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2장 형제들아 차별하지 말라
2장 개요
✙✙✙ 2장 구절
야고보서 2장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형제들에게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는 1절입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 2장 주제
야고보서를 행함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형제가 되라는(1:22)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고(2:22)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된다는(1:25)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2:14)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형제들에게 이러한 행함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위하여 행함에 대한 다섯 가지의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2장은 차별하지 말라는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부유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여 대우하는 형제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장은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형제들아 차별하지 말라가 됩니다.
✙✙✙ 2장 구조
야고보서 2장은 형제들에게 차별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2장에서 의미하는 올바른 믿음은 차별하지 않는 믿음을 뜻합니다.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를 차별대우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형제를 돕는 믿음이 행함이 있는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2장의 올바른 믿음은 차별하지 않고 돕는 믿음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아까워하여 돕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몸에 쓸 것을 주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함으로 비로소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가지도록 해주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고보서 2장은 행함과 믿음에 관한 것을 경제생활을 예로 들어서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1-13절은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 14-26절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1-13절은 차별을 통해, 14-26절은 도와주지 않음을 통해 밝혀주고 있으며, 1-13절은 율법을 통해, 14-26절은 아브라함과 라합을 통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2장에서는 차별하지 말라는 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2장은 모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3절은 차별대우하지 말라, 14-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 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3절은 행함에 관한 것을 경제생활을 예로 들어 차별하여 대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4절은 회당에서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의 겉모습을 보고 차별하여 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7절은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부한 형제는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고 이름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8-11절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나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모두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2-13절은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인 14-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예를 들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함은 앞의 단락인 1-13절에서 언급한 차별하지 않는 것도 해당이 됩니다.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차별하여 쓸 것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도와줄 때 차별하여 돕지 않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14-17절은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경제생활을 예로 들면서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여 쓸 것을 주지 않고 말만 해서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8-20절은 믿음과 행함을 대조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21-24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25-26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장 개관
단락 | 단락별 개요 |
1-13 | 차별대우하지 말라 |
14-26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 |
2:1-13 차별대우하지 말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2장의 주제는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13절 단락은 차별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13절은 행함에 관한 것을 경제생활을 예로 들어 차별하여 대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4절은 회당에서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의 겉모습을 보고 차별하여 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7절은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부한 형제는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고 이름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8-11절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나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모두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2-13절은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 2:1-4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라
1-4절은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차별하지 말라는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가 들어올 때 겉모습을 보고 차별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부한 형제에게는 좋은 자리를 권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형제는 천하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장 1절을 시작하면서 내 형제들아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형제애로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람을 차별하여(προσωπολημψίαις,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는 προσωπολημψία(프로소폴렘프시아: 차별대우, 편파심, 편견)의 여격 복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을 때(롬 2:11, 엡 6:9, 골 3:25) 사용되었으며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형제를 외모로 취하여 편견을 가지고 차별대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너희들은 형제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별대우함으로써 그런 영광을 가려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대우하는 것은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어버리므로 차별대우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야고보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2절에서도 차별대우의 하나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회당에 들어오는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λαμπρᾷ, 람프라)은 “빛나는, 번쩍이는, 화려한”의 뜻입니다.
⚫ 남루한(ῥυπαρᾷ, 뤼파라)은 “더러운, 불결한”의 뜻입니다.
부한 형제는 번쩍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낀 형제입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형제는 더러운 불결한 옷을 입은 형제입니다.
외모로 보기에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형제가 회당에 들어올 때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3절은 회당에 들어온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에 대해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차별대우하는 장면인데 부한 형제는 눈여겨보고 좋은 자리에 앉게 해줍니다.
그러나 가난한 형제에게는 자리도 없이 서 있게 하거나 자리가 있어도 발등상 아래에 앉게 한다는 것입니다.
⚫ 눈여겨보고(ἐπιβλέψητε, 에피블렢세테)의 원어원형은 ἐπιβλέπω(에피블레포)인데 “바라보다, 생각하다, 유념하다”라는 뜻입니다.
