이러한 것이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배우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 자유롭게 하는(ἐλευθερίας, 엘류데리아스)은 ἐλευθερία(엘류데리아: 자유)의 명사 속격 단수입니다. “자유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1장 25절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자유의 온전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율법이라는 용어는 2장 12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속성과 기능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속성은 온전하다는 것이고 율법의 기능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은 온전하다고 하였습니다(1:17).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온전합니다.
그러한 것 가운데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합니다(삼하 22:31, 시 18:30, 19:7). 율법 가운데 하나인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직접 써 주신 것으로 온전한 계명입니다.
야고보서 1장의 범위 안에서 그러한 율법의 말씀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인내를 이루라(2-4), 지혜를 구하라(5-8),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는 자랑하라(9-11), 시험을 참으라(12-15), 속지 말라(16-18), 성내지 말라(19-21),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22-25), 경건하라(26-27).
이와 같은 율법의 말씀은 온전하며 자유를 가져다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내와 지혜가 있으면 서로 다투지 않게 되고 성내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속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툼에서 자유하게 되고 속는 것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므로 자기 자신의 잘못된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1장 25절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셔서 우리를 종의 멍에인 율법의 행위에서 속량해주셔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갈 3:13).
야고보서는 마치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고 있는 형제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고 행함에 대한 실천과제를 제시해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마치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아닙니다.
2장 10절을 보면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으므로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형제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2:22)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서는 1장 25절에 말씀을 실천하는 형제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잘못된 것으로부터 속지 않게 되고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투다가 나빠졌던 관계가 좋아지게 되고 쪼들리던 경제도 덩달아 좋아지게 되고 건강도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행하는 형제는 듣는 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행하여서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게 됩니다.
속아서 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 순종에 대한 구체적인 복은 신명기 28장 1-14절을 참고하면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 상주시는 것이 믿어질 때(히 11:6),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을 만나더라도 맡겨진 사명과 삶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쁘게 묵묵히 잘 감당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알아주시고 갚아주신다고 하시니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나의 말과 행동과 마음과 생각을 낱낱이 아시고 모두 갚아주시는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니 힘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시 62:12).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였습니다(롬 2:6).
성경을 마치는 마지막 부분에 그러한 것을 강조하면서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셔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하셨습니다(계 22:12, 2:23).
그리고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 대로 갚아주겠노라는 구절도 볼 수 있습니다(렘 17:10).
또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고전 3:8).
이러하므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헛수고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에 대해 갚아주시니 그러한 것입니다.
선한 일은 선한 대로 악한 일은 악한 대로 공정하게 의롭게 세밀하게 갚아주시니 안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므로 그러합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을 행하는 자(1:22)와 실천하는 자(1:25)로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면서(1:25)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1:26-27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26-27절도 속지 말라는 것인데 경건과 관련하여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속지 않고 참된 경건을 하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조심하라고 하는 것인데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하고(26),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야 하고(27),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고(27)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실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언어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여기에서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은 경건 가운데 말에 대한 경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혀에 재갈을 물려서 말조심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구든지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 그러한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 앞에 나오는 경건(θρῆσκος, 드레스코스)은 형용사로 “경건한, 하나님을 섬기는”의 뜻입니다.
⚫ 뒤에 나오는 경건은(θρησκεία, 드레스케이아)은 명사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 신앙”의 뜻입니다.
속이면 앞에 나오는 원어성경에 있는 ἀλλά(알라: 그러나, 또한, 도리어)도 감안해서 보면 자기의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제어하지 아니하면서 또한 자기 마음을 속이면서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형제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1:16) 하였는데 자신에게 속지 않으려면 말씀을 행하면(1:22) 됩니다.
이러하므로 말씀에 따라 말조심하여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자기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건 가운데 하나가 말조심이라는 것입니다.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절도 경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경건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θρησκεία, 드레스케이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앞에서(παρὰ, 파라)는 “-의 곁으로부터, -의 곁에”라는 뜻입니다. 여격이므로 “-곁에, -와 함께, -부터”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더 가깝게 볼 수 있으므로 그만큼 더 경건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정결하고(καθαρὰ, 카다라)는 “깨끗한, 순결한”의 뜻입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깨끗하고 순결하고 순수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곁에서의 경건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의로우시고 순결하시며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곁에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건으로 이번에도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환난 가운데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돌보고(ἐπισκέπτεσθαι, 에피스켑테스다이)는 ἐπισκέπτομαι(에피스켑토마이: 돌보다, 택하다, 방문하다)의 동부정사 현재형입니다.
돌보고는 현재형이므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계속해서 돌보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찾아가서 방문하고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곁에서의 순수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야고보서에서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거나 압제하지 말라고(출 22:22, 렘 22:3, 슥 7:10) 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일조 등으로 도와주라고(신 14:22-29, 24:17-21, 26:12-13, 사 1:17) 하였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시 68:5)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욥이 인내와 관련하여 등장하므로 여기에서도 살펴보면 욥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실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욥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 선행이 욥기에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고아와 과부와 관련된 29장 12-17절과 31장 16-22절입니다.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가 없는 고아를 건졌고, 망하게 된 자도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29:12-13).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와 같았다고 하였고,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었다고 하였습니다(29:14-15).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고,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다고 하였습니다(29:16-17).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라고 하였고,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하였습니다(31:16-17).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31:18).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이라고도 하였습니다(31:19).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31:20),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이라고 하였습니다(31:20-21).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고 하였습니다(31:22).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을 받아야 할 고아와 과부를 확장해서 살펴보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올바른 경건이요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러한 경건으로 하나 더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 세속(κόσμου, 코스무)은 κόσμος(코스모스: 질서, 세계, 세상, 장식)의 소유격 단수입니다.
⚫ 물들지 아니하는(ἄσπιλον, 아스필론)은 “점이 없는, 흠이 없는”의 뜻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흠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곁에서의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지(4:4) 아니하는 것도 하나의 이러한 경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건이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경건이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정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경건이 그러한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조심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그러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1년 11월 3일
발 행 일 2021년 8월 13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15-8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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