⚫ 발등상(ὑποπόδιόν, 휘포포디온)은 “발판”의 뜻입니다.
부한 형제가 들어올 때는 관심을 가지고 존중하면서 바라보고는 멋지게 좋은 자리를 정중하게 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형제가 들어올 때는 본척만척하면서 세워놓거나 자리를 권해도 발판 아래에 앉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2: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4절은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를 차별대우한 결과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차별하며(διεκρίθητε, 디에크리데테)는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 구별하다, 분별하다, 판단하다, 의심하다, 흔들리다, 주저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만일 잘 차려입은 부한 형제와 그렇지 못한 가난한 형제를 구별해서 차별대우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너희들끼리 판단을 받는 행위가 되고 그렇게 되면 판단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4장 11절에도 판단하는 자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준행자와 재판관에 대한 언급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단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준행하여야 하는 준행자라는 것입니다.
원어성경 처음에 나오는 οὐ(우: 아니다, -아닌)와 마지막에 나오는 물음표(;)를 감안해 보면 그렇게 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의 방식을 4-7절까지 연속하고 있습니다.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2:5-7 도리어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겼도다
5-7절은 차별하지 말라는 연장선상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경제생활을 예로 들고 있는데 가난한 형제와 부한 형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부한 형제는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고 이름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대우를 받는 부한 형제는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고 이름을 비방한다고 하였습니다.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5절을 시작하면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 택하사(ἐξελέξατο, 엨셀렠사토)는 ἐκλέγω(에클레고: 골라내다, 선택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형입니다.
⚫ 상속으로 받게 하지(κληρονόμους, 클레로누스)는 κληρονόμος(클레로노모스: 상속자, 후계자, 후사)의 대격 복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형제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고 골라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형제들을 선택하셔서 믿음에 부한 형제들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나오는 οὐχ(우크: 아니다, -아닌)와 마지막에 나오는 물음표(;)를 감안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는 것입니다.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형제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형제들과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너희들은 도리어 가난한 형제들을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한 형제들에 대해 추가로 언급하기를 부한 형제들은 너희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 업신여겼도다(ἠτιμάσατε, 에티마사테)는 ἀτιμάζω(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복수입니다.
차별대우하여 가난한 형제들은 업신여기고 부한 형제들은 존귀하게 대하였으나 부한 형제들은 너희들을 압제하고 너희들을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나오는 οὐχ(우크: 아니다, -아닌)와 마지막에 나오는 물음표(;)를 감안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2: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7절에서도 6절에 이어 부한 형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한 형제들은 너희들에게 대하여 붙여진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일컫는(ἐπικληθὲν, 에피클레덴)은 ἐπικαλέομαι(에피칼레오마이: -에 이름을 붙이다, 부르다, 호소하다, 상소하다, 청원하다)의 동분사 과거 수동태입니다.
⚫ 비방하지(블라스페무신, βλασφημοῦσιν)는 βλασφημέω(블라스페메오: 중상하다, 비방하다, 모독하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복수입니다.
너희들이 차별하여 존귀하게 대하는 부한 형제들은 오히려 너희들에게 대하여 붙여진 좋은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나오는 οὐκ(우크: 아니다, -아닌)와 마지막에 나오는 물음표(;)를 감안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4-7절까지 물은 것은 특별히 무엇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한 형제들을 대할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귀하게 대하고 이와 반대로 가난한 형제들을 대할 때는 차별하지 말라고 해도 차별합니다.
이러하므로 가난한 형제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2:8-11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8-11절에서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율법의 기능에 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법인 율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나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모두 율법을 범한 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언급하면서 형제 사랑의 실천과제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8절은 형제 사랑에 대한 것을 율법의 기능을 통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형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제로 지키면 잘 행하는 것입니다.
⚫ 최고의(βασιλικόν, 바실리콘)는 βασιλικός(바실리코스: 왕의, 왕에게 속한, 최고한)의 형용사 대격 단수입니다.
⚫ 법을(νόμον, 노몬)은 “율법을”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왕에게 속한 왕의 말씀이므로 왕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으므로 율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왕적인 권위를 가진 최고의 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형제를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레위기 19장 18절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최고의 법인 말씀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지키(τελεῖτε, 텔레이테)는 τελέω(텔레오: 끝내다, 완성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복수입니다.
⚫ 하는 것이거니와(ποιεῖτε, 포이에이테)는 ποιέω(포이에오: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복수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μέντοι(멘토이: 실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감안해서 보면 이러한 말씀을 실제로 성취한다면 잘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실천은 행함을 주제로 삼고 있는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개념입니다.
박해상황 아래에서 보다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언어생활과 경제생활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형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여기면서 다투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롬 13:10, 갈 5:14).
모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전 12:13). 이러한 것에 응답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견고히 하는 가운데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22:37-40).
이러한 형제 사랑은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요일 4:12, 20, 5:3).
이처럼 서로 사랑하는 과제를 해결받게 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행하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이러한 사랑을 최고의 법이라고까지(2:8) 언급하면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행함은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요 13:34, 15:12, 17, 요일 3:23)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요한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요일 3:11, 23, 4:7, 11, 12).
이러한 야고보서는 형제들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모든 것이 회복되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9절에서 율법의 기능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여 죄가 드러나게 되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면서 차별대우하는 죄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차별대우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율법이 범법자로 정죄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δὲ(데: 그러나, 그리고, 게다가, 더구나, 지금)를 감안해서 보면 형제 사랑을 실천한다면 잘 행하는 것이나 그러나 차별대우한다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προσωπολημπτεῖτε, 프로소폴렘프테이테)는 προσωπολημπτέω(프로소폴렙테오: 차별대우하다, 편애하다, 편견에 치우친 판단을 내리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복수입니다.
⚫ 짓는 것이니(ἐργάζεσθε, 에르가제스데)의 원어원형은 ἐργάζομαι(에르가조마이)인데 “일하다, 창조하다, 생산하다”라는 뜻입니다.
형제를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대우한다면 차별대우하는 만큼 죄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기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 3:20, 7:7).
⚫ 정죄하리라(ἐλεγχόμενοι, 엘렝코메노이)의 ἐλέγχω(엘렝코: 드러내다, 폭로하다)의 동부정사 현재 수동 복수입니다.
형제를 차별하면 마치 범법자들이 율법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처럼 차별대우한 죄도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0절에서도 율법의 기능에 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가운데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범하면(πταίσῃ, 프타이세)은 πταίω(프타이오: 비틀거리다, 걸려 넘어지다, 실수하다, 범죄하다)의 동사 가정법 과거형입니다.
⚫ 범한 자가(ἔνοχος, 에노코스)는 “죄가 있는, -에 복종하는, -할 책임 있는”의 뜻인데 형용사 주격 단수입니다. 실명사로 본다면 “죄가 있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잘 지키다가 한 가지를 범하면 하나만 범한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범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만 범했더라도 율법 전체를 범한 것이 되므로 결국에는 모두가 죄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를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소해 보이는 율법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실천과제인 차별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고 차별하지 말라는 것을 율법의 기능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또다른 기능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율법 전체를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이러하므로 구원을 행함으로 얻게 된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어서 마치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해 초점을 두고 강조하다 보니 그런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하여야 할 실천과제를 제시해주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율법을 실제로 잘 행할 수 있는 비결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잘 행하도록 해주셨으므로 성령님에 따라 율법을 잘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겔 36:27, 롬 8:1-4, 갈 5:16-18).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1절은 앞서 10절에 하나를 범해도 모두 범하게 되는 것이라고 언급한 율법의 기능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모세에게 친히 써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제6계명과 제7계명입니다(출 20:13, 14, 신 5:17, 18).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비록 간음하지 않아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아도 간음하게 되면 이 역시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든 하나라도 범하면 율법을 범한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 범한 자(παραβάτης, 파라바테스)는 9절의 범법자(παραβάται, 파라바타이: παραβάτης, 파라바테스의 복수)와 동일한 어원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도 감안해서 보면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고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간음하든 살인하든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그렇습니다. 이러하므로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간음도 하지 말고 살인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본 단락의 문맥에 비추어 본다면 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언어와(1:19-20, 26, 3:2-10, 14, 4:2, 11, 5:9, 12) 재물과(1:9-11, 27, 2:3, 15-16, 4:13-17, 5:1-6) 건강에(5:14-16, 19-20) 대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간음에 대한 것은 빠진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3장 17절에서는 첫째 성결하고라고 하였고, 4장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고 있으나 간접적으로 간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2:12-1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2-13절은 차별하지 말라는 연장선상에서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 긍휼과 심판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긍휼을 베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2절도 율법의 기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 자유의(ἐλευθερίας, 엘류데리아스)는 ἐλευθερία(엘류데리아: 자유)의 명사 속격 단수입니다.
자유의 율법이라는 용어는 1장 25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데 “자유의 온전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은 율법의 기능에 대한 것인데 율법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의 율법이 주는 자유는 말과 행위에 있어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으므로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율법에 의한 심판을 받지 않도록 율법이 주는 자유인데 말과 행위에 있어 자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이 심판을 받을 말과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여 율법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οὕτως(후토스,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를 감안해서 보면 너희들은 마치 무엇을 하는 것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너희들은 말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언급해주고 있는데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하는 방식입니다.
⚫ 대로(διὰ, 디아)는 “-을 통하여, -을 지나, -에 의하여, -로 말미암아,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 받을 자(μέλλοντες, 멜론테스)는 μέλλω(멜로: 곧 -하려고 하다, -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하게 되다)의 동분사 현재 능동태입니다.
율법에 의하여 말한 것이 반드시 심판받게 되어 있고 행한 것이 반드시 심판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방식을 알고 조심해서 말하고 그러한 방식을 알고 조심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심판을 받게 되는 말도 하지 말고 심판을 받게 되는 행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과 행위 가운데 하나가 긍휼이라는 것을 12절에 이어서 13절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은 긍휼과 심판에 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긍휼을 베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언급한 심판의 예로 긍휼을 들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숨은 뜻은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면서 차별대우하지 말고 긍휼을 베풀어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심판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으므로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 긍휼(ἔλεος, 엘레오스)은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의 뜻입니다.
⚫ 행하지(ποιήσαντι, 포이에산티)는 ποιέω(포이에오: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의 동분사 과거 능동태 단수입니다.
⚫ 긍휼이 없는(ἀνέλεος, 아넬레오스)은 “자비가 없는, 무자비한, 동정심이 없는”의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도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형제는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긍휼을 베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기고 자랑하느니라(κατακαυχᾶται, 카타카우카타이)의 원어원형은 κατακαυχάομαι(카타카우카오마이)인데 “-에 대하여 자긍하다, 우쭐대다, 의기양양해 하다”라는 뜻입니다.
긍휼이 심판 앞에서 우쭐대면서 의기양양해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되고 긍휼을 행하게 되면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자신이 어떤 심판을 받을 때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실 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우리도 가서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중요한 것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실천으로 가난한 형제를 차별대우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때 대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긍휼을 베풀었는가의 여부인 것을 보면 긍휼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하라는 것이고, 2장의 주제는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4-26절 단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예를 들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함은 앞의 단락인 1-13절에서 언급한 차별하지 않는 것도 해당이 됩니다.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차별하여 쓸 것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도와줄 때 차별하여 돕지 않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14-17절은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경제생활을 예로 들면서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여 쓸 것을 주지 않고 말만 해서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8-20절은 믿음과 행함을 대조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21-24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25-26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 2:14-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4-17절은 경제생활을 예로 들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러한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만 하고 실제로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그러한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장 후반부인 14-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핵심을 요약하면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시작하고 있는 14절에서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러한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새롭게 다시 강조하면서 권면하기 위하여 내 형제들아라고 호칭하면서 2장 마지막까지 후반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4절을 시작하면서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 있노라(ἔχειν, 에케인)는 ἔχω(에코: 가지다, 소유하다)의 동부정사 현재 능동태입니다.
⚫ 없(μὴ, 메)은 “아니, -하지 않도록”의 뜻입니다.
⚫ 으(ἔχῃ, 에케)는 ἔχω(에코: 가지다, 소유하다)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입니다.
유익이 있으리요는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무슨과 함께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질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약 2:14, 16, 고전 15:32).
“만일 어떤 형제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행할 때 행하는 만큼의 유익이 뒤따르는데 행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도 하였습니다.
⚫ 구원하겠(σῶσαι, 소사이)은 σώζώ(소조: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존하다)의 동부정사 과거 능동태입니다.
⚫ 느냐(μὴ, 메)는 “아니, -하지 않도록”의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할 때 행하는 만큼의 구원을 받게 되는데 행하지 않으므로 그만큼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함과 구원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지 않아서 천국에 가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지 않은 만큼의 천국의 삶과 상급의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전혀 없어서 열매가 전혀 없다면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영생의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구원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는 행함의 열매가 전혀 없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영생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삶과 상급의 많고 적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구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보면 영혼을 능히 구원하게 되고(1:2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게 되고(2:14),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능히 구원하시고(4:12), 병든 형제를 구원하게 되고(5:15),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된다는(5:20)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가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셔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되어 마귀에게 속해 심판을 받고 영원히 멸망하게 되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서(5:11)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러한 비참한 상태로 두지 아니하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를 업신여기고 차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쓸 것을 실제로 도와주어서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자기에게 복을 받게 하여 자신을 구원하고 다른 형제도 구원하게 해줍니다. 자신은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되고 다른 형제에게는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요 유익을 주는 올바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열두 지파(1:1)와 관련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열두 지파는 유대인 형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 출신의 형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갈 3:6-9, 26-29, 롬 9:24, 3:29-31, 4:9-25).
이처럼 열두 지파는 모든 형제를 의미하므로 야고보서의 수신 대상은 모든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하는 불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모든 형제들을(2:1) 상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야고보서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형제가 믿는 자답게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형제에게 말한 것이기에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행하여야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야고보서의 구원관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거나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약 2:10, 23)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롬 3:19-28, 4:1-8, 갈 2:16-21, 3:23-25).
다만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은 자가 행함이 거의 없어서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면 행함의 열매가 거의 없으므로 마치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올바른 믿음이 있으면 행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행하게 될 때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2:22)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거의 없으면 유익도 거의 없게 되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또한 헛믿음이라는(2:17, 20, 26)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으로 올바른 믿음을 가져서 나도 잘 되고 다른 형제도 잘 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5-1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예를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5절은 그들이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을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 헐벗고(γυμνοὶ, 귐노이)는 γυμνός(귐노스: 벌거벗은, 옷을 입지 않은)의 형용사 주격 복수입니다.
⚫ 원어성경에 있는 ὑπάρχωσιν(휘파르코신)은 ὑπάρχω(휘파르코: 시작하다, 손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 있다, 있다)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복수입니다.
⚫ 없는데(λειπόμενοι, 레이포메노이)는 λείπω(레이포: 남겨두다, 부족하다, 필요하다, -이 없다, 결핍하다)의 동분사 현재형 복수입니다. 1장 4절의 부족함이와 5절의 부족하와 동일한 어원입니다.
옷을 입지 않은 형제나 자매가 손 가까이에 있거나 한 날을 위한 음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입을 옷이 없다거나 하루 먹을 음식물이 부족한 상태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5절의 형제나 자매의 경우와 같이 옷과 음식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 이러한 형제나 자매를 대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몸에 쓸 것을 주지 않고 말로만 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 쓸 것을(ἐπιτήδεια, 에피테데이아)은 ἐπιτήδειος(에피테데이오스: 적당한, 필요한)의 형용사 대격 복수입니다.
⚫ 덥게(θερμαίνεσθε, 델마이네스데)는 동사 명령법으로 원어원형은 θερμαίνω(델마이노)인데 “따뜻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누구든지 그들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만 하고 그들에게 몸의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니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쓸 것을 실제로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말들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5-16절에 언급한 것처럼 입을 옷이 없거나 하루 먹을 음식물이 부족한 형제나 자매에게 말만 하고 실제로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 없(μὴ, 메)은 “아니, -하지 않도록”의 뜻입니다.
⚫ 는(ἔχῃ, 에케)은 ἔχω(에코: 가지다, 소유하다)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입니다.
원어성경에 있는 ἐὰν(에안: 만일 -이라면)도 감안해서 보면 만일 행함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행하게 되어 있는데 행하지 않아 믿음이 없는 것이 되므로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에 무슨 유익도 없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믿음은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다면 믿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죽은 믿음이란 믿기는 하는데 믿음이 거의 없어서 행함이 거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믿음은 믿음의 여부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이 작으면 행함도 작아지기에 믿음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면 행함도 거의 죽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 2:18-20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믿음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18-20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것을 어떤 형제의 말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19절에서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증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들고 있습니다.
20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형제는 허탄한 형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8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것을 어떤 형제의 말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 있고(ἔχεις, 에케이스)와 있으니(ἔχω, 에코)의 원어원형은 ἔχω(에코)인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입니다.
너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나는 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므로 그러한 논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앞서 18절에서 언급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증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귀신들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 도(καὶ, 카이)는 19절의 원어성경에 믿고(πιστεύουσιν, 피스튜우신)와 떠느니라(φρίσσουσιν, 프릿수신)의 앞에 나옵니다.
καὶ(카이)…καὶ(카이)는 “-도 -도, -은 물론 -도, -뿐만 아니라 -도 역시”라는 뜻입니다.
귀신들이 믿기도 하고 떨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떨고 때로는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들의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일반적인 상태의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잘 알기는 하나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행하지는 않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신들의 죽은 믿음은 유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멸망시키고(요 10:10) 자기 자신마저도 구원하지 못하고 영벌을 받게 되는(계 20:10)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 되고 헛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맥에서 보면 가난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쓸 것을 실제로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산 믿음인 것입니다.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0절은 18-20절 단락의 결론 부분인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형제는 허탄한 형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 허탄한(κενέ, 케네)은 κενός(케노스: 공허한, 허무맹랑한, 성과 없는, 텅빈, 내용이 없는)의 형용사 호격 단수입니다.
⚫ 헛것(ἀργή, 아르게)은 ἀργός(아르고스: 무익한, 일없는, 게으른, 소용없는, 쓸모없는)의 형용사 주격 단수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형제는 공허한 형제가 되고 그러한 믿음은 무익한 소용이 없는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 2:21-24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
21-24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에 바쳤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 바칠 때에(ἀνενέγκας, 아네넹카스)는 ἀναφέρω(아나페로: 데리고 올라가다, 담당하다, 제사드리다)의 동분사 과거 능동태입니다. “바쳤을 때”라는 의미입니다.
⚫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ἐδικαιώθη, 에디카이오데)는 δικαιόω(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독자인 이삭을 제단에 데리고 올라가서 바쳤을 때 그러한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네가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러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함께 일하고(συνήργει, 쉬네르게이)는 συνεργέω(쉬네르게오: 함께 일하다, 협력하다)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입니다.
⚫ 온전하게 되었느니라(ἐτελειώθη, 에텔레이오데)는 τελειόω(텔레이오오: 완성하다, 수행하다, 이루다, 끝내다, 완전하게 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일하므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3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21절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22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에(καὶ, 카이)는 “그리고, -와, 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결과를 나타낼 때는 “그러므로”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서는 “그러므로, 그래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삭을 바친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고(21) 그러한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22)으므로 이미 그러한 믿음과 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믿으니( ̓Επίστευσεν, 에피스튜센)는 πιστεύω(피스튜오: 믿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입니다.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이므로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 벗이라(φίλος, 필로스)는 실명사로는 “친구”라는 뜻이고, 형용사로는 “사랑하는, 친절한, 친구다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친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4:4)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행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가 붙게 된 것입니다.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4절은 행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관련하여 믿었던 것을 실제로 행하였을 때 믿은 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그때서야 비로소 성취하게 되었습니다(히 11:17-19).
믿기만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바쳐 믿은 것을 그대로 행하였으므로 믿은 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만은(μόνον, 모논)은 “단지, 다만, 오직”의 뜻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고 단지 믿음으로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고 은혜로 됩니다(갈 2:16, 롬 3:28, 엡 2:8-9, 딤후 1:9).
이러하므로 야고보서에서 의미하는 죽은 믿음은 믿기만 하고 거의 행하지 않는 죽은 것과 같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함이 거의 없기에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행함의 크기가 다릅니다. 큰 믿음은 행함이 크고 작은 믿음은 행함이 작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부족하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는 갑니다. 믿음의 크기에 따라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크기에 따라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 차이가 나고 상급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형제들에게(2:1) 권면하고 있기 때문에 행함이 거의 없는 죽은 믿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산 믿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분발하라는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더 많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도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로 여겨졌다는 것은 이신칭의에서 의미하는 의가 아닙니다. 행함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러한 의에 대한 평가는 천국의 구원과 관련된 의가 아니라 천국의 삶과 상급과 관련된 의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 2:25-26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
25-26절에서도 21-24절에 이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는데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그러한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을 등장시킨 것을 보면 힘이 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형제를 차별하지 말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해주었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ὁμοίως, 호모이오스)는 “같이,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된 것과 같이 라합도 그와 같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접대하여(ὑποδεξαμένη, 휘포뎈사메네)의 원어원형은 ὑποδέχομαι(휘포데코마이)인데 “영접하다, 환영하다, 손님으로 대접하다”라는 뜻입니다.
⚫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ἐδικαιώθη, 에디카이오데)는 δικαιόω(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21절의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와 동일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라합이 사자들을 영접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했을 때 그렇게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고(마 1:5) 자기와 자기 가족과 친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수 6:22-25, 히 11:31).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은 앞서 14-25절까지 언급해온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결론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동안 행함이 없으면 유익이 없고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고(14), 그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20) 하였습니다.
그런데 2장을 마치면서 또다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 없는(χωρὶς, 코리스)은 “-없이, -아니면, -외에”의 뜻입니다. 그리고 “따로 따로, 갈라져, 떨어져서”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없는…없는이라고 하였으며 죽은…죽은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이 없고 무엇과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26절에서 없는 것을 보면 영혼과 행함이 없다는 것인데 영혼과 행함이 몸과 믿음과 떨어져서 분리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죽은 것이 됩니다. 26절에서 죽은 것을 보면 몸과 믿음이 죽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이 영혼에서 분리되면 죽고 믿음이 행함에서 분리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원어성경에 있는 γὰρ(가르: 참으로, 사실은, 왜냐하면, 그러면)와 οὕτως(후토스: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를 감안해서 보면 왜냐하면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행함들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하게 되어 있는데 믿음이 죽어 있으므로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은 믿음이 있으므로 믿음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고(21, 24, 25),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22).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행위 구원이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칭의는 행함과는 무관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니까 주님께서 칭의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어기는 것이 되고(2:10) 그렇게 되면 모두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러하므로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행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믿다가도 잘못 믿으면 지옥에 간다. 행함의 대가로 천국에 간다”라고 말하는 그 사람조차도 모두 지옥에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크기가 다르다고 해서 지옥에 가고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야고보서 (재개정판)
재개정일 2024년 1월 12일
개 정 일 2021년 11월 3일
발 행 일 2021년 8월 13일
지 은 이 이서영
출 판 사 퍼플
출판등록 제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1544-1900
홈페이지 www.kyobobook.co.kr.
ISBN 978-89-24-12015-8
ⓒ 이서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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